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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를 덮은 하얀 눈은 처음 보는 풍경이어서 이국적이며 바다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매우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 흰 눈이 덮인 정동진 모래사장 모래를 덮은 하얀 눈은 처음 보는 풍경이어서 이국적이며 바다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매우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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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20년 전,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던 부분이 있었다. 인적 없는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작은 기차역에서 붙잡혀 가는 고현정을 보며, 은폐와 엄폐의 기본을 조금만 알았더라면, 아니 변장술의 기초만 익혔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가슴을 쳤다. 그런 시골 마을에, 사방이 드러난 곳에 우두커니 앉아있다는 것은 '날 잡아가슈'라는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역 주변에 눈에 띄지 않게 숨을 곳이 있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20년이 흘렀다. 드라마에 열광하던 사람들과 여행 좀 한다는 사람들은 <모래시계>가 끝나자마자 정동진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여행에 별 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친지, 친구 혹은 산악회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한번쯤은 다녀갔다. 그리고 정동진과 <모래시계>의 채무관계가 대부분 정리돼 갈 즈음, 나는 정동진으로 향했다. 드라마 속 '혜린'의 흔적이나마 찾아볼 요량으로.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정동진에 도착하니 눈발이 심상치 않았다. 숙소에 짐을 풀자 눈이 거의 수평으로 날리며 시야를 가렸다. 소문으로만 듣던 '대설특보가 발효된 강원도'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립을 의미했다. 저 아래 정동진역을 발 앞에 두고도 꼼짝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20년 기다림을 몰라주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그날 밤, 다행히 눈은 그쳤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경이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설경 속 일출이었다. 그간 숱한 일출을 봤으나 눈 쌓인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일출은 경험해 보지 못했다. 거기에 정동진 하면 <모래시계>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바로 일출 아니었던가?

대뇌는 '일출'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축복의 손이라 불리는 조각상 위로 아직 숨지 못한 달이 보인다
▲ 동트기 전 정동진 해돋이 공원 축복의 손이라 불리는 조각상 위로 아직 숨지 못한 달이 보인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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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시작됐다. 사실 강력한 용기가 필요했다. 아니, 조금 더 진실을 말한다면 당위성이라고 표현해야겠다. 저 추위와 강풍을 뚫고 나가 언 손을 녹여가며 일출을 찍어야 하는 정당성이 없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어느 광고 문구가 떠오르며, 합리적 판단을 중요시하는 나의 대뇌는 자꾸만 일출을 생각에서 지우려 했다.

일출 장면을 보기 위해 겨울바다에 서 봤던 이들은 깨닫는다. 눈뜨고 코 베어 갈 칼바람을 맞다 보면 지구의 자전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도 느리다는 것을. 그리고 깨우친다. 볼때기가 떨어져 나갈 정도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나는 누구고 왜 여기 있는가? 뜨는 해에게 빌었던 소망이 매번 이뤄졌다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을 필요도 없었다는 사실을. 일출의 기운은 전 세계 인구들이 나눠 갖고 결국 내게 돌아오는 건 채 한줌도 안 된다는 팩트를.

새해 첫 날, 일출을 보기 위해 해돋이 명소로 밀려드는 관광객들을 보면 사실 요즘도 잘 이해가 안 가긴 한다. 저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해달라고, 행복하게 해달라고,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매년마다 빌어대는데, 대한민국은 왜 헬조선으로 흘러가는가? 넘치는 해의 기운을 가슴에 품고 돌아가는데, 왜 자살률은 세계 1위고, 행복지수는 바닥을 기는가? 여기서 조금 더 나갔다가는 '테러'로 오인 받을 수 있으니 그만두자.

동트기 전부터 설치다

이런 저런 잡념 끝에 잠이 들었다가 결국 새벽에 깨고 말았다. 5시간을 운전해서 왔는데 본전은 뽑아야겠다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2월 29일 강원도 주문진의 예상 일출 시간은 6시 57분이었다. 삼심 여분을 앞두고 밖으로 나왔다. 동해의 바닷바람은 사람마저 황태와 과메기로 만들 기세였다.

