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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우리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어렵고 긴 터널을 지나 겨우 얻은 직장으로 향하는 길인데도 말입니다. 이대로 다닐 수도, 사표를 낼 수도 없는 진공 상태 속에서 오늘도 억지로 출근 버스에 올랐습니다.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요? 직장인의 삶을 진단해봅니다. [편집자말]
"왜 우리는 행복을 일에서 찾고, 일을 하며 병들어갈까."

올해 꽤 많은 독자가 읽었던 책 제목처럼, 그 언젠가 행복하고 싶어 택한 노동에서 사람들은 행복보다는 불행을, 건강보단 병을 찾는 것에 더 익숙해져 버렸다.

얼마 전 내가 출간한 <사표의 이유>를 함께 읽는 모임에서였다. 처음과 끝에 모두 등장했던 이야기는 개개인의 심리와 관련된 언급이었다. 자기 분열과 우울증, 무기력 그리고 '자살' 말이다.

우리들의 심리적 긴장은 곳곳으로부터 기인한다. 내가 생각하는 합리성과 회사가 말하는 합리성 사이의 괴리, 이 미칠 것만 같은 곳에서 눈감고 적응하느냐 아니면 뛰쳐나오느냐의 갈림길, 이렇게 하루하루 '버틸 뿐'이라는 열패감,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 내가 없어도 누군가 이 자리를 빈틈없이 채울 것이란 무기력함...

내 주변에 '행복한 직장인'이 없는 이유

왜 우리 주변에는 '행복한 직장인'이 없을까.
 왜 우리 주변에는 '행복한 직장인'이 없을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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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나와 동료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 필연적으로 개인의 건강, 특히 심리와 마음의 문제로 대화의 주제가 수렴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지금의 노동환경에서 건강하고 온전하게 자아를 보존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버거운 과제가 된 듯하다.

이제 '행복하게 일 하는 사람'은 나와 내 주변에선 보기 드물다. 언론에 등장하는 대안적인 삶을 찾은 사람들의 밝고 희귀한 얼굴에서, 아니면 웹툰이나 영화 같은 허구적 창작물 속에서 간혹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사람들의 고민은 사표를 쓰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이미 마음속으로 수백 번 쓴 이 사표를 정말로 내던질 것인지, 도로 집어넣을 것인지의 문제다.

신입사원에서부터 입사 몇십 년 차 부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일터에는 '불안'이라는 공기가 늘 음습하게 떠돈다. 물론 그들이 일터에서 겪는 곤란은 조금씩 다른 심리적 구조를 저변에 깔고 있겠지만, 그래도 하나의 키워드를 꼽자면 바로 불안일 것이다.

지금 일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자. 노동구조와 기업구조, 그리고 이를 떠받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국내외 정치·경제·문화적 체제는 노동자 개개인의 안정감과 행복, 존중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우울감과 심신의 고통은 신경 쓸 일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불안감은 직장에서 내 자리를 지킬 수 없을지 모른다는 데서부터 시작되어 개개인의 삶 전반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 이런 생각은 현재 너무도 '안정적'이고도 '정상적으로'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난 2013년, 내가 책 <사표의 이유>를 집필하며 인터뷰했던 이들은 일터에 팽배한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혁, 즉 노동자를 줄임으로써 회사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비열한 운영 방식을 증언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그 사이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2015년 9월, 노사정위원회가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을 발표했다. 합의문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계약 기간을 늘리고(정규직화 하는 것이 아닌), 노동자 파견 허용 범위를 넓히며, 더 쉬운 해고를 '합법화' 하는 등 고용과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책무를 가볍게 하거나 면책하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노동자에겐 더 암울한 미래를 안겨줄 가능성이 큰 내용이 대거 포함됐다. 현재는 이 합의문을 법제화하는 과정에서 여야가 대립 중이며, 여당과 정부의 추진 의지는 강력하다.

위의 합의문에서 나는 '일반해고'에 대한 내용에 특히 눈이 갔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타당한 징계 사유가 있는 징계해고와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로 하는 정리해고만 인정한다. 그리고 그마저도 부당 해고로 자주 악용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제는 '근무 성과가 저조하다'라는 이유로도 해고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회사가 말하는 '능력'과 '성과'란 극히 자의적이다. 기본적으로 '피고용인' 위치인 노동자들이 그 앞에서 겪을 압박과 무력감은 가히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부당전보' 등으로 현재까지 투쟁이 진행 중인 출판사 '자음과 모음'에서는 '편집자'에게 1인당 월 4500만 원의 '매출'을 강요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그 출판사가 출판편집자에게 요구하는 능력이요, 성과였다.

