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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뷰반 대학생 가이드 챙아 세르파(Chyanga sherpa)
▲ 가이드 트리뷰반 대학생 가이드 챙아 세르파(Chyanga sherpa)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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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이 끝난 후 한동안 '금단현상'이 있었습니다. 습관성 물질에 중독되었다가 깨어난 것처럼 허탈, 불면, 의욕상실 등의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직장에 복귀하였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인터넷으로 히말라야를 기웃거리며 실성한 사람처럼 실실 웃거나 다른 사람의 트레킹 기록을 읽으며 추억에 사로잡혔습니다. "정신 차려!"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보지만 현실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기우(杞憂)'에서 시작한 트레킹

국내선  항공기에서 볼 수 있는 설산 모습
▲ 설산 국내선 항공기에서 볼 수 있는 설산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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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능선 마을 모습
▲ 삶의 터전 산 능선 마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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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부 트레킹은 '기우(杞憂)'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기우'란 옛날 중국 기나라에 살던 사람들이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쓸데없는 걱정'을 의미합니다. 저의 소시민적 사고가, 발생하지도 않은 쓸데없는 걱정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며 트레킹은 시작됐습니다.

쿰부 트레킹을​ 함께할 두 명의 동료는 중국 남방항공을 이용하여 밤 11시에 카트만두에 도착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오늘 밤에 만나 내일 아침 네팔 국내선 루클라행 비행기를 타야합니다. 그렇지만 남방항공은 겨울 내내 결항과 연착의 반복이었기에 카트만두에서 기다리는 저는 조바심에 몸이 달았습니다.

루클라행 국내선도 걱정입니다. 루클라 공항은 해발 2850미터에 있으며 활주로 길이가 불과 450미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공항인 루클라는 바람이 불거나 옅은 안개가 껴도 항공기는 결항됩니다. 2008년, 2010년에도 루클라행 비행기가 결항되어 쿰부 트레킹을 포기하였기에 간절함이 더하였습니다.

​최근 히말라야에 기상이변으로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안나푸르나, 랑탕, 쿰부 등 네팔 3대 트레킹 코스가 통제되거나 폐쇄되어 트레킹을 포기하거나 중도에서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쿠클라에 도착하여도 기상이변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거나 포기할 수 있기에 좌불안석이었습니다.

위 상황에서 어느 한 경우만 어긋나도 트레킹을 포기해야합니다. 카트만두에서 일행을 기다리며 '혹시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걱정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불안한 마음이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기우(杞憂)였습니다. 1월 8일 밤 11시가 되자 ​반가운 목소리가 숙소 방문 앞에서 들려왔고 다음날 쿰부행 비행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시에 출발하여 40분 후, 루클라 공항에 내려 주었습니다. 날씨 또한 트레킹 기간 내내 화창하여 사람을 황홀하게 만들었습니다.​

젤린스키는 그의 책 <느리게 사는 즐거움>에서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지지 않는 것,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 22%는 사소한 고민, 8%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거나 ​우리가 바꿔놓을 수 있는 일" 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걱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이야기겠지요. 저의 소시민적 사고가 '과거의 경험'이나 '발생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On Time'과 'Delay'의 반복

카트만두 국내선 항공권 발권
▲ 네팔 국내선 공항 카트만두 국내선 항공권 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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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된 네팔 국내선 조종석
▲ 조종석 개방된 네팔 국내선 조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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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부 트레킹을 함께할 동료와 짐을 정리하였습니다. 겹치는 물품이나 트레킹에서 사용하지 않아도 될 물건은 카트만두에 남겨 놓기 위해서입니다. 루클라 국내선은 1인당 15kg까지만 화물이 허용되며 초과할 때는 오버차지가 부과됩니다. 세 사람의 짐을 더플백 두 개에 채우기는 일은 고역이었습니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정신없이 정리하였지만 짐은 좀처럼 줄지 않았습니다.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끝낼 수 있었습니다.​

루클라행은 첫 비행기는 6시 30분에 출발합니다. 네팔 국내선 항공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첫 비행기를 예약하였습니다. 항공기 결항으로 그간 두 번의 쿰부 트레킹이 무산되었고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에서 카트만두행 항공기가 연착되어 태국, 미얀마 국제선 항공권을 한 번에 휴지로 만든 경험도 있습니다. 올 초에는 포카라행 항공기 결항으로 8명의 동행과 함께 부랴부랴 미니버스를 수배하여 이동하였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어제 처음 인연을 맺은 가이드 챙아 세르파(Chyanga sherpa)가 숙소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23살로 쿰부 지역 설레리가 고향인 세르파족입니다. 안나푸르나에 구릉족이 랑탕에서는 따망족이 터줏대감인 것처럼 쿰부 지역은 티베트에서 히말라야를 넘어 정착한 세르파족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네팔 최고의 명문대학인 트리뷰반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을 하지 못하지만 영민한 인상을 보니 좋은 트레킹 파트너가 될 것 같습니다.​

