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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36년간 일제가 조선인을 지배하기 위해 가장 큰 공을 들인 분야는 교육이었다. 그들은 우리 땅 곳곳에 보통학교(초등학교), 중학교를 세우면서 교육령에 "충량한 황국민을 양성한다"라는 교육 목표를 명기했다.

'충량한 황국민'은 '천황에게 충성스럽게 복종하는 국민'을 뜻했다. 일제가 1면 1소학교 정책을 펼친 것은 조선을 교육입국(敎育立國)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 아이들 전체를 '충량한 황국민'처럼 키워 부려 먹기 위해서였다.

일제 강점기 '충성 검증'으로 시작한 인성 평가

인성을 점수로 평가할 수 있을까?
 인성을 점수로 평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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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오늘날 교육대학 전신인 사범학교를 세워 교원들을 충원했다. 야심 있고 똑똑한 조선 청년들이 사범학교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높은 성적만으로는 부족했다. '검증된 인성'이 필요했다. 일왕을 위한 충성 서약과 이를 뒷받침하는 철저한 사상이 그것이었다.

일제는 예비 교원의 인성을 검증하기 위해 보통학교 교장의 비밀 추천서인 '내신(內申, secret letter)' 제도를 도입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내신'이란 말은 사실 "이 학생은 조선 독립 사상을 가르칠 염려가 없는, 천황 폐하에게 충성할 수 있는 학생임"을 밝혀주는 사상 검증서를 뜻하는 것이었다.

내신 제도 덕분에 일제는 일왕에 대한 충성심이 보증된 조선인을 받아들여 교사로 양성할 수 있었다. 식민지의 조선 학생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동족 출신 교사로부터 황국 신민화 교육을 받았다. 일제가 세운 사범학교 출신의,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 같은 조선인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일왕을 우러르고 일장기를 향해 부복하게 했다.

권력자를 향한 무조건적인 복종, 규율에 대한 순종이 학교 시스템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황국신민의 서사(誓詞)'와 같은 충성 서약문이 나와 조선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는 박정희 유신 독재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만들고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퍼뜨릴 수 있었던 배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교사들이 그랬으니 일제 시대 아이들이 '인성'이나 '사상'에 대해 평가를 받는 건 당연했다. 학생 인성을 주관적으로 평가해 입시에 반영한 제도는 1920년대부터 시작됐다. 이는 <경향신문> 5월 15일 자 기사 "인성평가 효시 생활기록부... 일제 때 '순응하는 조선인' 만들려 도입"에 따르면 중학교 입시 방식이 공개 선발에서 학교장 추첨제로 바뀌면서부터라고 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926년 6·10만세운동 이후 학생들의 동맹 휴업과 반일 시위가 빈발하자 일제는 '사상 단속' 지침을 내렸다.  그 뒤 조선총독부는 "학교 동맹 휴업은 불온한 생각을 갖고 있는 일부 학생들 때문인데, 입학 전형 과정에서 지원 학생들의 성행 등을 충분히 고려해 지조가 견실한 학생을 입학시켜야 한다"고 각급 중학교 교장들에게 하달했다. 1928년의 일이었다.

1938년이 되자 일제는 조선총독부령 개정과 함께 학적부에 '성행'(인성)과 '가정 환경'을 기록하도록 했다. 교사들은 학생 간 서열을 매겼다. 인성이 입시 반영 요소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교사가 학생의 인성을 평가해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는 관행이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인성 발달 사항 기록? 사교육 시장도 들썩

일제는 갔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는 명실상부한 새 시대를 살고 있을까. 일제 강점기 학생부는 순응하고 복종하는 조선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생활기록부'라는 이름으로 진화를 거듭하던 학생부는 학교 폭력 기재 문제로 '전과 기록부'가 되는가 싶더니 이제는 '인성 평가서'로 탈바꿈하려고 한다. 일제가 도입한 '조선인 순치화 프로그램'이 인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인성교육진흥법이 오는 7월 21일부터 시행된다고 한다. 2014년 12월 국회는 출석 의원 199명의 만장일치로 인성교육진흥법을 통과시켰다.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人性)을 갖춘 국민을 육성하여 국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이라고 한다. 이 법에 따라 국가, 지방자치단체, 각급 학교에서는 예산과 프로그램을 갖춰 인성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교사들은 학생부에 인성 발달 사항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짜 큰 문제는 대학이나 기업이 인성을 평가 요소로 활용하겠다고 '벼르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인성교육 강화 및 대입 반영 확대가 교육부의 2015년 주요 업무 과제 중 하나로 제시됐다고 한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2017학년도 입시에 보육·사범대학 중심으로 학교생활기록부상의 인성 발달 사항을 핵심적으로 반영하기로 했다. 2017학년도 전문대학 입시에서 인·적성을 평가하는 '비교과 전형'으로 선발하는 인원이 2016학년도 대비 196%가 늘어난다. 대입 수시모집에서 인성 면접을 신설하기로 한 대학도 등장했다고 한다.

