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열리는 해에 3월 A매치는 일정상 중요한 분기점으로 꼽힌다. 공식적인 월드컵 최종엔트리 발표는 5월이지만 한국같이 본선에 출전하는 팀들은 사실상 3월이면 최정예 멤버를 거의 확정 짓고 이미 '월드컵 체제'에 돌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스트 멤버가 총출동하는 3월 A매치는 사실상 본선을 앞두고 평가전 이상의 의미를 지닌 '가상 월드컵 모의고사'로 여겨진다. 여기서 좋은 성과를 거두면 월드컵 본선까지 기분 좋은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만일 내용과 결과 모두 좋지 못하면 월드컵을 코앞에 두고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김신욱, 김민재, 정우영 등이 24일(현지시간) 영국 벨파스트 윈저파크경기장에서 열린 북아일랜드 평가전에서 1-2로 역전패 당한 뒤 아쉬워하며 그라운드를 떠나고 있다.

김신욱, 김민재, 정우영 등이 24일(현지시간) 영국 벨파스트 윈저파크경기장에서 열린 북아일랜드 평가전에서 1-2로 역전패 당한 뒤 아쉬워하며 그라운드를 떠나고 있다. ⓒ 연합뉴스


역대 한국 대표팀은 비교적 3월 A매치에서 좋은 성과를 거뒀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그해 정초에 열린 북중미 골드컵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경질설까지 거론되는 등 위기를 맞이했으나 3월 유럽 전지훈련에서 튀니지-핀란드-터키를 상대로 2승 1무의 호성적을 거두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의 체력 프로그램과 장기합숙을 통한 조직력 강화가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던 시점이었다.

허정무 감독이 이끌었던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도 직전 동아시안컵에서 중국전 패배 등으로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으나 해외파 정예멤버들이 소집된 3월 유럽 원정에서 디디에 드록바 등이 버틴 코트디부아르를 2-0으로 완파하며 상승세를 탄 바 있다.

2014 브라질월드컵을 앞둔 홍명보호는 3월에 그리스를 원정에서 만나 역시 2-0으로 승리했다. 당시 대표팀 발탁을 놓고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공격수 박주영은 이날 경기에서 45분만 뛰고도 결승 골을 기록하며 사실상 월드컵 본선 출전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대표팀은 본선에서는 무기력한 경기를 선보이며 결과적으로 그리스전이 홍명보호의 마지막 A매치 승리가 됐다. 다만 그리스전을 '가상 러시아'로 여기고 임했던 대표팀은 조별리그에서 러시아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유일하게 승점 1점은 챙겼다.

2018 러시아월드컵을 앞두고 있는 신태용호는 3월 유럽원정에서 북아일랜드와 폴란드를 A매치 상대로 정했다. 본선에서 만날 스웨덴과 독일을 염두에 둔 평가전이었다. 하지만 신태용호는 25일 영국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열린 '가상 스웨덴' 북아일랜드와의 첫 경기에서 1-2로 역전패하며 불안감을 드리웠다.

자책골로 동점 허용... 이어 결승골까지 내줘

 손흥민이 24일(현지시간) 영국 벨파스트 윈저파크경기장에서 열린 북아일랜드 평가전에서 코리 에번스를 앞에 두고 슛하고 있다. 2018.3.25

손흥민이 24일(현지시간) 영국 벨파스트 윈저파크경기장에서 열린 북아일랜드 평가전에서 코리 에번스를 앞에 두고 슛하고 있다. 2018.3.25 ⓒ 연합뉴스


대표팀은 전반 7분 만에 터진 권창훈의 선제골로 앞서나갔지만 이후 20분 김민재(전북)의 자책골로 동점을 허용했고, 후반 36분에 이날 교체 투입되어 A매치 데뷔전을 치른 폴 스미스에게 결승 골을 내주며 무너졌다. 유럽파와 국내파를 망라한 사실상의 최정예멤버를 구성하여 기대를 모았던 신태용호로서는 지난해 11월 콜롬비아전(2-1승) 이후 이어온 연속 무패(5승 3무) 행진도 마감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 신태용호에 대한 팬들의 기대치는 그리 높지 않은 상황이다. 월드컵 본선에서 독일, 멕시코, 스웨덴 같은 강적들과 '죽음의 조'에 속하게 된 데다 신태용 감독의 리더십에 대해서 팬들의 의구심도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안컵과 터키 전훈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국내파 위주로만 꾸려진 대표팀이었고 상대도 비교적 약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신 감독으로서는 베스트멤버가 소집된 이번 유럽원정을 통하여 월드컵을 향한 기대치를 되살릴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신태용호는 북아일랜드전에서 이런 물음표를 불식시키지 못했다. 신태용호 출범 이후 최대 약점으로 거론되고 있는 수비는 이날도 2실점을 허용하며 허점을 드러냈다. 북아일랜드는 유럽지역 예선에서 10경기 6실점밖에 내주지 않은 견고한 수비가 강점이지만 공격은 그렇게 뛰어난 팀이 아니다. 실제로 위협적인 찬스는 한국이 더 많이 만들어냈다. 하지만 세트피스와 역습 상황에서 수비수들이 순간적으로 집중력에 허점을 드러내며 무너졌다.

