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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7월 11일, 부모님이 평생을 살아오신 고향집 마루에 나란히 앉혔습니다. 아버지가 무릎을 굽히기 어렵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치매로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집에서만은 가장 양호한 기억을 유지합니다.
 7월 11일, 부모님이 평생을 살아오신 고향집 마루에 나란히 앉혔습니다. 아버지가 무릎을 굽히기 어렵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치매로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집에서만은 가장 양호한 기억을 유지합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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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가겠다는 고집, 꺾을 수 없었다

지난주에 부모님과 함께하기 위해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아내는 주말 이틀에 하루 연차를 보태 3일간의 짬을 만들었습니다.

90년을 넘게 살아오신 부모님은 지금 당신의 기억을 하나 하나를 지워가는 시간을 살고 계십니다. 어머님은 일년 만에 귀국한 손자와 손녀의 인사를 받고 면전에서는 얼버무렸던 궁금증을 나중에 동네 사람에게 물으셨다는 전언입니다.  

"야들이 누구고?" 

지난 겨울 서울에서 함께 지내시던 부모님이 삼도봉 아래의 경상도 산골 고향으로 내려가신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급격히 기력이 떨어지셔서 계단 하나를 오르기도 어려워하셨지만, 봄이 오기도 전에 고향으로 가시겠다는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낮은 계단 하나도 오르기가 힘든 분이 고향집의 높은 뜨락을 오르내리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보였습니다. "한 번이라도 넘어지면..." 상상도 하기 싫은 현실적인 문제를 무릅쓰고 부모님이 서울을 떠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겨울을 핑계 삼았지만 부모님은 역정만 높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출퇴근하면서 부모님을 돌볼 분을 물색하고 시골로 모셨습니다. 고향의 친척 분들도 부모님의 안부를 살펴주실 것이니 적이 안심이기도했습니다. 우리 부부의 근심은 기우에 불과했음을 아주머니로부터 들었습니다. 어머님은 수시로 동네 마실을 나가시고 아버지도 손을 짚고 뜨락을 오르내리시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병명도 없이 까닭 없이 아플 땐 고향 땅 흙을 밟는 게 특효'라는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7년 전 자식 가까이로 모시고 싶어 마당 넓은 집을 빌려 부모님을 파주로 모셔왔지만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부모님을 모신다는 자식의 조치가 사실은 부모가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임을 이번 고향 방문에서도 확연히 느꼈습니다. 

서울에서 길을 잃을까, 차에 스칠까 집밖조차 못 나가는 감옥 생활. 고향에서는 길을 잃을 걱정도, 차에 치일 걱정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마주한 한가한 오후, 아버지가 추녀 끝 하늘에 시선을 두고 짧은 한숨 끝에 혼잣말을 뱉었습니다.

"한평생이 잠깐이구나."  

망백(望百)의 연세에 '잠깐'이라는 말씀이 제 뇌리에 꽂혔습니다. 가난과 투쟁하고, 인민군에서 탈출하고, 상심하고, 땀을 믿고, 희생하고, 사랑하고 이별한 모든 기억이 응축된 '잠깐'일 것입니다. 

고향에 부항댐의 건설로 새롭게 도로가 나는 바람에 동네의 진입로는 입구도 바뀌고 포장까지 된 신작로가 되었습니다.
 고향에 부항댐의 건설로 새롭게 도로가 나는 바람에 동네의 진입로는 입구도 바뀌고 포장까지 된 신작로가 되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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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이후를 걱정하시는 부모님

아버지가 최근 관심을 집중하고 계신 일은 유택(幽宅)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이후 아들의 몫까지 아버지가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지만 결코 그 걱정을 그만두실 것 같지 않습니다. 이번 방문에서 그 일에 대해 아버지의 모든 근심을 끝내시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묫자리는 선산의 당신 부모 옆자리로 기왕 정했고 부부가 합장하는 것은 이미 상의된 내용입니다. 가묘를 꾸미는 것이 봉문만 만드는 것이 아니므로 부모님을 모시고 우리 집안 선산 일을 도맡았던 거창의 석재상을 찾아갔습니다.