사교육 시장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인성 평가와 관련된 교육부 인증을 받기 위해 '인성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인성교육 실천 인증 급수제'를 논의하는 민간 교육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5월 15일 자 <경향신문> 보도 "자격증·시험 213종에 사설 교육기관 급증… 상품이 되어버린 '인성교육'"에 따르면,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등록된 인성 관련 자격증 및 자격시험만 213종에 이른다고 한다. 인성 관련 자격증은 60여 종에 불과했던 지난해 4월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났다. 인성 교육이 돈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의아스럽다. 대체 학생들의 인성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기준을 만들어 평가한다고 학생이나 학부모가 결과를 순순히 인정할 수 있을까. 좀 더 본질적인 의문도 있다. 그렇게 '높은 점수'의 인성을 가진 아이들이 훌륭한 민주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아돌프 오토 아이히만(Adolf Otto Eichmann, 1906~1962)은 쇠락한 중산층 집안 출신으로, 허세와 출세욕이 강한 점만 제외하면 특별할 게 없던 평범한 독일 남자였다. 그런데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한 핵심 나치 요원 중 하나가 됐다.

전후 아르헨티나로 도주한 뒤 15년을 숨어 살던 그는 1960년 이스라엘 비밀 정보 기관 모사드(Mosad)에 체포돼 전범 재판을 받은 뒤 1962년에 교수형을 당했다. 그는 원래 구제받을 길 없는 '악마'이자 '괴물'이었을까.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를 '정상'으로 판정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적어도 그를 진찰한 후의 내 상태보다도 더 정상이다"라고 탄식했다고 전해지고, 또 다른 한 명은 그의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 자매,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그의 태도, 그의 모든 정신적 상태가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함'을 발견했다.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79쪽.

늘 선(善)한 인성은 존재하기 어렵다

'늘' 선한 인간을 강조하는 교육은 옳지 않다.
 '늘' 선한 인간을 강조하는 교육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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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은 평범한 일상인의 미덕이자 삶을 지탱하는 주춧돌이다. 바람직한 인성은 대다수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훌륭한 자질이다. 실적인 근거들도 있다.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의 사회심리학 교수인 로랑 베그(Laurent Begue)는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에서 성실한 인격이 학업 성적과 직업적 성공에서부터 직장 내 근무 태도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행동 지표들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좋은 태도가 늘 '선'하기만 할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베그는 성실한 인격의 소유자들이 부당한 명령을 내리는 권위에 잘 저항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격이 권위에 대한 복종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실험을 실시했다. 대인 관계에 유리한 긍정적인 경향들, 예컨대 양심 있고 상냥하며 호감을 주는 성격이나 태도들이 사회적 순응의 형태로 악행을 유도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에서였다.

실험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참가자가 양심적일수록 권위에 쉽게 복종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친절하고 순리대로 움직일 줄 아는 사람들, 사회에 나무랄 데 없이 편입돼 있는 사람일수록 권위에 대한 불복종을 꺼렸다는 것이다.

훌륭한 인성이나 품성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 자질을 가르치고 배우도록 하자는 데 반대할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교육을 하고 점수를 평가한다고 해서 진짜 인성이 길러질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

인성교육진흥법을 통과시킨 이 나라의 '도덕적인' 의원들에게 경고한다. '괴물'이 만들어지는 구조와 시스템을 손보지 않은 채 이뤄지는 인성 교육은 아이히만처럼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악을 행하고 권위에 순종하기만 하는 '착한 괴물'을 만들어낸다. 불의에 침묵하는 다수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그런 나라에 미래가 있겠는가.

○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태그:#인성교육진흥법, #내신 제도, #아이히만, #'착한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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