전북 현대의 'V3'를 이끈 최강희 감독은, 기존의 프로 스포츠 지도자들하면 흔히 떠올리는 보편적인 이미지와 거리가 먼 독특한 캐릭터다. 체육인 출신치고는 왜소한 체구와 2대 8가르마로 대표되는 '서민적인' 외모, 속내를 알 수 없는 무심한 표정과 가늘고 느릿느릿한 말투는 언뜻 보면 카리스마 넘치는 '감독님'이라기보다 평범한 시골의 촌로 혹은 동네 아저씨를 더 연상시킨다.

하지만 최강희 감독은 무서운 집념과 열정을 가슴 속에 감춘 전형적인 승부사다. 지금이야 '봉동이장', '강희대제'같이 친근한 별명으로 익숙하지만, 프로축구 수원과 국가대표팀 코치 시절까지만 해도 선수들 사이에서는 '저승사자', '칼있으마'로 더 유명한 군기반장이었다는 것을 아는 팬들은 많지 않다.

현역 시절엔 그저 그런 평범한 선수로 사라질 뻔하다가 뒤늦게 축구에 눈을 떠 30대에 늦깎이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월드컵 대표팀 주전까지 차지하는 인생역전의 스토리도 있었다. 현재 K리그에서 가장 유명한 감독의 반열에 오르기 전까지, 최강희 감독의 축구 인생은 무수한 도전과 고비의 성장통을 극복하면서 달려온 한편의 인간극장이었다.

그저 그런 선수에서 늦깎이 국가대표로

 최강희 전북현대 감독

최강희 전북현대 감독 ⓒ 연합뉴스


최강희 감독의 인생은 대기만성의 전형으로 요약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지만 집안의 만류로 중학교 3년간 일반 학교에 다니다가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한양공고에 진학하며  다시 축구를 시작했다. 3년의 공백을 메우느라 1년 유급을 감수하고 다시 우신고로 진학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에 실패한 최강희 감독은 실업팀 한일은행을 거쳐 프로팀 현대(현 울산) 호랑이의 창단 멤버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어렵게 프로 선수의 목표를 이룬 뒤 매너리즘에 빠진 최강희 감독은 한동안 운동을 게을리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유흥으로 시간을 낭비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현실을 자각한 최강희 감독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축구에 매진하기 시작했고, 선수 생활의 후반부에 비로소 축구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남들보다 늦게 축구를 시작한 최강희 감독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기술과 재능을 한 발 더 많이 뛰는 활동량과 체력, 파이팅으로 만회했다. 현역 시절 오른쪽 풀백과 미드필더로 주로 활약하며 K리그 205경기에 나서 10골 22도움을 기록했다. 프로 이전까지 연령대별 대표 팀조차 한 번도 발탁된 경험이 없었지만, 만 29세이던 1988년 서울올림픽을 시작으로 아시안컵, 월드컵 본선까지 늦깎이 국가대표로 맹활약했다.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당당한 주전 수비수로 조별리그 3경기를 풀타임으로 출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강희 감독의 말년은 깔끔하지 못했다. 1992년 당시 현대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해온 차범근 감독의 강압적 지도 방식을 둘러싼 갈등 끝에 33세의 나이에 다소 불명예스럽게 은퇴해야 했다. 이후 1995년 수원 삼성에서 트레이너로 제2의 축구 인생을 시작한 최강희 감독은 1998년부터 2001년까지 김호 감독 밑에서 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받았고, 이후 23세 이하 대표팀 코치-2003년 A대표팀 코치를 거쳐 마침내 2005년 7월 전북의 지휘봉을 잡고 K리그 사령탑으로 데뷔했다.

한국판 퍼거슨, 봉동 이장의 전성시대

최강희 감독의 지도자 인생은 선수일 때보다 더 화려했다. 전북 지휘봉을 잡고 국내외 주요 대회에서 프로팀이 따낼 수 있는 모든 타이틀을 석권했다. 2005년 부임 5개월 만에 첫 FA컵 우승을 시작으로, 2006년에는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어 2009년, 2011년, 그리고 팀 창단 20주년을 맞이한 2014년 올해까지 전북을 세 번이나 K리그 정상으로 이끌며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명장 반열에 올랐다.

최강희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북은 K리그에서도 그저 그런 팀이었다. FA컵 우승을 두 번 차지했지만 리그 성적은 꾸준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선수들의 프로 의식이나 팀에 대한 애착은 바닥 수준에 가까웠다. 그때만 해도 초보 감독에 불과한 최강희 감독의 선임을 놓고 고개를 갸웃하는 팬들이 대다수였다.

전북은 최강희 감독이 부임한 이후 환골탈태했다. 최강희 감독은 전북이 아직 리그의 강팀으로 자리매김하기 전부터 '약팀은 수비 위주의 실리 축구에 치중해야한다'던 고정관념을 깨고, 과감한 공격 축구를 선보였다. 최강희표 공격 축구를 상징하는 '닥공(닥치고 공격)'이라는 신조어가 전북의 고유한 팀컬러로 자리매김했고, 성적과 재미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재활공장장'이라는 별명은 최강희 축구를 설명하는 또 다른 키워드다. 최강희 감독은 재임 기간 중 '신의 한 수'로 꼽히는 이동국 영입을 비롯해 김남일, 최은성, 김상식, 최태욱, 심우연, 조재진 등 전성기가 지났다고 평가받은 노장이나, 부상 혹은 슬럼프로 고전하던 선수들을 데려와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이밖에도 루이스, 에닝요, 권순태, 염기훈, 김형범, 최철순, 이승기, 서정진 등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선수들이 전북을 거쳐 K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로 성장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전북이 지금처럼 선수 영입에 많은 돈을 쓰기 전부터의 일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선수들에 대한 동기 부여와 탁월한 관리 능력이다. 최 감독은 선수의 성향과 장단점을 사전에 철저히 파악하고, 한번 믿음을 준 선수는 끝까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주는 스타일이다. 최 감독은 선수들의 재능과 팀의 목표의식 사이에서 최상의 조화를 끌어낼 줄 아는 추진력이 있다.