기억이 희미한 어머님도 선산의 시부모님 산소 앞에서 간절하고 극진하게 큰절을 올리는 모습은 변함이 없습니다.
 기억이 희미한 어머님도 선산의 시부모님 산소 앞에서 간절하고 극진하게 큰절을 올리는 모습은 변함이 없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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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도 당신의 부모님 곁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부모님도 당신의 부모님 곁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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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근심이었던 가묘를 만드는 것을 상의하기위해 거창의 석재상을 방문했습니다.
 아버지의 근심이었던 가묘를 만드는 것을 상의하기위해 거창의 석재상을 방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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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모르는, 아버지가 궁금한 모든 내용을 직접 여쭈어 바로 의문을 풀었습니다. 두 분의 광중(壙中)을 어떻게 배치하고 가묘의 안과 밖을 구성하는 석물들을 어떻게 구성할지를 모두 정하고 작업까지 의뢰했습니다. 50년간 석재상을 하셨다는 부부에게 가실 자리를 준비하셨는지 물었습니다.

80kg의 쌀자루를 번쩍 들어 올리시던 농사꾼 아버지의 건강한 모습으로 제 기억속에 박제된 아버지. 거동조차 어려운 지금의 아버지가 제게는 타인처럼 낯선 모습입니다. 정정하던 아버지가 홀로 쇠잔해지는 긴 노화의 시간동안 저는 없었습니다. 기력과 기억이 서서히 증발되는 그 시간동안 홀로 얼마나 외로워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80kg의 쌀자루를 번쩍 들어 올리시던 농사꾼 아버지의 건강한 모습으로 제 기억속에 박제된 아버지. 거동조차 어려운 지금의 아버지가 제게는 타인처럼 낯선 모습입니다. 정정하던 아버지가 홀로 쇠잔해지는 긴 노화의 시간동안 저는 없었습니다. 기력과 기억이 서서히 증발되는 그 시간동안 홀로 얼마나 외로워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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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아버지와 어머님의 가장 오래된 사진. 사진속의 아들은 저와 10년 터울의 형님입니다.
 현존하는 아버지와 어머님의 가장 오래된 사진. 사진속의 아들은 저와 10년 터울의 형님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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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희도 어르신 부부께서 주문하신 형태로 준비해두었습니다. 이승에 한평생 살고 가면서 이 집하나 가지고 가는 걸요." 

부모님의 묘를 짓는 일을 의뢰하고 돌아서면서도 위안이 되는 것은 석재상 사무실 겸 이웃 휴식터인 감나무 아래 평상에 함께한 분의 마지막 인사말이었습니다. 

"가묘(假墓)를 쓰거나 수의(壽衣)를 마련해 두면 장수를 한다지 않습니까. 이것도 큰 효도입니다."

다시 우리 부부가 고향을 떠나야 할 날 아침, 어머님이 며느리를 불러 앉혔습니다.

평소 궁금해 하던 내용들을 여쭈어서 아내가 귀가 어두워진 아버지께 소상히 전했습니다. 유택을 짓는 일을 의뢰한 후 부모님은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진 모습이었습니다.
 평소 궁금해 하던 내용들을 여쭈어서 아내가 귀가 어두워진 아버지께 소상히 전했습니다. 유택을 짓는 일을 의뢰한 후 부모님은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진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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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의 수순을 밟고 있는 석재상 부부는 50년간이나 부부가 함께 이웃들의 산소를 꾸미는 일을 해오셨답니다. 이미 두 분의 유택도 만들어 두셨고 이제 기 들어와 있는 석재만을 소진하면 이 일을 마칠 예정입니다.
 은퇴의 수순을 밟고 있는 석재상 부부는 50년간이나 부부가 함께 이웃들의 산소를 꾸미는 일을 해오셨답니다. 이미 두 분의 유택도 만들어 두셨고 이제 기 들어와 있는 석재만을 소진하면 이 일을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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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상의 야외사무실을 겸하고 있는 감나무 아래 평상은 동네 사람들의 쉼터이기도합니다. 은퇴를 앞둔 석재상 주인 부부는 점점 작업장을 줄이면서 그곳을 텃밭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 감나무 발치의 밭은 열가구가 넘는 친구와 이웃들이 나누어 각자 몫의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석재상 부부의 넉넉한 마음이 각자 주인이 다른 텃밭 개수로 드러납니다.
 석재상의 야외사무실을 겸하고 있는 감나무 아래 평상은 동네 사람들의 쉼터이기도합니다. 은퇴를 앞둔 석재상 주인 부부는 점점 작업장을 줄이면서 그곳을 텃밭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 감나무 발치의 밭은 열가구가 넘는 친구와 이웃들이 나누어 각자 몫의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석재상 부부의 넉넉한 마음이 각자 주인이 다른 텃밭 개수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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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너희 시아버지가 17살에 시할아버와 함께 지은 집이다. 아는 분이 그러시더라. 뒤로 산을 등지고 좌우로 뻗은 산이 모두 이 집을 감싸고 있으니 집터로서는 제일이라고. 멀리 앞산의 시아버지 산소가 보여서 나는 무엇보다도 좋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집은 너희들이 지녀라."

