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 안병하 치안감의 아들 안호재씨.
 고 안병하 치안감의 아들 안호재씨.
ⓒ 김동규

관련사진보기


무려 42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지난 3월 31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했던 고 안병하 치안감의 유족들이 경찰청으로부터 안 전 치안감에 대한 의원면직 처분을 취소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앞서 인사혁신처는 지난 3월 24일 안 전 치안감 의원면직은 불법 구금과 고문 등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며 이를 취소한다고 경찰청에 통보했다. 의원면직은 공무원이 스스로 사표를 쓰고 사직하는 행위로써 자의에 의한 퇴직을 뜻한다.

고 안병하 치안감은 5·18 당시 신군부의 부당한 발포명령을 단호히 거부한 대표적인 경찰 영웅으로 꼽힌다. 그는 신군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총기를 회수한 후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때문에 5·18 당시 광주시민들은 "경찰은 시민의 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양심을 지킨 대가는 혹독했다. 고 안병하 치안감은 1980년 5월 26일 직위해제된 후 보안사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6월 2일 강제로 의원면직 처리를 당했다. 안 치안감은 고문 후유증 등으로 지난 1988년 세상을 떠났고, 그의 의원면직은 2022년 3월, 42년 만에 취소됐다.

3일, 모진 세월을 견뎌온 안병하 치안감의 막내아들 안호재씨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래는 안호재씨와의 일문일답.

- 이번에 아버님이 의원면직 취소 처분을 받으셨습니다.
"이번에 경찰 측으로부터 아버님 의원면직이 취소되었단 이야기를 듣는데, 저는 사실 그 이야기를 정식으로 들으면 날아갈 듯 기쁠 줄 알았어요. 오랜 세월 고생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도 참 담담하더라고요. 42년 만에... 너무 늦게 되었어요. 오히려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아버님과 함께 피해를 보셨던 다른 분들에 대한 온전한 명예회복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소신을 지킨 공직자가 제대로 예우 받아야 공직 사회가 바로 설 텐데 이 부분이 정말 안타까워요."

- 5·18 직후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실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님을 자주 뵙지 못했어요. 저는 서울에 있었고, 어버님은 광주에 계셨죠. 그래서 아버님을 보고 싶을 때면 광주로 찾아갔어요. 당시 다른 공직자들은 중앙에 줄을 대기 위해 서울에 자주 왔지만 아버님은 광주에서 자리를 지키셨어요. 그러다 5·18 당시의 일이 있었어요. 이후 아버님이 보안사로 끌려가셨는데, 사실 그전에 먼저 치안본부로 압송되셨어요. 그런데 동료들이 만나주지도 않고 바로 보안사로 인계했어요. 다들 생계가 걸려있으니까, 눈치 보기 바빴던 거죠.

이후 제 아버님은 5·18 직후인 6월에 집에 오셨는데, 그때 정말 당당한 모습으로 흐트러짐 없이 귀가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조사만 받고 나오신 줄 알았고, 괜찮으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2, 3일 지났을까요. 갑자기 쓰러지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아버님은 응급실, 병원 입원, 집에서의 요양을 계속 반복하셨어요. 그러다가 1988년도에 돌아가셨어요.

저희는 당시에도 아버님이 당연히 국립묘지에 안장되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신청했는데 거부당했어요. 이때부터 아버님을 국립묘지에 모시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어요. 아버님은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2006년에 관련 소송에서 승소했어요. 이 과정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고, 아버님의 정신을 온전히 계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병하 인권학교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어요."
 
5.18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제일은행(현재 무등빌딩) 앞에서 최루탄이 터진 상황에서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5.18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제일은행(현재 무등빌딩) 앞에서 최루탄이 터진 상황에서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관련사진보기

 
- 아버님 외에 다른 경찰관 분들도 징계를 많이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5·18 당시 아버님께서 총을 들고 있으면 사람이 여차할 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며 경찰관들의 총기를 회수한 후 숨길 것을 지시하셨어요. 그래서 전남청 이정방 장비계장님, 이준규 목포경찰서장님 같은 분들이 아버님 지시에 따라 동분서주 무기를 숨겼어요.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시골에 있는 작은 지서에서는 땅에 묻기도 했어요. 목포에서는 아예 총기를 배에 실어 고하도 섬으로 잠시 옮겨뒀어요. 5·18 당시 전남청 이수택 작전과장님은 특전사 군인들이 광주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 보시고 걔네를 뜯어 말리기도 하셨어요. 그러다가 부하들 앞에서 그들에게 폭행까지 당하셨죠.