우리는 이럴 때, 그러한 '능력'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심지어 이렇게 직접적으로 회사의 이윤에 직결되는 업무도 아닌, '적당한 보신주의'와 '상사 비위 맞추기', '유효한 연줄 고르기' 등이 사실상 일터에서 더욱 중요한 생존 요건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생각하는 능력,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닌 함께 대화할 수 있는 능력, 내 아이디어와 특색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는 능력, 회사 분위기를 평등하게 바꿔가는 능력, 다양한 협력의 노동문화를 만들어가는 능력, 회사의 발전을 위해 진정 고민할 수 있는 능력 등 노동 현장에서 발휘될 수 있는 사람의 무수한 잠재 능력을 대다수의 일터는, 결코 장려하지 않는다.

그 대신 법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어떤 방법으로라도 돈을 물어 오는 능력 혹은 상사 비위를 맞추며 '적당히' 묻어가는 소극성 등으로 노동자들이 익혀야할 '능력'은 축소되고 있다. 이러한 일터에서, 과연 어떤 노동자가 회사에 충성심과 애정을 쏟을 수 있을까?

직장인은 묻는다,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직장인은 묻는다,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직장인은 묻는다,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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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의 관계가 일방적으로는 결코 건강하게 지속될 수 없듯이, 회사와 노동자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많은 노동자들은 회사를 향한 짝사랑을 그만 두기로 한 것 같다. 나 혼자만 바라보는, 그런 하염없고도 공허한 열정을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결정을 '그저 버티자'는 심정으로 회사를 다니거나, 혹은 사표를 제출하는 적극적 선택으로 실천하고 있다. 진심을 결코 주고받지 않고 피상적이며 일시적 필요만을 충족하고 떠나는 인스턴트식 관계가 노동관계에서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음 달을, 내년을, 미래를, '오로지 내가' 책임지고 준비하는 삶 속에서 사람들은 회사와 공동체의 충실한 구성원이 되길 거부한다. 대신 자기 자신의 삶이라는 '주식회사', 아니 그 전장(戰場)을 운영하는 한 경영자로서의 삶에 충실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노동자들이 현실을 인식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내가 잘 해봐야 언젠가 교체되고 마는 회사의 '고급 나사'에 불과할 뿐이라는. 아무리 열심히 일 해도 내 자신의 행복과 미래가 아닌 일시적 정거장에 불과한 이 회사의 이윤과 행복, 미래를 위해 착취될 뿐이라는 걸. 결코 이 회사는 나와 내 가족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거라는 현실인식, 그것이 회사를 대하는 노동자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다.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계약직으로 일 하는 노동자가 더 많은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 많은 노동자들이 불안 속에 살아간다. '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일 하는 노동자 역시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남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일터에서 누군가가 계속 사라지기 때문에 그렇다.

나 혹은 내 옆자리 동료가 떨어져나갈 거라는 예감은 지금 우리의 일터를 지배하는 정서다. 노동하지 못하면 생활할 수 없는 이들에게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삶. 일주일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 나를 신뢰하고 나의 능력과 특기를 열성적이고 지속적으로 증언해 줄 동료가 없는 외로운 삶. 실존이 아닌 '생존(survival)'만이 선행하는 삶. 우리는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가까스로 인생을 지탱하지만, 이 체제는 일말의 책임도, 관심도 없다.

이렇게 노동자들은 매일 불안 속으로 떠밀린다. 성과주의의 촉진으로 불안하게 유지되는 일터는 생존을 위한 경쟁으로 비인간적 공간이 됐다. 사람들은 묻는다. 이렇게 계속해도 될 것인가.

정규직, 비정규직, 계약직 등 '계급 구분'을 통해 노동자들이 서로의 의자 빼앗기 다툼을 하게 하고, 동료는 내가 올라서야 할 경쟁상대로 여기도록 하는 이 악몽을 계속 꾸어야 하느냐고, 그렇게 묻고 있다.

파울 파르하에허는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탄생>(반비, 2015)에서, "싸이코패스"라 불리는 인간 유형이 늘어나는 배경에는 물질적 가치의 우위와 경쟁, 성과주의를 부추기며 인간의 '나쁜 측면'을 강력히 지지하는 신자유주의적 문화가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점점 이 사회는 타인에게 감정이입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인간성을 주조해내고 있다고 말이다.

지금의 사회가 '효율성'과 '합리성'이라 부르고 있는 법칙은 타인의 존재와 감정을 신경 쓰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인간 군상을 만들고 있다. 그 한 가운데에서 사람들은 행복 하고 싶어 노동을 택한 노동자가 아닌 '괴물'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사표의 이유: '나'는 없고 노동만 있던 나날, 나는 회사를 떠났다>의 저자입니다.



태그:#신자유주의노동, #노동문화, #노동개악, #사표, #성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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