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에 덧붙였습니다.

"명숙(여동생)이도 고향으로 들어오고 싶다고 하니 집 앞의 저 빈터는 출가외인이라고는 하지만 딸에게 줄란다. 이 감나무는 네가 갖고 저 아래 호두 나무는 명숙이 것으로 해라." 

일주일 전에는 손자, 손녀도 못 알아보셨던 어머님도, 어제 나누었던 대화도 태반 기억하지 못하시는 아버님도 저의 부부와 헤어짐을 앞둔 시간, 또렷한 정신으로 당부했습니다. 그것은 당부가 아니라 유언이었습니다.

당부가 아닌 유언, 또렷한 그 한 마디

아내는 어머님의 치매약을 총 점검했습니다. 다시 약을 보내야 할 때임에도 약이 많이 남아있다며 날짜를 세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오시는 날만 챙겨드리니 오시지 않는 주말에는 안 드셨네요. 예전에는 아버님이 챙겨드려서 드셨는데 아버님도 이제 어머님 약 드리는 것을 기억할 수 없는 정도가 되셨어요. 아버님도 처방을 받아 드려야겠습니다."

다시 고향을 떠나갈 아들부부에게 이런저런 당부를 했습니다. 가슴이 아렸습니다. 그것은 당부가 아니라 유언이었습니다.
 다시 고향을 떠나갈 아들부부에게 이런저런 당부를 했습니다. 가슴이 아렸습니다. 그것은 당부가 아니라 유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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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화도 기억하기 어려운 아버지도 어머니와 같은 처방을 받아야겠다, 고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내가 아버지에게도 약을 먹이고 패취를 붙여드렸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며느리 때문에 내가 더 오래 살겠다. 약을 이렇게 챙겨주니..."
 어제 대화도 기억하기 어려운 아버지도 어머니와 같은 처방을 받아야겠다, 고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내가 아버지에게도 약을 먹이고 패취를 붙여드렸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며느리 때문에 내가 더 오래 살겠다. 약을 이렇게 챙겨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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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과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두 분 모두 비슷한 정도로 기억력이 상실되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아버지에게도 몇 가지 약을 드시게 했습니다.

"며느리 때문에 내가 더 오래 살겠다. 약을 이렇게 챙겨주니…." 

아버지가 겸연쩍게 며느리를 보면서 엷게 웃었습니다. 아내는 내일 오실 아주머니께 여러 가지 주문을 써서 벽에 붙였습니다.

아버지 회갑 때의 가족과 일가들. 왼쪽 끝의 아내는 첫째딸인 한 살 난 나리를 업고 있습니다.
 아버지 회갑 때의 가족과 일가들. 왼쪽 끝의 아내는 첫째딸인 한 살 난 나리를 업고 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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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가 많습니다. 

1. 먹는 약, 붙이는 약을 매일 신경 써 주세요.
2. 어머님 팬티 매일 갈아 입혀주세요.
3. 어머님 머리 한 달 한 번 커트해주세요.
4. 아버님 방 매트 위의 깔판 보라색 패드로 대치하시고 세탁기에 빨아주세요.
5. 아버님 입 닦을 손수건 7장 보낼게요. 매일 갈아서 새 것으로 드리세요.

다음날 오실 아주머님께 남기는 아내의 당부
 다음날 오실 아주머님께 남기는 아내의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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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차에 오르자 태풍 찬홈이 다시 비를 뿌리기시작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는 마루에서 떠나는 아들 부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어머님은 대문 밖으로 따라 나와 차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흔드는 손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태풍 찬홈이 서울까지 따라왔습니다.
 태풍 찬홈이 서울까지 따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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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고향, #부모, #치매, #부항, #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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