5·18 직후에 전두환이 치안본부장을 염보현씨로 교체해요. 그리고 6월에 '광주사태 관련 문책 대상 경찰관 조치'라는 공문을 보내 사태진압 실패에 책임이 있는 경찰관들에 대해 조치하라고 명령해요. 이때 치안본부에서 과잉충성하느라 국보위 지시보다 더 많은 인원을 해직시키고 징계했어요. 저희 아버님과 이준규 목포서장님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는데 나머지 분들의 명예는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에요. 당시 고초를 겪은 경찰은 안병하(직위해제), 이준규(파면) 두 분 외에도 의원면직 11명, 감봉·견책 21명(의원면직 4명 포함), 경고 31명, 전보 12명을 더해 총 73명이에요."

- 이분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문재인 정부에서 징계 받았던 부분에 대해서는 해결해 주었는데요. 그게 감봉 등 징계를 취소하고 작은 금액만 보상해 준 거라서 실질적인 보상이 아니에요. 심지어 보상액을 1980년 당시 월급을 기준으로 책정했어요. 그래서 당시 감봉 징계를 받으신 분이 21명인데, 보상액이 10만 원 미만인 분이 5명, 10만 원에서 20만 원인 분이 10명, 20만 원 이상인 분이 6명이었어요. 경찰은 징계 받으면 진급에서 누락돼요. 그 사람들... 소신을 지켰다는 이유로 삶에 치명타를 입었는데 징계 내용이 감봉이었다고 일부 금액만 보상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죠.

게다가 당시 많은 경찰분들이 옳은 일을 했다가 의원면직 처리되셨는데요. 말이 의원면직이지, 이분들이 거의 같은 시점에 사직서를 쓰셨기 때문에 사실상 강요된 해직이에요. 생계 전선에 있는 40대, 50대 가장들이 동시에 사직했는데 어떻게 자발적인 일이었겠어요. 그런데 경찰 측에서 이 부분을 여전히 자발적인 사직으로 보고, 자료 부족 등을 이유로 방치하고 있어요."

- 42년, 정말 긴 시간이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저희 가족을 행복한 공직자 피해 가족이라고 소개해요. 그나마 상황이 나으니까요. 저는 양심과 소신을 지킨 공직자들이 정당한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직자가 바로 서야 국민이 행복해요. 시간이 지나서 진실이 밝혀졌으면, 당연히 정당한 예우가 있어야 돼요. 그래야 앞으로 같은 일을 할 사람들의 상황이 더 나아지니까요. 경찰에서 영웅이라고 말하고 추모식도 했지만, 인사카드에 적힌 의원면직 네 글자가 수정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요?
"아버님 후배 경찰관들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싶어요. 그런데, 너무 힘드네요. 안병하기념사업회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쉽지 않아요. 국민들께서 많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분들과 삼촌이나 작은 아버지처럼 친하게 지냈어요. 광주 놀러 갔을 때 자주 뵈었어요. 그런데 멀쩡히 공직하던 분들이 저희 아버님 의견이 맞다고 따랐다가 다 그렇게 되신 거예요. 아버님도 돌아가실 때까지 큰 마음의 빚으로 안고 사셨어요.

저는 지금도 그분들 생각하면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똑같이 희생했는데 저희 아버님과 몇 분만 명예 회복되었잖아요. 전남경찰청에 안병하 공원이 있어요. 그런데, 제 아버님 이야기만 있지, 다른 분들 이야기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른 분들 이야기도 해달라고 요청해 놓고 행사에도 안 가고 있어요. 마음이 아파서 못 가는 거죠."

태그:#안병하 치안감, #5.18 경찰, #5.18 민주화운동, #안병하 안호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폭력에 대해 고민하며 광주의 오늘을 살아갑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주세요'를 운영하며, 이로 인해 2019년에 5·18언론상을 수상한 것을 인생에 다시 없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