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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솔직히 학교냐 학원이지 -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자퇴'

나는 자퇴생이다. 고3의 어느 날 재학 중인 서울의 한 외고를 자퇴했다.

1993년 5월 27일. 기억이 생생한 것은 자퇴하던 날의 날짜만이 아니다. 태양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운동장에서 여자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남자 아이들은 농구를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을 마치고 가방을 싸 운동장을 걸어 나가며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을, 학교 건물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만 눈이 아파오고 그 모습들이 흐려졌다.

입학하고 치른 첫 모의고사 결과는 처참했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다 집근처도 아닌데 스쿨버스에서 내렸다. 성산대교 어디 즈음 멈춰 서서 뛰어들까 말까를 고민했다. 세상에 태어나 그런 끔찍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첫 모의고사가 있은 날의 종례 시간에 우리에게 가채점을 하고 예상점수를 종이에 적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290점 이상 나와라", "280점 이상 나와라"...는 식으로 그 종이를 걷으셨다. 이미 너무 많은 아이들이 앞으로 나가 종이를 제출한 상태였다. 내 차례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렇게 반 전체가 서로의 등수를 가늠할 수 있게 됐다.

성산대교 앞에서 내 생각의 흐름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뛰어내리지 않았기에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돌아보면 당시의 담임선생님에게 과연 교사의 자격이 있었나 싶다. 그의 행동은 충분히 차별적이었고 모욕적이었으며 폭력 그 자체였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를 원망해본 일이 없었다. 내가 원망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학교에는 '빌보드 차트'도 있었다.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오면 교무실 근처엔 크게 벽보가 붙었다. 1등부터 100등까지의 이름과 점수가 기재된 벽보는 '빌보드 차트'로 통했다. 빌보드 차트가 붙으면 쉬는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아이들이 그 앞으로 달려가 자신과 친구들의 수준을 확인했다. 역시 차별이고 모욕이며 폭력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교를 원망해본 일이 없었다. 그곳 어디에도 이름 올리지 못하는 내가 탓해야 할 대상은 오로지 나 자신이었다.

과외를 시작했고 죽어라 공부했다. 상위권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다시 성산대교에 가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리고, 단 한 번 빌보드 차트 구석진 끄트머리에라도 이름을 올려 '공부 못하는 애'라는 낙인을 벗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고교 시절 나의 최대 소망이었다.

간신히 그 꿈을 이뤘지만 대가가 따랐다. 보이는 모의고사 성적을 위해 나는 내신을 포기하고 있었다.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낮은 내신등급은, 수능 점수나 본고사 점수로 만회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당시 내신 비중이 강화되는 등 갑자기 입시제도가 바뀌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하나 둘. 자퇴생이 생겨났다. 뉴스에선 늘어나는 외고생들의 자퇴를 주요하게 보도했다. 너무 많은 자퇴생들이 생겨나 종로학원에 00외고반, **외고반 등 외고 자퇴생반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리고 나도 그 '외고생 자퇴 대열'에 합류했다.

"어차피 대학 잘 가려고 여기 온 거잖아? 여기가 무슨 학교야 학원이지. 그런데 왜 내가 내 내신 손해보며 여기 남아 있어야 되는데? 너도 빨리 나와. 다들 스카이 갈 건데 우리만 못가면 창피해서 어떻게 살아!"

나의 자퇴 결심을 듣고 한 친구가 말렸을 때 내가 했던 말이다. 고작 열여덟이었다. 어린 나의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들이 나왔는지 돌아보면 소름마저 끼친다. 하지만 정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단계라도 더 서열 높은 대학으로 가는 데에 학교가 걸림돌이 된다면 박차고 나가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친구들과 졸업은 같이 해야지? 그런 낭만과 여유 따위 없었다. 그건 사치였다.

그래서 우리보고 어쩌라고 -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수업 시간

학교의 의미가 내게만 '도구적'이었던 건 아니었던 듯하다. 나 말고도 많은 외고 자퇴생들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너희는 학교에 왜 다니니?"