신 감독은 이번 유럽 원정에서 K리그 최강팀 전북 선수들을 대거 차출했다 특히 수비라인은 장현수를 빼면 김민재-이용-김진수 등 전북의 포백을 거의 그대로 이식했다. 문제는 전북이 K리그에서도 이름값에 비해 수비는 허점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전반부터 부동의 왼쪽 풀백으로 활약했던 김진수가 무릎부상으로 이른 시간에 김민우로 교체되는 악재가 있었다. 대표팀 중앙수비수 중 그나마 안정된 플레이를 펼친다는 평가를 받았던 유망주 김민재가 흔들렸다는 것도 뼈아픈 대목이다.

전반 자책골은 김민재의 탓보다는 이번에도 상대의 세트피스에 허를 찔리며 측면에서부터 크로스를 너무 쉽게 허용한 조직력의 문제가 더 컸다. 그러나 후반 막판 역습 상황에서의 결승 골은 김민재 본인의 집중력이 떨어지며 수비 숫자가 더 많은 상황에서 상대에게 완벽한 슈팅찬스를 허용한 책임이 있다. 결과적으로 김민재가 이날 2실점에 모두 책임이 있는 모양새가 되면서 신태용호의 '센터백 잔혹사'를 이어가게 됐다.

문제는 후반부 집중력 상실

 기성용이 24일(현지시간) 영국 벨파스트 윈저파크경기장에서 열린 북아일랜드 평가전에서 조니 에번스(5)를 앞에 두고 드리블하고 있다. 2018.3.25

기성용이 24일(현지시간) 영국 벨파스트 윈저파크경기장에서 열린 북아일랜드 평가전에서 조니 에번스(5)를 앞에 두고 드리블하고 있다. 2018.3.25 ⓒ 연합뉴스


물론 경기 전체를 놓고 보면 이날 대표팀 수비수들에게 지난 경기들과 비교해도 실수가 그리 잦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후반부 '급격한 체력 저하에 따른 집중력 상실'이다. 부지런히 압박하고 많이 뛰는 축구를 요구하는 신태용호에서 이날처럼 주도권을 쥐고도 골이 터지지 않을 경우 후반으로 갈수록 2-3선 간의 간격 유지가 느슨해지며 역습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공간을 무방비로 내주는 장면이 많다.

월드컵 같은 무대에서는 한 번의 실수가 팀의 패배로 이어진다. 만일 이날 경기가 스웨덴과의 월드컵 본선전이었다면 한국은 지금쯤 탈락했을 것이다. 본선에서 만날 상대국들의 수준이 북아일랜드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감안하면 수비수들이 90분 내내 최고의 집중력을 유지해도 될까 말까다.

공격도 아쉬웠던 것은 마찬가지다. 김신욱-손흥민-이재성 등이 수시로 위치를 바꾸며 원톱에서 투톱, 스리톱까지 넘나드는 유기적인 전술 변화를 보여줬지만 권창훈의 선제골을 제외하면 결정력이 너무 떨어졌다. 에이스 손흥민은 예상대로 라인을 깊숙이 내린 북아일랜드 수비의 집중견제에 시달리며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장신 공격수 김신욱도 조니 에반스-가레스 맥컬리 등 힘과 높이를 갖춘 북아일랜드 수비수들을 상대로 장기인 제공권을 발휘하지 못했다.

신태용호의 2선 공격수들이 전형적인 윙어가 없고 중앙 지향적인 선수들 일색인 데다, 좌우 풀백 역시 김진수의 부상과 이용의 부진으로 김신욱에게 제대로 된 크로스를 올려줄 만한 선수가 없었던 것도 김신욱의 부진에 한몫을 담당했다. 본선에서 만날 독일이나 스웨덴도 모두 상당한 피지컬과 수비력을 보유한 팀들임을 감안하면 월드컵을 앞두고 '유럽의 파워 축구'에 대한 예방주사를 제대로 맞았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신태용 감독은 후반 경기가 풀리지 않자 선수들을 대거 교체 투입하며 분위기 전환을 노렸는데 오히려 경기력이 살아나기는커녕 상대의 역습 한방에 무너지고 말았다. 특히 팀 내 최고의 '플레이메이커'기성용과 '골잡이' 손흥민이 빠지자 상대에게 부담을 안기며 경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에이스가 보이지 않았다. 염기훈-정우영-이창민-황희찬 등 새롭게 투입된 선수들은 열심히 뛰기는 했지만 전술적으로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주축선수 1~2명에 대한 전술적 의존도가 너무 크고 '플랜 B'가 없다는 것은, 본선에서 한국을 만나게 될 상대 팀에게 심각한 약점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미 월드컵을 향한 여정은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신태용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상대의 강점을 최대한 무력화시키는 것이 이번 유럽 원정의 핵심 키워드였다. 그러나 일단 첫 경기인 북아일랜드전에서는 그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신태용호의 월드컵 도전이 희망적이기는 어렵겠다는 불안감을 지울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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