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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순, 방동근, 이진희, 양호남, 전정훈, 김영신.

2015년에서 2016년 사이 삼성전자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메틸알코올(메탄올) 중독으로 실명한 파견 노동자들이다.

<오마이뉴스>, <한겨레>, <경향신문>, JTBC '뉴스룸'  등 여러 언론에서 이들의 사연을 대서특필했고, 여론은 들끓었다. 사실 처음 이 사건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언론은 시큰둥했다.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 자신이 당한 일을 고백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실로 어처구니없다. 메탄올 중독으로 노동자들이 실명한 사건은 산업안전에 대한 인식이 미미했던 초기 자본주의 시절을 연구한 역사서에나 실릴 법한 이야기다. 실제 2차 대전 직후 술을 구하지 못한 일본인들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메탄올을 마시고 실명했거나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이런 일이 세계 경제규모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세계 1류 기업 삼성이 만드는 수출 '효자종목' 중 하나인 스마트폰을 만들던 노동자들에게 벌어진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빛을 잃은 노동자들은 누구였으며, 왜 이들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해야 했을까?

파견노동 시장, 법의 사각지대 

<실명의 이유>(저자 선대식) 표지.
 <실명의 이유>(저자 선대식) 표지.
ⓒ 북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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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대식 기자가 쓴 <실명의 이유>는 바로 이런 의문에 답을 준다. 선 기자는 메탄올 실명 사건을 보다 명확하게 조명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반월·시화공단의 파견노동 시장에 뛰어든다.

선 기자가 뛰어든 파견노동 시장은 그야말로 법의 사각지대다. 노동자의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사람은 오로지 한 개의 노동 단위로서만 가치를 갖는다. 이런 현실은 이랜드, 기륭전자, KTX 여승무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하면서 '잔뼈'가 굵은 기자마저 움츠러들게 만든다.

"안산역이 있는 원곡동에는 수많은 파견업체가 있다. 반월·시화공단에 제조업체가 다수인 걸 감안하면 이곳 파견업체들은 대부분 불법 파견으로 돈을 벌고 있다. 부동산 공인중개사 사무실처럼 파견업체 입구에는 '제조업 파견노동자 모집' 전단이 붙어 있다. 원곡동은 대낮에도 불법 천국이다. 이곳에서 국가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 본문 73쪽

"공장의 환경 또한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환풍기는 없었다. 단지 공장에 몇 안 되는 창문을 열고 선풍기 한 대를 바깥을 향해 틀어 놓았다. 아직 겨울 끝자락인데 나를 비롯한 파견노동자들은 난방도 안 되는 공장에서 몸을 움츠린 채 일했다. (중략) 앞서 언급한 뉴스 속의 A와 나는 일주일 간격을 두고 똑같은 일을 했다. 유일한 차이는 내가 일한 공장에서는 절삭유를 사용했고, 그녀가 일한 공장에서는 메탄올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조그마한 차이는 큰 결과로 이어졌다. 그녀는 시력을 잃고 뇌손상을 입었다. 나는 멀쩡했다. 내가 쓰러지지 않은 것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마음을 쓸어내렸다. 나는 곧 메탄올을 내게 상관없는 일로 여겼다." - 본문 82~83쪽


글로만 읽어도 손이 떨려온다. 만약 MBC <PD수첩>이나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같은 공중파 방송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통해 영상으로 실상이 알려졌다면 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메탄올 중독으로 빛을 잃은 노동자들이 실은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임을 일깨운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당시 언론 보도를 살펴 보자. 앞서 많은 언론들이 메탄올 실명 사건을 크게 다뤘다고 적었다. 특히 소위 '진보'로 분류되는 언론은 삼성전자와 하청업체들의 먹이사슬에 주목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진짜' 사람이었음을 알려주는 보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무뚝뚝하게 사실만 전달해야 하는 언론의 한계일 수도 있다. 이 같은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언론 보도는 인간적인 요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저자인 선대식 기자는 위장취업을 불사하는가 하면, 실명 피해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속깊은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성공한다. 이 책 <실명의 이유>가 다른 언론 보도에 비할 수 없는 이유다.

실명 노동자는 우리의 '이웃'

메탄올 중독 실명 피해자 이현순씨.
 메탄올 중독 실명 피해자 이현순씨.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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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사람을 만날 차례다.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지면의 제약상 두 노동자의 사연만 옮기고자 한다. 먼저 삼성전자 스마트폰을 가공하는 하청업체 BK테크에서 일하다 실명한 전정훈씨의 사연이다. 그의 사연은 하근찬의 단편소설 <수난이대>의 노동자판이라 할 정도로 기구하다.

"정훈씨는 아버지가 공장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의 오른팔은 기계 모터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신경과 힘줄이 끊어지며 팔목이 잘렸다. 곧바로 집 앞에 있는 가천대 길병원 중환자실에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아버지는 치료를 받았지만, 병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병원은 뒤늦게 아버지의 척추 3, 4번이 부러진 사실을 확인했다. 이미 때는 늦었다. 여러 합병증이 발병해, 아버지는 그해 8월 세상을 떠났다.

군대에서 막 제대해 집으로 돌아온 스물다섯의 정훈씨는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남동생과 함께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다.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파견업체의 문을 두드렸다.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어려운 그로서는, 밤샘 근무를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공장에 취업하는 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남동공단 주변에 있는 많은 청춘의 선택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 본문 130~131쪽


전정훈씨와 마찬가지로 삼성전자 갤럭시 스마트폰 부품을 만들던 업체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한 이현순씨의 사연 역시 기막히다.

"현순씨는 200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 공장에 취업했다. 구직 사이트에 올라온 구인 광고를 보고 일자리를 얻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을 구하는 또래의 많은 청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파견업체 소속으로 일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중략) 현순씨는 생산 제품이 공작기계에 입력한 수치대로 나왔는지 여러 도구를 사용해 검사하는 일을 맡았다. 그녀는 공작기계를 다뤄 부품을 생산하는 일도 했다. 공장에는 문이 달려 있지 않은 공작기계가 많았다. 공작기계에서 쏟아져 나온 메탄올이 공장 곳곳으로 퍼졌다. 회사는 그녀에게 천으로 된 일반 마스크나 종이마스크, 목장갑이나 니트릴 장갑을 지급했다. 메탄올을 취급하는 노동자를 제대로 보호할 수 없는 장비다. 심지어는 이러한 최소한의 보호 장비조차 지급하지 않아 맨손으로 작업한 날도 많았다." - 본문 180~181쪽


전정훈, 이현순씨의 사연에서 알 수 있듯 메탄올 중독 사건 피해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이들이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양호남씨는 중국 동포다. 우리 사회에서 중국 동포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한민국의 법은 이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불법파견 업체 사장들은 대부분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법망을 빠져 나갔다.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이 집행유예를 넘는 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취약한 위치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일한다. 이 지점에서 묻는다. 국가는, 그리고 법은 왜,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메탄올 중독 실명 사건 이후에도 위험의 외주화에 따라 파견노동자가 위험에 내몰리는 현실은 여전했다. 고용노동부나 관계 기관은 파견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다시는 파견노동자들이 죽거나 크게 다치는 일이 없기를 내심 바랐다. 하지만 젊은 파견노동자가 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박 활동가도 그렇고, 나도 그가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 사회에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 본문 254~255쪽




실명의 이유 - 휴대폰 만들다 눈먼 청년들 이야기

선대식 지음, 북콤마(2018)


태그:#메탄올 중독 실명, #선대식 기자, #삼성전자 , #위험의 외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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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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