살면서 이런 질문을 받은 일이 딱 한 번 있다. 당황스러웠다. 질문자는 선생님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의 어느 날, 새로 오신 젊은 수학 선생님은 수업하다 말고 갑자기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우리들의 의아한 눈빛들이 선생님의 푹 숙인 머리에 모였다. 한참 뒤 그녀는 고개를 들었지만 이내 교실을 나가버렸고 뒤따라간 반장이 들고 온 것은 하얀 백지들이었다. "선생님이 여기에, 우리가 '왜 학교에 다니는지'에 대해 쓰라고 하셨어"

다음 시간 그녀는 교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잔뜩 굳은 얼굴로 우리들이 제출한 종이들을 교탁 위에 쿵 내려놓으며 한 말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 학교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한 명만, 단 한 명만이라도 다른 생각을 썼기를 바랐어. 그럼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어쩜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똑같이 쓴 거니? 너희들 모두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라고 썼어. 그러니? 너희에게 학교는 그저 대학에 가기 위한 곳일 뿐인 거니? 기가 막힌다. 너희만 그런 건지 대한민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러려고 교사가 된 게 아니야. 나는 더 이상 교사를 할 수가 없어. 적어도 여기서는."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은 많이 어두웠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느낄 교사로서의 자괴감에 조금도 공감이 일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선 분노가 일었다. 내 머리 속에선 몇몇 문장들만 맴돌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우리보고 어.쩌.라.고.

'지금 이게 우리 탓이라는 건가요? 누군 이렇게 살고 싶어요? 당신들 어른들이 우리보고 좋은 대학 가야한다고 했잖아요. 그래놓고 공부만 하래서 공부만 하고 앉았는데 뭐가 문제라는 거죠? 제가 대학 떨어지면 당신이 책임질 건가요?'

나는 생각했고,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듯 했다. 쉬는 시간, "쟤 왜 저래? 그럼 지가 제대로 가르치던가."와 같은 말들이 오갔다. (전국의 선생님들께 죄송하지만, 예의 없었던 당시 저희의 말투를 그대로 적습니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 짐작은 갔다. 우리는 그녀의 수업을 듣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 그녀가 '교과서로' 수업했기 때문이었다. 젊은 초임교사인 그녀는, 우리가 1학년 때부터 <정석> 류의 문제집으로 진도 나가는 것에 익숙하고 시험에 나올 것만 가르쳐주길 원하는 아이들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그녀는, 교과서로 교육과정에 정해진 그대로 차근히 내용을 설명하고 때로 의미 있고 감동적인 얘기도 하며 뭔가 '교육적인' 수업을 하고 싶어 했다. 당연히(!) 수업을 듣지 않는 아이들이 늘어갔다. 하나 둘 아이들은 그녀가 수업을 하든 말든 독서대에 각자의 문제집 등을 올려놓은 채 각자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교육'을 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우리는 '시험 대비 훈련'을 원했다. 어려서부터 시험공부에 익숙했고 특히 그 학교에서 우리는 명문대 입학을 최대의 꿈과 사명으로 여기도록 조련되어 왔다. 전교생 조회를 마칠 때 학교장의 선창을 따라 '우리는 엘리트다'라고 크게 외쳤던 것도 떠오른다. 우리는 그렇게 '성공'을 위해 달리도록, 명문대를 꿈꾸고 경쟁하도록, 특히 대학입시의 그 날 높은 성과를 내는 것에 온 정신을 집중하도록 그렇게 훈련받아왔다.

대학입시는 매일같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고 그 결과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갈린다는 것을, 그러니까 계급과 신분이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육다운 교육'을 원치 않았다. 나는 또는 우리는.

가난하면 꿈조차 맘대로 꾸면 안돼! -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교사 시절

어쩌다보니 교사가 됐다. 대학시절 평등한 세상을 꿈꾸기도 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도록 세상은 당최 평등해질 기미가 없었다. 언제 이뤄질지 모를 그런 꿈같은 얘기보다 고등학교 교사가 된 내게 더 중요한 것은 당장 내가 만나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점수를 올려 조금이라도 더 급이 높은 대학에 진학하는 일이었다.

반 아이들 상담을 할 때였다. 한 아이가 모 대학의 스페인어과를 지망한다고 했다. 웬 스페인어? 이유를 묻자 "한비야처럼 살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샘 저는요, 한비야처럼 세상을 여행하며 살고 싶어요. 그런데 스페인어를 쓰는 나라들이 은근히 많다는 거예요. 영어랑 스페인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졸업하면 바로 세계여행 떠나려고요. 그래서 이곳저곳 다니면서..."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한비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책 쓰고 그러니 아주 멋져 보이지? 그런데 한비야만 세계여행 하디? 책 대박난 한비야 말고 그렇게 돌아다니고서 안정되게 사는 사람 몇 명이나 된다고 그런 소리를 해? 한비야는 집이 어렵지 않아. 좋은 직업으로 돈 많이 벌어놓고 외국으로 떠났던 거고. 그런데 넌 아니잖아. 너희 집 생각도 안 하니? 니가 지금 소녀가장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그런 허황된 꿈을 꿔. 웃기지마. 지금부터 니 꿈은 공무원이야!"

