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쳉헤르를 벗어나려면 이 높은 고갯길을 한참 동안 넘어가야 한다.
▲ 쳉헤르 고갯길. 쳉헤르를 벗어나려면 이 높은 고갯길을 한참 동안 넘어가야 한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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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둘러싸인 몽골 중부 온천지대, 쳉헤르(Tsenkher)를 나오자마자 산으로 이어지는 높은 고개를 만났다. 며칠간 드넓은 초원에만 눈이 적응되었다가 풍성한 나무가 빼곡한 숲을 만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숲 위의 큰 고개 위로 차가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 놓은 비포장 흙 길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나의 몽골 친구 기사는 전혀 눈치를 보지 않고 험한 고갯길을 신나게 넘어가는 드라이브를 즐긴다.

고개 위 넓은 풀밭에 청초한 신부 같이 아름다운 핑크 색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차를 이 아름다운 꽃밭에서 세우자고 했다. 나와 아내는 꽃밭 안으로 들어가서 서로 머리를 대고 꽃 배경 사진을 찍었다.

아내와 단 둘이서 이렇게 꽃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찍은 것은 신혼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 꽃 앞에서는 주로 내가 아내와 딸이 함께 있는 사진을 찍어주었기 때문이다.

꽃밭에는 고요함만이 흐르고 있었고 가끔 풀벌레 소리만이 들렸다. 우리는 이 조용한 꽃밭 속에서 마치 꽃들이 우리를 위해 피어난 듯한 착각에 빠졌다.

몽골의 짧은 여름에 피는 꽃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 고원지대의 꽃밭. 몽골의 짧은 여름에 피는 꽃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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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위 초원에 꽃과 풀이 많으니 수많은 곤충들이 날아다닌다. 내 바지 위로도 노린재 몇 마리가 날아들었다. 앞가슴등판이 진한 갈색의 세모꼴인 노린재 암수가 내 바지 위에서 엉덩이를 붙인 채 교미를 하고 있다.

이 초원에는 사는 사람도 없고 나같이 길 지나가는 길손만 가끔 있으니 이 곤충들도 사람의 존재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이 녀석들은 내 다리 위에서 사랑을 나누다가 흩어져서 날아갔다. 노린재들이 날아간 하늘은 '포토샵'으로도 채우지 못할 짙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암수 노린재가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사랑에 열중하고 있다.
▲ 노린재의 사랑. 암수 노린재가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사랑에 열중하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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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풀밭에는 몽골 땅다람쥐, 조름도 많이 살고 있다. 조름은 솔개가 무서워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이기는 하지만 이 풀밭에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

잡식성인 조름은 꽃이 피어난 싱싱한 줄기와 함께 꽃을 먹고 있다. 마치 사람 손가락같이 생긴 긴 손가락으로 마치 사람이 꽃을 잡듯이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사람 같다. 우리가 이 조름을 관찰하면서 웃고 있는데 이 녀석도 우리가 신기한지 우리를 유심히 쳐다본다.

동물들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대상을 아는 모양이다. 녀석은 들판에 널린 꽃들의 줄기를 쥐어 잡고 열심히 꽃을 훑어 먹고 있다.

잡식성인 땅다람쥐 조름이 꽃을 꺾어서 먹고 있다.
▲ 꽃밭의 조름. 잡식성인 땅다람쥐 조름이 꽃을 꺾어서 먹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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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아래로 넘어서자 쳉헤르로 향하는 SUV 차량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올라오고 있다. 쳉헤르에서 온천을 즐기러 가는 여행객들일 것이다. 고개 아래쪽에는 다시 끝없는 초원과 나무가 없는 낮은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개 끝자락의 볼록 솟은 작은 봉우리에는 여행자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어워(Ovoo)가 세워져 있다. 몽골 여행을 다니다 보면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돌거나 신비한 지형이 있는 곳에는 여지 없이 우리나라 서낭당 같은 어워가 세워져 있다. 자연 앞에 미약한 인간이 자연의 신비한 힘에 자신의 운명을 의지하고 맡기고 싶은 것이다.

아르항가이의 넓은 초원지대로 들어서자 시원스러운 전경이 펼쳐진다.
▲ 다시 초원지대로. 아르항가이의 넓은 초원지대로 들어서자 시원스러운 전경이 펼쳐진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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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는 길 앞에 물 깊이가 꽤 깊은 개천이 나타났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고 큰 강물이 되면 차가 건너기 힘들다는 마의 구간이다. 나는 우리가 탄 차를 잠시 세우고 이 개울을 지나가는 차들을 지켜봤다. 거칠 것 없는 지프들이 물 속으로 뛰어들더니 물살을 헤치며 굉음을 내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이곳에서 왜 지프 차와 사륜구동 차들이 만들어졌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프나 사륜구동 차들이 실력을 발휘할 곳이 많지 않지만 이곳 몽골에서는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너는 데에 꼭 필요한 차들이 이런 사륜구동 차들이었다. 내가 이런 오프로드에서 운전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였더니 아내가 제발 참으라면서 말린다.

