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 주전자를 들고 타박타박 한여름 땡볕을 밟아가며 막걸리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 목이 너무 말라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몇 모금쯤 마셔봤던 그 시금털털한 맛.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나 시골에서 살았다면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씽긋' 웃게 만드는 흑백사진 같은 기억일 게다.

막걸리. 이것만큼 수많은 사연을 만들어낸 음료가 또 있을까. 특히 농촌에서는 모를 심건, 바심(곡식의 낟알을 떨어서 거두는 일)을 하건 논두렁과 밭고랑에서 사람이 모였다 하면 꼭 있어야 할 곡기 같은 것이 막걸리였다. 어디 그뿐인가. 절기마다 행사를 벌이고, 집집이 잔치를 하고, 초상을 치러도 막걸리부터 몇 통 떡하니 받아다 놔야 모든 일이 됐다.

불과 40~50년 전이니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우마차 가득 나무 술통을 싣고, 또는 짐바자전거(운송 자전거)에 하얀 고무술통을 주렁주렁 매달아 먼지 폴폴 날리는 시골길을 달리던 풍경은 농촌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일상이었다.

잠시 우리가 알고 있는 막걸리의 역사를 문헌을 통해 더듬어 보고 가자.

170여 종이나 됐다는 우리 민족 고유의 술인 가양주 전통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맥이 끊겼다. 조선총독부가 세수확대와 쌀수탈을 위해 주세법(1909년)과 주세령(1916년)을 공포했고,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술을 빚을 수 없게 됐다.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공식적인 양조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부 가정집에서는 몰래 술을 담가 '밀주(密酒)'란 말이 그때부터 생겼다.

해방 이후에는 식량부족으로 인한 정부의 양곡관리법(1965년)에 따라 순곡주 금지령이 내려졌고, 쌀 대신 수입산 밀가루를 막걸리의 주원료로 사용하게 됐다. 밀막걸리는 쌀에 비해 단맛보다 신맛이 강하고 빛깔은 누르스름했지만, 1960~1970년대까지 밀막걸리가 주류시장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했다.

그렇게 전국의 읍면 단위에 1개소씩 허가를 받은 양조장에서 밀막걸리가 빚어져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고 허기진 배를 채운,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덕산주조장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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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파출소 뒷편에 있는 덕산주조장 건물.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 일부분만 남아 옛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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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 마을마다 막걸리를 파는 구판장 같은 소매점이 있었다. 그곳으로 통막걸리를 공급해 주던 짐바자전거를 쫓아가 보면 읍면소재지 한복판에 자리 잡은 기세등등한 양조장(또는 주조장, 술도가)을 볼 수 있다.

대개의 양조장 주인은 권력과 부를 동시에 가진 지역유지였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소재지 중심에 자리 잡은 덕산주조장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주변에서 기억하는 덕산주조장의 1대 사장은 고 윤석희(1917~1962)씨다. 덕산우체국을 세워 체신부에 기증할 만큼 부자였다고 한다. 덕산의용소방대장을 역임했고 초대 덕산면의회 의장도 맡았다.(덕산면지 인물편 참고)

덕산주조장의 설립년도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내가 7살 때도 기억하는데 그때도 지금 자리에 주조장이 있었어."

덕산주조장 인근에 사는 신태억(91) 옹의 말대로라면 84년은 훨씬 넘었다고 봐야 한다. 신옹은 미간을 좁히며 옛일을 기억해 낸다.

"그땐 밀주 단속이 심해 집에서 술을 담그지 못했으니 양조업이 잘 됐지. 복당리에 지점을 두고 자전거로 여전 실어 날랐어. 쌀이 귀했던 시절이니까 밀가루 막걸리였지... 그 때 사장이 윤석희씨였고, 큰소리 내면서 살았는데 일찍 죽었어. 그 뒤로는 아들이 맡았지."

덕산주조장의 2대 사장은 아들 윤규승씨, 이어 손자 윤종현씨가 3대 사장으로 주조장을 내려받았다.

시대는 변해 소주를 비롯해 다양한 주류가 세상에 나오면서 막걸리를 빚던 양조장들이 하나둘씩 간판을 내렸다.

3대째 끊길 뻔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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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 안에 현대식 양조설비가 갖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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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주조장도 문을 닫다시피 했을 때 주류업을 하던 임채욱(64)씨가 이를 인수해 네 번째 주인이 된다. 그의 나이 50에 인수했다니 2002년의 일이다.

임 사장의 고향은 부산이다. 거기서 무역업을 했는데 부도가 났다. 배낭 하나 메고 전국을 떠돌다 예산에 정착한 지 30년이 됐다.

