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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여름이 온다'의 이수지(48) 작가가 '아동문학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했다. 한국 작가가 안데르센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그림책 "여름이 온다"의 이수지(48) 작가가 "아동문학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했다. 한국 작가가 안데르센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 연합뉴스=비룡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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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로 SNS 창을 열었다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제게 쏠렸지요. 뒤늦게 입을 틀어막아보지만, 가슴은 여전히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이수지 작가가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아래 안데르센상)에 최종 선정됐다는 소식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안노 미쓰마사(1984) 이후 38년 만의 쾌거입니다.

안데르센상은 국제아동도서협의회(IBBY)에서 동화작가 안데르센을 기리기 위해 만든 상으로, 1956년부터 짝수 해마다 글 부문, 1966년부터는 그림 부문과 함께 아동문학과 그림책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생존 작가 각 1명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상입니다. 2016년 후보에 올랐던 이수지 작가는 지난 21일(현지시각) 올해의 그림 작가 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

심사에 오른 최종 후보 리스트를 보니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이탈리아), 아라이 료지(일본),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폴란드), 시드니 스미스(캐나다), 고스티(아르헨티나)로 국내 팬들도 많은 세계적인 작가들이었어요.

유럽과 미국 작가들의 각축장이었던 이 상을 그림책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 그것도 여자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소 마이너한 장르인 글 없는 그림책을 만들어 온 여성작가가 수상하다니. 그 의미가 가볍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이 보여준 새로운 세계

안데르센상은 어린이에 대한 작가의 세계관과 그것을 구현하는 문학적, 미학적 아름다움을 두루 평가하며, 한 작품이 아니라 작가 일생의 작업을 심사합니다. 작가는 수상 소식을 접한 이후, 여러 인터뷰를 통해 '얼떨떨하고 믿기지 않는다. 그동안 중요하다고 여기는 작업을 즐겁게 해 왔는데,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면 되겠다는 용기를 얻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림책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고, 독자로서 그림책을 좋아하며, 그림책 글 작가를 꿈꾸고 있는 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그림책의 가능성이 활짝 피어나고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시대에,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멋진 작가들과 동시대를 살 수 있다니 정말 좋습니다. 아이에게 모국어로 그림책을 읽어주고 그림책 좋아하는 사람들과 작품들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들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들
ⓒ 박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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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작가들과 함께 협업한 그림책 몇 권을 제외하고 이수지 작가는 글이 없는 그림책(Silent Picture Book)을 만들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런 방식이 결국 이야기에 자유를 선사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지은 아동문학 평론가는 그의 작품에 대해 '글 없는 그림책을 재조명하고 그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새로 발견해냈다'라고 했지요.

문자가 전하는 서사와 정해진 답 찾기에 익숙해진 어른의 눈에는 글자 없는 그림책이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사고가 말랑말랑한 아이들은 작가가 어떤 정답을 심어놓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시각적인 이미지로만 전개되는 서사의 미로 속을 헤매며 자신의 이야기를 찾고 만들고 몰입하고 즐깁니다.

특정한 이야기가 없기에 그 어떤 이야기도 될 수 있는 글 없는 그림책.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빈 여백에 자신의 이야기를 채워 넣거나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해하면서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독자가 됩니다.

이수지 작가는 어디서든 놀이를 찾아 즐기고 몰입하는 아이들에게 영감을 받아, 놀이의 과정을 작품 속에서 다양하게 변주하며 자신과 세계를 탐색하고 경험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자전적인 이야기 <나의 명원 화실>을 통해서도 살짝 엿볼 수 있지만, 작가는 그림을 잘 그렸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유독 책이라는 매체에 끌렸고 책과 그림을 연결하는 작업을 탐색하다가 영국에서 북아트를 전공했습니다.

이수지라는 역사의 시작이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장치 속에 다양한 요소들이 등장하는데요, 소녀와 토끼가 서로 쫓고 쫓기는 한 편의 연극처럼 느껴집니다. 이 작품에서 출발한 작가의 실험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경계 3부작(거울 속으로,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으로 이어집니다.