"너무하세요! 가난하다고 꿈까지 마음대로 못 꿔요? 선생님이 뭔데 제 꿈을 짓밟아요!"

"응. 가난하면 마음대로 꿈꾸면 안 돼. 일단 니 손으로 니 입을 안정되게 먹여 살릴 수 있을 때 꿈을 꾸든지 말든지 해. 외교관이 되어 외국을 돌아다니든 교사가 되어 해외파견근무를 가든 아니면 좋은 회사 들어가서 돈 많이 벌고 휴가 때마다 해외로 나가든 맘대로 해. 하지만 처음부터 한비야가 되겠다는 꿈은 위험해. 욕하든 말든 상관없어. 난 너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아이는 울었다. 나를 흘겨보며 정말이지 서럽게 울었다. 하지만 나는 위로조차 건네지 않았다. 아이가 울건 말건 모의고사 성적과 텝스 점수 등을 분석한 표를 내밀며 그에게 맞는 입시전략만, 지금 주력할 과목이 무엇인지만 설명했다.

돌아보면 당시의 내게 과연 교사의 자격이 있었나 싶다. 나의 행동은 충분히 차별적이었고 모욕적이었으며 폭력 그 자체였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악역을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적지 않은 아이들이 "저도 00이에게 하셨던 것처럼 따끔하게 야단 좀 쳐주세요. 정신 차리라고 좀 해주세요. 자극받아 공부 열심히 하고 싶어요"와 같은 말들을 했으니,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들에 나는 더더욱 죄책감이 없었다.

물론 폭력이 폭력임을 알아채고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아이들이 있기도 했다. 오래전 그 중 한 아이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글을 이 공간에 쓰기도 했다(나는 대체 그 학생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http://bit.ly/KpeU7g).

전교학생회장이기도 한 그 아이는 인문학적 소양이 깊었고 그만큼 사회적 문제의식도 뛰어났다. 또, (이런 표현은 다소 주저되지만) '스펙쌓기용 학생회장'이나 '어용 학생회장'이 아니었다. 친구들의 건의사항을 반영하기 위해 아이는 교내 교칙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가 하면 급식과 관련한 공개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회과 담당인 만큼 내심 그의 사회과와 관련된 문제의식과 실천적 행동 등이 기특했지만 사실 그 아이와 나는 내내 앙숙이었다. 
 
교단에 있던 시절 반 아이들이 스승의 날에 주었던 상장의 일부다. 나는 아이들을 기능론자로 만들어 성공을 향해 학벌 피라미드, 계층 피라미드 윗쪽으로 달려가게 하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최선이라 믿었다.
 교단에 있던 시절 반 아이들이 스승의 날에 주었던 상장의 일부다. 나는 아이들을 기능론자로 만들어 성공을 향해 학벌 피라미드, 계층 피라미드 윗쪽으로 달려가게 하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최선이라 믿었다.
ⓒ 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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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아이들이 스승의 날에 준 위 상장엔 '갈등론에 젖어버린 3반의 아가들을 기능론자로 개과천선시키셨으며'라는 문구가 들어있었다. 그 아이가 주도적으로 쓴 듯했다. 연재의 앞부분에서 언급했듯 고등학교 사회문화 과목에는 '계층론(계급론)'이 등장한다. 사회불평등 내지 계층 피라미드를 두고 기능론자들은 능력과 노력에 따른 차등은 필요하고 정당하다고 말한다. 반면 갈등론자들은 의사, 변호사 등의 고소득과 높은 사회적 지위는 지배계급에 의한 피지배계급 착취의 한 모습일 뿐이므로 계층 피라미드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말한다(관련기사: 신분상승의 꿈을 꿀 수는 있으니 영화 '기생충'은 해피엔딩? http://omn.kr/1mvtr).

"둘 중 무엇이 맞는 관점인지 고민이 될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미안하지만 고민하지 마. 지금은 안 돼. 지금은 시험문제에서 각 관점에 따른 정답지 골라낼 줄만 알면 돼. 특히 갈등론 쪽은 쳐다도 보지 마. 너희가 대학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무조건 기능론이 올바른 관점이어야 해. 피라미드가 존재한다는 건 너희도 인정할 거야. 일단 기능론자로 살고, 일단 능력과 노력으로 저 위로 올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그리고 그 위에서 안전해졌을 때 그 때 고민을 시작해줘. 이 피라미드가 부정의하다고 느낀다면 올라가서 안전해진 다음 거기서 피라미드를 뒤집기 위해 노력해줘."