유럽 무대의 실패와 성남에서의 방출로 하향세를 그리던 이동국을 데려와 '10경기 동안 골을 못 넣어도 빼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K리그 최다골 공격수로 부활시킨 것이나, 올 시즌 은퇴를 고민하던 김남일의 마음을 붙잡으며 재기를 이끌어낸 일화는 유명하다. 올 시즌 전북의 우승도 이동국-김남일 등 노장들의 공헌도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현역 시절 은퇴를 앞둔 노장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던 최강희 감독의 배려와 믿음이 만들어낸 성과다.

또한 최 감독은 팬들에 대한 배려도 남다른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팬들과 온-오프라인을 통해 소통하는가 하면, 2011년 두 번째 우승 때는 자신의 별명을 빗대 밀짚모자와 장화를 신은 농촌 이장님 패션으로 우승 세리머니를 하며 팬들에게 웃음을 안기기도 했다.

최강희와 전북은 아직 배고프다

지도자로서 최강희 감독 축구인생의 최대 슬럼프는 아마도 국가대표팀 사령탑 외유 기간(2011.12~2013.6)이었을 것이다. K리그에서 승승장구하던 최 감독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당시 월드컵 예선 탈락의 위기에 몰렸던 한국 축구의 구원 투수로 등판해야했다. 김호 전 감독 이후 두 번째로 고졸 출신 국가대표 감독이라는 업적을 이룩했지만 정작 최 감독은 대표팀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8회 연속 본선 진출이라는 목표는 달성했지만 그 과정에서 성적 부진과 시행 착오로 많은 뭇매를 맞았다. 이란과의 최종전 주먹 감자 파문이나, 대표팀 사임 직후 벌어진 SNS 논란 등은 대표팀을 떠난 이후에도 최강희 감독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최강희 감독은 자신을 클럽에 더 잘 어울리는 지도자로 평한다. 최 감독은 선수들과의 꾸준한 소통과 훈련을 통하여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팀을 만들어가는 타입이다. 단기간에 최대한의 성과를 끌어내야 하는 대표팀은, 처음부터 최 감독이 원한 자리도 아니었고 자신만의 팀을 만들어나갈 시간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감독은 목표를 완수했고, 과정상의 모든 비난은 자신의 몫으로 묵묵히 감싸 안았다.

대신 최 감독은 그토록 원했고 사랑했던 봉동에 돌아오자마자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자신에게 어울리는 무대가 역시 전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최 감독의 공백기 동안 무너지고 있던 전북은 2013시즌 뒷심을 발휘하며 3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이듬해는 정상까지 탈환하는 기염을 토했다.

올 시즌 전북은 35경기에서 57골을 터뜨려 12개 구단 중 가장 많은 골을 기록했지만, 20실점으로 가장 적게 골을 내준 팀에도 이름을 올리며 완벽한 공수밸런스를 자랑했다. 특유의 '닥공'만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지키는 축구도 가능했고, 주전들의 줄부상에도 다양한 로테이션을 가동하며 전력 소모를 최소화한 것은, 최강희 축구가 전술적 유연성에서도 한 단계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최 감독이 돌아온 지 1년 반 만에 전북은 다시 K리그를 대표하는 명가로 귀환했다는 것만으로, 최 감독의 진가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늘날 현대 축구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던 알렉스 퍼거슨 전 감독의 커리어를 논할 때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올리지, 1986년 멕시코월드컵의 스코틀랜드 대표팀 시절을 떠올리는 이들은 거의 없다.

최강희 감독이 꿈꾸는 미래도 궁극적으로는 전북을 K리그의 맨유와 같은 명가로 키우는 것이다. 전북은 올해 K리그 정상을 3년 만에 탈환했지만 FA컵과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올 시즌 K리그의 투자 위축 분위기 속에서도 공격적인 선수 영입을 통해 절대 1강으로 불렸던 전북의 기대치에 비하면 살짝 아쉬운 부분이다. 그만큼 전북이 이제 매년 출전하는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노려야하는 팀으로 그 위상이 올라갔다는 것은 9년 전과 비교하여 가장 큰 변화다.

2005년부터 전북을 이끈 최 감독은 국가대표팀 외도 기간을 제외하고도 약 8년간 재임하며 김정남 전 울산 감독(2000~2008년)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한 팀에서 최장 기간 지휘봉을 잡은 감독이기도 하다. 이제는 전북이 곧 최강희이고, 최강희가 곧 전북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외부의 시선이나 고정관념에 연연하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최강희 감독의 시선은, 이제까지 이뤄온 것보다 앞으로 더 이룰 수 있는 더 큰 목표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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