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골라에서 홀로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한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3일 대회 주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에서 앙골라 국기를 들고 입장하고 있다.

앙골라에서 홀로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한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3일 대회 주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에서 앙골라 국기를 들고 입장하고 있다. ⓒ 광주유니버시아드 조직위 제공


스위스월드컵이 열린 1954년, 첫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오른 한국 축구 대표팀은 도쿄(일본)-방콕(태국)-캘커타(인도)-로마(이탈리아)를 경유해 취리히(스위스)에 입성한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 대표팀이 스위스에 도착한 때는 6월 15일 오후 10시, 서울 출발 후 6일이 지났고, 비행기 안에서만 55시간을 보냈다. 본선 첫 경기는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 대표팀은 개막 2주 전 이미 스위스에 들어와 있던 헝가리 대표팀과의 첫 경기에서 9:0 완패를 당했다. 이는 '월드컵 최다 점수차' 기록으로 여지껏 안 깨지고 있다. 한국 대표팀은 2차전 터키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도 7:0으로 패하며 첫 월드컵 도전장을 외로이 접어야 했다.

2015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광주U대회)에도 외로운 싸움을 하는 이들이 많다. 조국의 깃발을 홀로 짊어진 채, 개막식 무대를 당당히 메운 '나홀로 선수단'이 그들이다. 스포츠 종목에 많은 지원을 할 수 없는 자국 사정에 따라, 이번에 홀로 광주를 찾은 선수들은 10여 명이 이른다. 대부분 국제 대회에 처음 출전한 선수들이다.

 앙골라에서 홀로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한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4일 남자 펜싱 사브르 예선을 치르고 있다.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4일 남자 펜싱 사브르 예선을 치르고 있다. ⓒ 선수 제공


수영 선수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몸(150cm, 50kg)의 종가(Jonga Pap D., 감비아)는 입국이 늦어 6, 7일 예정된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8일 출전한 남자 50m 평영 예선에선 1위와 8.99초 차이로 최하위에 이름을 올렸고, 9일 출전한 남자 50m 배영 예선에선 4명 중 3위에 그쳐 탈락했다. 미크로네시아 전국 학교 육상대회 1500m, 3km 종목에서 금메달을 단 세이야(Eda Seiya, 북마리아나 제도)도 광주U대회 육상 1500m 예선 무대에선 경기 중 넘어진 선수를 겨우 제치고 10위를 기록해 예선 탈락했다.

그나마 자국 사정으로 입국하지 못해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선수도 있었다. 8일 찾아간 주경기장 육상 트랙. 나미비아 선수단에 홀로 이름을 올린 마티즈(Maritz Johannes Gerhardus, 남자 육상)가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할 6번 레인에는 스타트블록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차드의 유일한 선수 레마지(Remadji Mbaiba Memory, 여자 육상)의 전광판 이름 옆엔 알파멧 약자 DNS(Did not start, 경기 불참)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예선 6전 전패... "홀로 국가 대표, 큰 자부심"

 앙골라에서 홀로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한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9일 오후 광주 서구 대회 선수촌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9일 인터뷰를 한 뒤 자신의 옷 뒤에 새겨진 앙골라 글씨를 가리키며 익살스런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소중한


 앙골라에서 홀로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한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9일 오후 광주 서구 대회 선수촌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9일 인터뷰 도중 자신이 광주까지 온 경로를 그리고 있다. ⓒ 소중한


남서부 아프리카의 앙골라에서 온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 사브르)도 국가를 대표해 홀로 광주를 찾은 선수다. 9일 마르코를 광주 서구 광주U대회 선수촌에서 만났다. "어떤 경로를 거쳐 한국에 오게 됐나"라고 묻자 그는 살짝 웃음기 띈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코는 앙골라에서 22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1일 광주에 도착했다. 리스본(포르투갈)-프랑크푸르트(독일)-인천-김포-광주를 거쳐 온 마르코는 직접 수첩에 지도를 그려 보이며 "(광주까지 오는 데) 아주 힘들었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1991년생인 마르코는 6년 전 펜싱을 시작했다가, 1년 전 그만뒀다. 포르투갈 공군사관학교(Academia da Forca Aerea Portuguesa)에 입학하는 등 계속 운동할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번 광주U대회 출전 기회를 얻게 돼 두 달 전 다시 검을 잡았다. 국제 대회 출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마르코는 이번 대회 펜싱 남자 사브르 종목에 출전한 60명의 선수 중 55위에 이름을 올렸다. 7명씩 한 조가 돼 치르는 예선에서 그는 6전 전패했다(마르코 경기기록). 다시 펜싱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뿐만 아니라, 22시간 비행 끝에 시합 사흘 전에 광주에 도착해 정상 컨디션으로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1980년 5월... 진지하게 설명 듣는 앙골라 선수 2015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한 선수단이 9일 오전 광주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찾았다. 루마니아, 체코, 앙골라, 포르투갈, 리투아니아, 오스트리아 등의 선수·코치·임원들은 이날 기록관을 찾아 5.18의 의미를 느끼고 돌아갔다. 5.18기록관을 찾은 앙골라 선수가 통역관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고 있다.