시골 버스 정류장 같은 국내선 대합실은 무척 정겹습니다.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며 화물뿐만 아니라 승객도 저울에 올라 몸무게를 측정합니다. 어린 시절 명절을 맞아 고향 마을에서 두 사람의 장정이 저울을 어께에 메고 돼지 무게를 다는 것은 보았지만 항공기에 탑승하기 위해 제가 저울에 올라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국내선 대합실에는 승객들이 점점 밀려들고 전광판에는 우리가 탈 항공기에 대한 표시가 '온 타임(On Time)'과 '딜레이(Delay)'를 반복합니다. 이 표시가 '캔슬(Cancel)'로 바뀌면 숙소로 돌아가 하루를 기다려야합니다. 이번 트레킹은 예비일이 많지 않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다시 네팔 국내선에 대한 악몽이 되살아날 때쯤 탑승 방송이 나옵니다.

두 명의 파일럿과 한 명의 승무원이 근무하는 항공기는 조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30~40여 년은 되었을 프로펠러 항공기는 고철 수준입니다. 파일럿 앞에 있는 계기판에는 LED 기기 하나 없는 순수 아날로그 방식입니다. 더구나 이동식 내비게이션이 계기판 위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항공기에는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하여 15명 정도 탑승할 수 있으며 실내는 조종석이 개방되어 있습니다.

승무원이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승객에게 "나마스테"라고 인사합니다. 탑승을 완료하자 승무원은 솜과 사탕을 지급합니다. 솜은 소음에 대비한 귀마개용입니다. 열 명 남짓 승객을 태운 루클라행 항공기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날렵하게 이륙하여 루클라 공항을 향해 날고 있습니다. 작은 기류의 변화에도 동체가 심하게 떨립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지만 삼세판이라고 그간 두 번의 포기(?)가 있었기에 떨림조차 설레게 합니다.

드디어 '루클라'에 도착

루클라해 항공기
▲ 국내선 항공기 루클라해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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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클라 공항 활주로
▲ 공항 루클라 공항 활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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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으로 구름 위에 떠있는 설산이 파노라마로 다가옵니다. 구름 위에 떠있는 설산 모습은 제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높고 낮은 봉우리와 계곡에는 크고 작은 집과 밭이 보입니다. 인간의 삶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카트만두를 출발한지 40여 분만에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루클라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정식 명칭이 텐징-힐러리 공항(​Tenzing-Hillary Airport)인 루클라 공항은 히말라야 해발 2850미터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동시에 가장 위험한 공항입니다. 길이가 불과 450m에 지나지 않는 활주로는 산비탈을 깍아 만들었으며 15도쯤 기울어 있습니다. 이륙이나 착륙할 때 조그마한 실수도 큰 사고로 이어집니다. 거의 해마다 사고가 발생하고 있지만 쿰부 트레킹의 관문이기에 여전히 많은 트레커들이 찾습니다. 육로로 이곳까지 오기 위해서는 카트만두에서 지리나 설레리까지 버스나 짚차로 하루를 이동한 후에 닷새는 걸어야합니다.

효율성에 길들여진 저로서는 40분이면 올 수 있는 곳을 일주일에 걸쳐 온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경쟁과 비교 속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세상에서 휴식을 위해 히말라야를 찾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은 세상에 있습니다. 한 달 동안 한 곳이라도 더 보고, 한 나라라도 더 가고 싶은 가속이 여행지에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카트만두의 온화한 기후와는 달리 해발 2850미터 루클라의 아침 바람은 매섭기만 합니다. 누구에게는 너무나 쉽고 일상인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크고 어려운 일이겠지요. 쿰부에 오기 위해 5년간 세 번의 시도가 있었습니다. 오랜 바람 끝에 쿰부 트레킹의 출발지인 루클라에 도착하였기에 모든 것이 정감 있게 다가옵니다.

쿰부 트레킹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겠지요!

해발 2850미터 루클라 공항 정경
▲ 루쿨라 공항 해발 2850미터 루클라 공항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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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올해 1월은 네팔에 있었습니다. 여덟 번째 인연이었고 안나푸르나 푼힐과 쿰부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였습니다. 두 곳을 합쳐 20여 일을 걸었으니 오랜 시간을 히말라야에서 보냈습니다. 제 뇌리에서 히말라야의 추억이 사라지기 전, 지난 추억을 되새겨봅니다.



태그:#카트만두, #쿰부, #루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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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자발적 백수가 됨. 남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살기로 결심하였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 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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