지프 차들이 아주 터프하게 강을 건너는 모습이 볼 만하다.
▲ 초원의 강물 건너기. 지프 차들이 아주 터프하게 강을 건너는 모습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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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시야에서 산은 완전히 사라지고 낮은 구릉 지대와 평원이 이어졌다. 광막하게 펼쳐진 초원에서 길은 자동차의 네 바퀴가 만든 흔적뿐이다. 속도를 많이 낼 수도 없는 이 좁은 길에 다른 차량이 앞을 막고 달리면 마음이 답답해질 노릇이다.

그런데 길이 만나는 작은 삼거리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리 앞길에 차 한 대가 들어섰다. 몽골 초원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은색 승용차였다. 큰 도시에서나 보일 법한 이 일제 세단 승용차는 초원길을 놀라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흙 길을 달리니 이 차가 달리면서 일어나는 흙먼지가 고스란히 우리 차 안에 들어왔다. 

앞에 가던 승용차를 앞지르기 위해 몽골 친구의 질주본능이 가동되었다.
▲ 초원의 질주. 앞에 가던 승용차를 앞지르기 위해 몽골 친구의 질주본능이 가동되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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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몽골 친구가 이 승용차를 제치려고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먼지를 날리는 두 차의 갑작스러운 질주가 시작됐다. 초원 위에 난데 없이 두 차의 무한질주 경주가 시작되면서 초원에 뽀얀 먼지가 일었다.

 "너, 왜 그래. 천천히 가지 그래? 너무 빠르잖아."
 " …… "

내 몽골 친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앞서 가는 세단 승용차가 내 몽골 친구의 질주본능을 자극한 모양이다. 몽골 사람들은 말 탈 때뿐만 아니라 자동차를 탈 때도 질주본능이 있다던데 오늘 보니 틀린 말이 아니다.

나와 아내는 아무 거칠 것 없는 초원에서의 레이스 안에 들어가 있었다. 속도가 붙자 차가 울퉁불퉁한 흙 길 위에서 통통 튀었고 우리의 몸도 차 안에서 들썩였다.

초원이 워낙 넓어서 큰 추돌사고는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이 몽골 친구를 내버려 두기로 했다. 질주본능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말을 탄 듯한 두 차량의 질주를 한동안 즐겼다.

길도 없는 길에서 우리가 탄 차가 승용차를 제칠 뻔한 순간도 몇 번 있었지만 앞서가는 이 승용차를 제치지는 못했다. 앞 승용차의 몽골 운전자도 질주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 차량의 선두 경쟁은 그 승용차가 다른 길로 빠지고 나서야 한참 만에 끝이 났다. 그 차가 사라지고 나서야 내 몽골친구의 질주하고자 하는 흥분은 가라앉았다.

길을 달리다 보니 한국에서는 흔하게 보지만 몽골에서는 처음 보는 비닐하우스가 있다. 몽골 안에서 낯익은 한국적 풍경을 만난 것이다. 초원만 보다가 현대적 비닐하우스를 보니 뭔가 어색하기도 하다.

몽골 친구에게 물어보니 한국의 사회봉사단체가 몽골에 만들어준 비닐하우스라고 한다. 사막화 되어가는 몽골 땅에서 농업 기술을 전수하고 야채가 부족한 몽골인들에게 야채도 공급하기 위한 활동의 일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국토 어디를 가나 보이는 비닐하우스를 이곳 몽골에서 만나니 반갑기만 하다.

몽골의 역사를 안고 흐르는 강변에서 말들이 더위를 피하고 있다.
▲ 올드 오르혼 강변. 몽골의 역사를 안고 흐르는 강변에서 말들이 더위를 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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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적지, 어기 호수(Ogü Nuur)에 거의 다다른 곳에서 몽골 민족에게 어머니와 같은 강인올드 오르혼(Old Orkhon) 강을 만났다. 알고 보니 몽골 한 중앙의 아르항가이(Arhangai) 아이막(Aimag)에는 오르혼(Orkhon) 강 동쪽으로 올드 오르혼 강이 흐르고 있었고 이 강은 몽골 중부의 아름다운 호수, 어기 호수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우리 차가 다리를 건너 이 강을 지나가버리자 몽골 친구에게 부탁하여 차를 돌렸고 강 가에 차를 세웠다. 나는 몽골인들의 마음의 고향인 오르혼 강줄기에 직접 발을 담그고 쉬어가기로 했다.