똑같은 판형에 세로, 가로, 위아래의 열림 면을 달리한 경계 3부작은 책의 물성을 활용하여 양쪽 페이지를 나누는 제본선이라는 책의 한계를 인식의 경계로 바꿔냅니다. 경계선 하나로 현실과 상상의 공간을 획득한 한 아이가 자기 앞의 경계를 깨닫고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놀고 즐기고 도전하고 자라나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 작품 모두 글이 없다 보니 시간의 흐름을 담아내기보다는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요소가 강한데요.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긴박감과 놀이의 즐거움, 의외의 유머가 모두 녹아 굉장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모던한 그림체, 색깔을 자제한 그림이 아이에게 잘 와닿을까 싶었는데 질문과 이야기가 많아지는 책이었어요.

소녀가 등장해 거울과 마주해 춤을 추고(거울 속으로), 파도와 쫓고 쫓기며(파도야 놀자), 그림자와 한바탕 그림자극을 벌입니다(그림자놀이). 그림을 따라가며 궁금한 부분들에 머물렀다 이야기를 채워나가다 보면, 어느새 책은 끝나고 표지를 덮고 난 뒤에는 또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여운이 남지요.

작가가 경계 3부작을 비롯해 많은 작품에서 변주하고 있는 주제는 '놀이'인데요. 놀이는 '아이들의 본능이고 권리이자 아이다운 삶의 조건이며 아이들의 세계를 든든히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그림책 페어런팅, 한길사-김세실 지음 참고)입니다. 아이들에게 놀이란 가장 자발적인 행위고 놀이를 통해서 세상과 사람을 배우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놀면서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도전 앞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그어둔 선 앞에서 호기심을 느끼고 두려움에 머뭇거리다가도 이내 그것을 넘나들며 훌쩍 자라납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을 통해 놀이에 몰입한 아이의 순간을 보여주며 가장 풍요롭지만 그만큼 제약이 많은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경계 3부작처럼 책의 물성 속 공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을 넘어 감각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한 그림책도 있습니다. 루시드 폴의 노래를 그림책으로 새롭게 재현한 <물이 되는 꿈>은 서지 못하는 사정이 있는 아이가 물속에서 편안히 누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물처럼 자유로워지는 순간들을 병풍처럼 이어지는 파랑의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여름이 온다>도 청각의 시각화를 실험한 작품입니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을 모티브로 해서 작가가 강조해 온 '놀이'와 '몰입'의 순간을 다뤘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음악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두 작품은 그림책이 어떻게 예술 너머의 예술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림책의 '존재 의미'를 보여주다 

그림책 작가의 길을 선택한 이유가 "고급예술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예술로서의 그림책의 가능성이 멋있어 보였다"라는 이수지 작가. 그는 수상 후 한 인터뷰를 통해 "독자들에게 친절하기만 한 그림책보다는 책의 성질을 응용한 실험적인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많은 부모가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고 있지만, 점점 책 읽는 인구는 줄고 있고 그마저도 영상에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림책을 읽어주는 부모이자 그림책을 사랑하며 언젠가 저의 그림책을 쓰고자 하는 한 사람으로서 과연 책이 아이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종종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수지 작가가 왜 올해 안데르센상의 최종 수상자가 되었는지 그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그림책이 다른 장르의 책과 대체 불가능한 이유를 끊임없이 작품으로 시도하고 보여주며, 그림책의 영역을 다양하게 확장해 나가기 때문 아닐까요. 

이번 수상 소식으로 작가의 그림책들을 꺼내 아이와 함께 펼쳐 읽습니다. 놀이의 무아지경에 빠진 책 속 아이들과 닮은 표정을 짓고 있는 제 아이의 옆모습을 바라봅니다. 주어진 서사에서 정답을 찾는 데 익숙해져가는 많은 어린이들이 작가의 그림책을 보면서 경계를 한정짓지 말고 자유롭게 그것을 넘나들고 배우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꿈을 마음껏 꾸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저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https://m.blog.naver.com/uj0102
https://brunch.co.kr/@mynameisred


태그:##이수지, ##한스크리스티안안데르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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