일출 장면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해돋이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포항 호미곶의 '상생의 손'에 흰색 면장갑을 씌워놓은 듯한 '축복의 손'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약간 모조품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손 사이로 떠오른다는 해를 찍기 위해 미리 여러 각도에서 사진 찍을 위치를 잡아보며 사진작가 시늉을 내본다.

삼각대도 망원렌즈도 없이, 한손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카메라 하나 들고 동트기 전부터 설쳐대는 나를 누군가 봤다면 한심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40년째 듣고 있지만 여전히 그 의미는 알 수 없는)으로 강풍이 동반된 영하 10도의 날씨라는 일기예보 탓에 주변에는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예정된 일출 시간이 다가오자 몇몇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4년에 한 번 돌아온다는 윤일(윤년의 2월 29일)의 일출은 또 다른 효험이 있는 것일까? 이 추위를 뚫고 일출을 보기 위해 나온 사람들은 나처럼 본전 생각이 나서였을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로 추위를 잠시 잊고자 하던 그 순간, 수평선 위로 깔린 구름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영하 10도의 날씨에도 정동진 일출을 보기 위해 해돋이 공원에 나온 사람들
▲ 정동진 일출 영하 10도의 날씨에도 정동진 일출을 보기 위해 해돋이 공원에 나온 사람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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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정동진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신비로움 그 자체다.
▲ 설경 속에 떠오르는 해 눈 덮인 정동진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신비로움 그 자체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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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사이로 보이는 반지 모양의 원형 안으로 해가 들어오도록 일출장면을 찍어야 한다는 가이드 라인이 있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 정동진 일출과 축복의 손 손 사이로 보이는 반지 모양의 원형 안으로 해가 들어오도록 일출장면을 찍어야 한다는 가이드 라인이 있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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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롭고 신성했다, 정동진의 일출

아폴론의 황금 마차를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더디게 흘러갔다. 하지만 바다가 뱉어내는 황금알의 일부가 자태를 드러내자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넋 놓고 바라보기에는 설경 속에 떠오르는 태양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부지런히 사진에 담고 마음에 담았다. 눈꽃과 바다와 태양과 하늘이 누구 하나 양보 없이 주인공이 되면서도 조화를 이뤄내는 곳, 여기가 바로 정동진이었다.

추위도 잊은 채 태양의 궤적을 눈으로 쫓았다. 이카로스의 날개가 허락된다 해도 감히 태양을 향해 뛰어드는 불경한 일은 생각도 못할 만큼 경이롭고 신성했다. 해의 기운 따위 믿지 않았던 내 앞에 보란 듯 떠오르는 절대적 존재는 절로 숙연하게 만들었다. 영하의 날씨가 아니었다면 배경의 일부로 남아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서 있었겠지만, 처자식에게 동사의 비보를 전하고 싶지 않았기에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아내에게 추위와 씨름하며 찍어 온 사진을 들이밀자 단번에 한마디한다. "여기서 해 뜨는 거 다 보여." 그 현명하고 이성적이며 칼로 무를 베는 듯 단호한 말을 듣자 피로감이 확 밀려왔다. 결국 오전에 한숨 자고 아이들과 정동진 바닷가에 잠시 들러 눈 내린 백사장만 구경하고 정동진을 떠났다.

'고현정 소나무'도 정동진역도 결국 구경하지 못한 채, 혜린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안고 떠난 정동진 여행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눈과 바다와 일출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정동진은 훌륭한 관광지인 것이 분명하다. 정동진 여행을 계획하는 분이 있다면, 눈 내리는 날의 정동진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다.

밤 늦게까지 내린 눈위로 누군가 하트 발자국을 남겼다.
▲ 숙소에서 바라본 일출 밤 늦게까지 내린 눈위로 누군가 하트 발자국을 남겼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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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동진 일출, #정동진 해돋이 공원, #축복의 손, #모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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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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