올드 오르혼 강물 안에 들어간 말들이 한낮의 따가운 햇살을 피하고 있었다. 물 안에 들어가 있을 때에도 말들은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무리로 몰려서 더위도 식히고 물도 마신다.

마치 일렬 종대로 줄을 서있는 듯 나란히 서서 물을 마시는 모습에서 말들 간의 강한 유대감이 느껴진다. 몽골이 강성하던 원나라 당시에도 이 올드 오르혼 강변에 모여서 목을 축이던 말들이 초원으로 달려나가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했을 것이다. 그때와 별 변한 게 없어 보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 과거의 시간과의 장벽이 사라져버린 듯한 느낌이다.

곧 있을 나담 축제에서 실력을 뽐낼 훌륭한 말들이다.
▲ 경주용 말들. 곧 있을 나담 축제에서 실력을 뽐낼 훌륭한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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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는 몽골 최대의 축제인 나담(Naadam) 축제에 나갈 경주용 말들이 나란히 줄에 메여 있다. 우리는 주변 게르에 있던 주인 아주머니에게 허락을 받고 이 경주용 말들에게 다가가 보았다.

귀한 경주용 말들의 등은 깨끗한 흰 천으로 감싸여 보호받고 있었다. 경주용 말들의 날씬한 체형이나 탄력 있어 보이는 근육은 주변 다른 말들보다 훨씬 때깔이 좋아 보였다. 작은 줄에 메여 움직이지 않고 인간의 명령을 기다리는 경주용 말들이 참 순해 보인다. 말은 보면 볼수록 몸매가 잘 빠지고 잘 생긴 동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경주용 말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이 말들을 훈련시키는 어린 기수들이 나타났다. 이 꼬마 기수들은 '이 시골에 이 외국인 같이 생긴 사람들은 누구지?' 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본다. 전혀 우호적이지 않은 눈빛들이다. 어린 녀석들이지만 마치 훈련을 거듭한 군인들처럼 눈매가 매섭다. 얼굴이 검게 그을린 깡다구 있게 생긴 어린이들이다.

나담 축제에서 질주본능을 겨룰 어린 기수들이 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 어린 기수들. 나담 축제에서 질주본능을 겨룰 어린 기수들이 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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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여행자들이 이 시골의 강변에 출현하는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고, 게다가 우리가 귀하디 귀한 경주마 옆에 있으니 우리를 경계하는 것 같다. 나와 아내는 이 어린 기수들이 불편해 하지 않도록 말에서부터 더 떨어져서 말들을 구경하였다. 우리는 몽골 친구를 통해 통역을 하면서 이 어린 기수들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경주용 말들이 너무 멋있게 생겼어. 너희들도 나담 축제에 나가니?"

말이 멋있게 생겼다는 칭찬에 이 어린 기수들은 방금 전에 우리를 째려보던 눈빛이 사라지고 바로 웃는 얼굴의 어린이가 되었다. 말이 참 멋있게 생겼다는 말은 나의 본심이었다. 이 녀석들은 자신들의 경주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네, 나담 축제에 나가요. 이 말들은 우리 지역 나담 축제에 나가면 우승할 말들이에요."

"축제를 일주일 앞두고 이 말들과 매일 강훈련을 하고 있겠구나. 꼭 우승을 빈다."

"고마워요. 꼭 1등 했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이 어린 기수들과 '하이 파이브'를 했다. 나는 이 어린 기수들이 말을 타고 초원을 질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들은 가슴이 터질 듯이 초원을 달리고 또 달릴 것이다.

나는 이 어린 기수들과 말, 그리고 드넓게 펼쳐진 초원을 보면서 몽골인들의 질주본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몽골인들의 질주본능은 어려서부터 나담 축제 말타기 경주에서 선두를 겨루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나는 올드 오르혼 강변에서 나오면서 다시 이 어린 몽골 어린이들을 돌아보았다. 이 녀석들도 우리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들에게 행운을 빌며 손을 흔들었다. 이들은 말에 거침없이 올라타더니 초원에서 말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이 어린 기수들의 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어린 기수들과 경주마들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초원에서는 오토바이를 따라잡는 경주마들의 질주가 시작됐고 어린 기수들은 말과 한 몸이 되어 질주를 시작했다. '질주'라는 말은 몽골 초원에 어울리는 말이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약 520 편이 있습니다.



태그:#몽골, #몽골여행, #아르항가이, #말, #나담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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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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