적어도 스펙을 위한 토론대회 등의 준비가 아니면 수업시간에 토론을 한 일은 없었다. 해당 단원의 내용을 설명하면 곧장 수능 기출문제집을 펴고 관련 문제들을 푸는 게 나의 수업이었다. '계층' 단원도 마찬가지. 토론 주제로 너무도 적합해 이에 대해서만 일주일 내내 토론해도 모자랄 테지만 그러면 안됐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진짜 교사다운 일'은 입시중심수업에 이런 몇 마디를 덧붙이는 것뿐이었다.

몇몇 아이가 "피라미드를 올라가다가 내가 변하면 어쩌느냐"고 했다. 그럴 수 있다고, 아니 대부분이 그렇게 되더라고 말하지 못했다. "피라미드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 모여서 피라미드를 뒤집을 수는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바로 그게 진짜 정답이라고 생각한다고도 말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있든 나는 아이들을 흔들어선 안 되었다. 일단 올라가라. 지금은 고민을 멈춰라. 뭘 하든 올라가서 해라. 그것이 하루하루 코앞으로 다가오는 (평생의 신분과 계급을 가를지 모를) 대학입시를 위해 배틀로얄 경쟁의 삶을 살아야 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그래서 학생회장인 그 아이는 나를 늘 적대시했다. "선생님은, 제가 중학교 때 만난 참교육 하신 선생님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군요. 저는 기능론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야무지게 말하기도 했다.

그런 그의 굽힘 없는 성격은 아버지를 닮은 것인 듯했다. 인문학적 지식은 뛰어나도 수학 점수는 너무 낮았던 그 아이에게 수학 점수를 올리라며 반성문까지 받아내며 닦달하다 못해 부모님까지 호출했을 때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내게 "좋은 대학에 가면 행복하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는 참으로 바람직한 학생이었고 아이의 아버지는 참으로 바람직한 부모님이었다. 문제는 '나'였다. 아이들을 보호한단 명목으로 수업시간에 감히 아이들에게 고민을 멈출 것을 또 최대로 보수적으로 사고할 것을 주문하고, 점수가 낮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강요하고, 그저 명문대학 입학만을 목표로 하도록 하는 그런 '나'만이 비정상적인 교사였다.

교단을 떠나고 제주살이를 하며 북유럽이나 유럽의 보편적 복지에 대해 공부하게 됐다. 또 다른 세상도 있음을 알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나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수많은 아이들이었다. 그들 중 몇몇에게 연락을 했다. 한비야를 꿈꾸던 아이와 기능론이 틀렸다고 말하던 아이에게도 연락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몰라서 그랬다고. 그게 나의 최선인줄 알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내내 눈물이 쏟아졌다. 아이들은 너그럽게 참회를 받아주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는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졌다.

"그 때 당장은 서운했지만 나중에 오히려 도움이 됐어요. 저 지금 공무원시험 준비 하고 있어요. 정신차린 거죠. 어쩌겠어요 세상이 원래 그런 걸. 선생님 덕에 현실을 빨리 깨달았으니 오히려 감사하고 있어요."

가난하다고 꿈까지 마음대로 못 꾸느냐, 선생님이 뭔데 내 꿈을 짓밟느냐 그렇게 소리칠 때가 차라리 낫다 싶었다. 한없이 이상적인 세상과 자신의 모습을 마음껏 꿈꿔봐도 좋을 이십대의 이마 푸른 아이가 '세상이 원래 그렇다'며 그 현실에 온몸을 적응시키는 중이란 말에, 나로 인해 현실을 빨리 깨달아 오히려 고마워한단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일기는 일기장에'라는 댓글로 비판하는 이가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저의 얘기를 드러냄으로써 '교육과 계층'의 문제가 우리의 삶의 면면에 영향을 미치는지 말하고 싶었습니다.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지극히 사적일 수도 있는 이 의견 기사를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태그:#선량한 교육 차별주의자, #외고생 자퇴 러쉬, #경쟁교육, #교육 피라미드, #계층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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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사회과 교사였고, 로스쿨생이었으며, 현재 [법률사무소 이유] 변호사입니다. 무엇보다 초등학생 남매둥이의 '엄마'입니다. 모든 이들의 교육받을 권리, 행복할 권리를 위한 '교육혁명'을 꿈꿉니다. 그것을 위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씁니다. (제보는 쪽지나 yoolawfi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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