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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탄광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4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을 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 - 기자말

"으아... 어떻게 300번을 써!"
"손 부서지겠다!"

그림책 <지각대장 존> 7페이지를 읽어줄 때였다. 비명에 가까운 아우성이 터졌다. 이야기의 주인공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하수구의 악어와 실랑이를 벌이다 장갑을 잃어고 지각한다. 이어 선생님이 호통치는 장면이었다.

"이 동네 하수구엔 악어 따위는 살지 않아! 넌 나중에 학교에 남아서 '악어가 나온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또, 다시는 장갑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를 300번 써야 한다. 알겠지?"

악어 때문에 학교에 늦은 것도 억울한데 선생님은 위로는커녕 벌을 내린다. 존은 말대꾸하지 않는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같은 문장을 300번 쓴다. 발바닥이 닿지 않는 높은 의자에 앉아 글씨를 써 내려가는 남자아이는 무표정하다. 존은 분하고 속상해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비정상적으로 커보인다.
 선생님이 비정상적으로 커보인다.
ⓒ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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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얼굴 크기만한 손바닥에, 매를 쥐고 서 있는 선생님은 우리 반 원석이 말마따나 '괴물'처럼 느껴진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역할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신체적 조건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덤비는 행위는 무모해 보인다. 감히 반항할 엄두가 나지 않는 존은 다음 날 서둘러 학교로 떠난다.

"또 뭐가 나올 거 같아!"

노랗게 달아오는 길을 따라 등교하는 그림을 넘기려고 하자, 형우가 소리쳤다. 잠시 멈췄다.

"형우는 뭐라고 생각해?"
"상어나 개 같은 이상한 거요. 저 같으면 진짜 학교 가기 싫을 거 같아요."
"왜?"
"선생님도 무섭고, 제대로 말해도 믿어주지 않고 그래서요."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 걸까? 이번에는 사자다. 덤불에서 튀어나온 사자는 존의 바지를 물어뜯어버린다. 나무 위에서 심드렁해진 사자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느라 존은 또 지각이다. 사연 많은 불쌍한 소년은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선생님에게 말한다. 역시나 돌아오는 건 꾸중과 벌이다.

"뭐라고? 이 동네 덤불에는 사자 따위는 살지 않아! 저 구석에 돌아서서 큰 소리로 400번 외쳐라. '다시는 사자가 나온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바지를 찢지 않겠습니다.' 알았냐?"

존은 구석에 돌아서서 400번 외친다. 이빨이 뾰족하고 손가락이 귀신처럼 긴 선생님의 말을 어기지 않는다. 여기까지 읽자 "불쌍하다", "200번만 해!", "진짜 사자 맞는데" 하는 말들이 쏟아진다. 평소 수업 시간에는 발표시켜도 쭈뼛쭈뼛하던 놈들이 그림책에 푹 빠져서는 혼잣말처럼 뱉는다. 일기에 적힌 문장들보다 더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존은 동네 다리에서 커다란 파도를 만나 옷을 흠뻑 적신다. 학교에 늦은 존에게 선생님은 다시 한 번만 더 거짓말을 하고 지각을 했다간 회초리로 때려준다고 협박한다. 정직한 존은 '다시는 강에서 파도가 덮쳤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옷을 적시지도 않겠습니다'라고 500번 쓴다.

이쯤 되자 씩씩한 명희와 정헌이가 "어휴~ 저걸" 하며 주먹을 불끈 쥔다. 여차하면 책 속의 선생님을 향해 주먹을 날릴 기세다.

"휴~ 선생님을 밧줄로 묶어서 등굣길에 데려가고 싶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경춘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진실하게 말해줘도 안 믿으니 직접 데려가야겠단다. 선생님을 때릴 수는 없고 그냥 가자면 윽박지를 게 분명하니 밧줄로 꽁꽁 감아서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다고 했다.

'선생님은 이런 존재구나.'

교사가 불합리하고 폭력적이어도 아이들은 받아들이고 버텨야 한다. 초등학생들은 학교에 갈지 말지 선택할 권리가 없다.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는 일종의 복권이다. 학교에서 배정한 반에 가고 나서야, 나의 담임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정말 드물게 특별한 사연으로 교사가 바뀌지 않는 이상, 아이들은 꼼짝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내해야 한다.

교사 연수 시간에 반항아 역할을 했다. 화가 난 반항아를 담임이 지도하는 장면.
 교사 연수 시간에 반항아 역할을 했다. 화가 난 반항아를 담임이 지도하는 장면.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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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싫으면, 매일 아침 눈 뜰 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지옥 같은 학교에 제 발로 걸어가야 하는 공포. 교실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교사는 막강한 권위와 힘을 가진다. 시쳇말로 발랑 까진 초딩이란 소리를 들어도 어린이는 약자다.

아이들은 선생님 앞에서 자기의 욕망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다. 그래서 순종하게 된다. 집에서처럼 먹기 싫은 김치를 남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 착하고 말 잘 듣는 학생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른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한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이 숨어있다.

문제는 인간 대부분이 타인의 욕망만을 따를 수 없다는 데 있다. 꾹꾹 참고, 눌러온 욕망은 터지기 마련이다. 그 대상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이다. 담임에게 깨져 기분 나쁜 날 힘없는 친구를 괴롭히고, 직장 상사 비위 맞추던 스트레스를 동네 길고양이에게 푼다. <지각대장 존>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선생님도 어쩌면 교장선생님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될지도 모른다.

얘기를 마무리 지어보자. 결국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어떻게 되었을까?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쳐 물이 빠져나갈 때까지 난간에서 버틴 다음 날, 기적같이 등굣길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존은 제 시간에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선생님이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궁금한 사람은 꼭 책의 마지막 부분을 들춰보길 바란다. 힌트를 하나 주자면, 기막힌 일들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각대장 존

존 버닝햄 지음, 박상희 옮김, 비룡소(1999)


태그:#그림책, #지각대장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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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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