9일 5.18기록관을 찾은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통역관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고 있다. ⓒ 소중한


 앙골라에서 홀로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한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9일 오후 광주 서구 대회 선수촌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9일 인터뷰를 한 뒤 팔짱을 낀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소중한


하지만 마르코는 "국제 대회에 출전한 게 이번이 처음이니까 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보고, 그 선수들과 경쟁했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다른 나라 선수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조언을 얻을 수 있어 좋았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진 꿈을 이야기했다.

"국가를 대표해 홀로 출전했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내가) 앙골라에선 펜싱 선수로서 처음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참가한 거다. 내 꿈은 앙골라의 어린 선수들에게 이런 기회가 있다는 걸 알리는 것이다. 내가 첫 걸음을 뗀 것 아닌가. 물론 시합 나가서 메달을 따진 못했지만 어린 선수들에겐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이겨라, 이겨라'라고 하지만 내겐 승리보다 기회가 더 소중하다."

마르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올림픽 출전이 목표"라고 힘주어 말했다. "자국 여건이 좋지 못한 상황에서 올림픽 출전은 모든 앙골라 운동 선수들의 목표"라고 말한 그는 "당장 다음 올림픽(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은 어렵겠지만 꼭 목표를 이루고 싶다"고 강조했다.

 앙골라에서 홀로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한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3일 대회 주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 입장에 앞서 앙골라 팻말을 든 입장 도우미와 사진을 찍고 있다.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3일 대회 주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 입장에 앞서 앙골라 팻말을 든 입장 도우미와 사진을 찍고 있다. ⓒ 선수 제공


 앙골라에서 홀로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한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9일 오후 광주 서구 대회 선수촌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9일 인터뷰를 한 뒤 앙골라 국기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소중한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광주에서 힘 얻어"

사실 마르코를 처음 만난 곳은 광주 동구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이었다. 인터뷰를 하기 약 5시간 전인 9일 오전, 마르코는 광주광역시에서 마련한 팸투어(Familiarization Tour) 일정으로 기록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날 오후 선수촌에서 인터뷰를 하며 "우리가 처음 만났던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을 기억하나"라고 묻자 그는 "당연하다"라고 답했다.

"민주화를 위해, 또 다른 기회를 얻기 위해 싸운 광주 시민들을 보며 힘을 얻었다. 앙골라에서 펜싱 선수로 살면서 뛰어 넘어야 할 벽이 많다. 그 벽을 넘기가 어렵다. 광주 시민들이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모습에서 큰 벽을 극복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마르코는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외에도 소쇄원, 환벽당에 갔던 것을 떠올리며 "한국의 정원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는 "한국의 활기차고 가족 같은 분위기는 앙골라와 비슷한 것 같다"며 "정원 여러 군데를 다녀봤는데 자연과 소통하려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마르코는 "환벽당에서 배웠다"면서 어색한 발음이지만 활기찬 목소리로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을 외치기도 했다.

마르코는 경기를 치른 다음 날인 5일 광주에서 생일을 맞았다. "생일인데 혼자 다른 나라에 와 외롭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코치와 다른 나라 선수들이 내 생일을 축하해줘 괜찮았다"고 웃었다. 기자가 미리 준비해 간 작은 선물을 생일 선물이라고 하며 마르코에게 건넸다.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를 연신 내뱉었다.

마르코는 인터뷰 다음 날인 10일 한국을 떠났다. 그는 광주에서 찍은 사진 위에 한글로 "펜싱 재미,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적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리고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로 "끝났다. 그리고 잘했다(Está feito. E bem feito)"라고 썼다.

인터뷰를 끝내놓고 돌아오는 길, 마르코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가 떠올랐다. "자신의 도전이 어린 선수들의 발판이 되는 게 꿈"이라며 한 "내겐 승리보다 기회가 더 소중하다"라는 말. 1954년 한국 축구 대표팀의 외로웠던 첫 걸음이 월드컵 8회 연속 진출(1986~2014년)과 4강 진출(2002년)의 밑거름이 됐듯, 마르코의 첫 도전이 그의 꿈처럼 어린 선수들의 발판이 되길 기대한다.

 앙골라에서 홀로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한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9일 오후 광주 서구 대회 선수촌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마르코 호메로(Marco Romero, 남자 펜싱)가 9일 인터뷰를 한 뒤 펜싱 자세를 취하고 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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