"처자식은 먹여 살려야 하고... 뭐든지 해야겠드라고. 마침 역사가 오래된, 전통있는 양조장인데 문을 닫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제대로 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면허를 샀지."

다 죽어가던 양조장을 다시 일으키긴 쉽지 않았다. 양조기술도 전수받지 못해 다른 양조장을 찾아다니며 어깨너머로 배우고 책을 사다 놓고 독학하며 술제조법을 익혔다. 주조시설도 항아리에서 스테인리스통으로 현대화했다.

그러고 난 뒤 덕산주조장에서 임 사장의 야심작이 탄생한다. '오가피주'. 강원도까지 전국으로 팔려 나갔고, 그야말로 히트를 쳤다.

"2년 정도 괜찮았는데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오가피주가 생겨나고 오가피 성분도 제대로 넣지 않은 가짜술이 덤핑을 치고 하다가 신문에 나서 얻어터지고 하니까 끝났지 뭐. 그래 되니까 우리까지 타격이 컸어. 물건값은 안 들어 오고, 어음 받은 건 소용없고, 결국 도매상인들에게 당한 거지. 이런 사업은 키우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어."

그 뒤 덕산주조장은 주 판매시장을 예산지역으로 삼았다. 외지로 나가는 택배는 반드시 물건값이 들어와야 보낸다.

밀가루 막걸리? "어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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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주조장 임채욱 사장이 양조설비를 설명하고 있다.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 안에 현대식 양조설비가 갖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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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주조장에선 약주인 불로구기자주도 나오지만 주력상품은 쌀막걸리다. 쌀이 귀하던 시절엔 밀가루로 막걸리를 뺐지만 쌀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고 임 사장은 강조한다.

"밀가루는 빠르면 3일 만에 빼지만(숙성기간) 쌀은 12일이 걸린다. 밀은 연질이지만 쌀은 강질이어서 천천히 발효가 되는데, 그래서 술맛이 묵직하다. 트림도 안나고 배앓이도 없다. 비교가 안 된다"고 쌀막걸리를 예찬한다.

쌀막걸리를 만드는 과정은 술의 엄마 격인 입국을 만들고, 5일 동안 배양을 한 뒤에 쌀가루를 1차로 넣고 3일이 지나 2차로 넣는다. 다시 2일이 지나면 3차로 넣고 2일이 지나 4차로 넣는다. 그리고 2~3일이 지나면 술이 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온도다. 20~22도를 정확히 맞춰야 한다.

하지만 제대로 숙성된 것이 아니다. 유통과정에서 비로소 완전히 익는다고 한다.

지난 2012년에는 웰빙바람을 타고 막걸리가 갑자기 부상했다. 젊은 층에서도 인기를 끌었고 도시의 대형마트까지 막걸리를 진열해 놓고 팔 정도였다. 전국에 있는 전통 양조장들이 주목을 받았고 정부지원도 이뤄졌다. 하지만 막걸리 열풍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때는 정말 정신없이 팔렸어. 한 달에 쌀 4000㎏씩 술을 담았지. 그러니까 그 분위기를 타고 신생 양조장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나고 그래서 시장을 흐려 놓았어. 그 사람들 다 부도나고 문 닫았지. 판매량이 3분의 1로 떨어졌지만 우리야 지역에 기존 거래처가 있으니까 그냥 유지하는 거지."

덕산주조장에는 지금도 직접 막걸리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심심치 않게 이어진다. 통을 들고 와 받아가기도 하고 병막걸리 2~3병을 비닐봉지에 담아가기도 한다. 양조장 내부를 구경하는 잠깐 동안에도 두 명이나 다녀간다.

인근에서 세차장을 한다는 한 아저씨가 막걸리 몇 병 비닐봉지에 담은 뒤 "목이 껄껄하다" 하니 임 사장이 통 속에 담긴 막걸리를 두 잔이나 덤으로 건넨다.

임 사장은 면 단위에서 유일하게 백 년 가까이 이어온 양조장에 대해 지자체가 최소한 포장재와 병 등을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는 희망도 내비쳤다.

덕산주조장은 임 사장의 아들, 딸, 사위가 함께 가족경영체로 운영을 한다. "규모가 적어도 가족끼리 하니까 마음은 편하다"고 한다. 그는 "언젠가는 다시 막걸리가 인기를 끌 것이다. 양조업은 정말 매력있는 사업이다"고 전망한다.

시설은 현대화됐지만 건물 뼈대 만큼은 한세기 역사를 떠받치고 있는 덕산주조장, 이제는 예산을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 없다는 임 사장의 소망대로 대대손손 이어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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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 사장이 막걸리를 받으러 온 이웃에게 덤으로 통막걸리를 떠서 권하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관련사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