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글리치>의 한 장면.

넷플릭스 드라마 <글리치>의 한 장면. ⓒ 넷플릭스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보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글리치>. 외계인 얘기라는 풍문이었지만, 알고 보니 두 '찌질한' 여자들의 성장 서사가 아닌가. 전여빈과 나나라는 매력적인 캐스팅에 끌려 보게 되었는데, 누가 뭐라거나 나는 별 다섯 개를 주겠다.
 
이 드라마로 두 배우는 배우로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었다. 내게 전여빈은 영화 <죄 많은 소녀>로 강하게 새겨졌었다. 그러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로 호감을 풍선처럼 키우다 마침내 <글리치>로 팬덤을 완성하게 되었다. 드라마 <빈센조>에서 뭔가 성긴 듯한 느낌이 무척 아쉬웠었는데, 제 옷을 찾아 입은 듯 그때의 미진함을 명쾌하게 날려버렸다. 막무가내 나나의 객기 가득함은 한 끝만 오버해도 과할 수 있는 캐릭터인데, 놀라울 정도로 완벽히 소화해냈다. 두 배우의 허당인 듯하면서도 예리하게 벼려진 연기의 합이 드라마의 성공을 견인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
 
홍지효(전여빈)는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중학생 시절 갈대밭에서 외계인과 만난 외계인 접촉자다. 하지만 특이하다는 낯섦의 불운이 그렇듯, 누구도 그의 목격을 믿어주지 않았다. 정신질환자로 오인되어 치료를 받았다. 그때부터였다, 지효가 남들을 믿지 않기로 작정한 건.
 
부모조차 믿어주지 않는 외계인 접촉 사건은 지효를 혼돈에 빠뜨린다. 왜 안 그렇겠나. 분명히 보았는데 이를 증명할 근거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 아니겠는가. "진짜 미친년"으로 불리기 전에 어린 지효는 자신이 본 것을 기억의 심해에 봉인하기로 한다. 마치 영화 <맨인블랙> K의 뉴럴라이저의 빛을 쏘인 듯, 그때의 기억을 지운다.
 
하지만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외계인의 형상이 다시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지효는 두렵다. 불안의 와중에 '남친'이 사라지고 마침내 기억의 결계가 풀린 듯 옛 기억의 감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외계인 접촉을 유일하게 믿어주었던 친구 보라(나나)를 '남친' 추적 과정에서 만나게 되고, 이들은 다시 의기투합해 봉인해둔 기억의 비밀을 찾아 나선다.
 
 넷플릭스 드라마 <글리치>의 한 장면.

넷플릭스 드라마 <글리치>의 한 장면. ⓒ 넷플릭스

 
여기서 잠깐 보라를 들여다보자. 살아온 세월도 수상쩍고, 입은 이를 증명하듯 욕부터 뱉고 보는 사납기 짝이 없는 거친 여자지만, 속은 누구보다 보드랍다. 그는 어린 지효에게 우정을 배신당하고도 끝까지 지효를 믿어준 유일한 친구다. 의리 있는 여자다. 게다 배신을 억울해하며 복수의 칼을 가는 대신, 친구가 남긴 조악한 외계인 탐지 장비를 가보처럼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언젠가 도래할 친구와의 조우를 대비해온 무시무시한 인내심의 소유자다. 그는 어떻게 지효와의 만남을 15년간이나 기다릴 수 있었을까.
 
그의 인내는 그의 믿음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지효가 본 것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의 예민한 촉수는 뭔가 달라진 현장의 기운을 포착해냈다.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친구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돌변한 친구가 앞장서서 아무 일 없음을 선언하고 돌아서자 둘의 관계는 깊은 늪에 빠진다.
 
지효의 매몰찬 거절과 자기부정에도 보라는 왜 포기하지 않은 걸까. 1976년 서울 UFO격추 미수 사건부터 종교단체와 관련된 집단 자살 사건까지를 추적하다, 그의 민감한 감각은 뭔가 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하나씩 지층을 파고들수록 어릴 적 지효의 경험이 사실이라는 믿음이 강해지고, 지효를 깊이 의지하고 사랑했던 자신을 믿게 된다. 어쩌면 보라는 이날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때가 되면 기억을 되찾을 친구를 돕기 위해 오랜 준비를 해왔던 셈이다.

15년 만이지만 보자마자 지효임을 안 보라와 달리, 지효는 보라를 알아보지 못한다. 지효는 그때의 자신을 봉인하며 보라도 함께 묻었다. 그래야 했다, 살기 위해. UFO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어릴 때부터 이상하다는 소리를 듣게 했고, '다른' 사람이 되어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지효는 거짓 자아를 만들어냈다.
 
 넷플릭스 드라마 <글리치>의 한 장면.

넷플릭스 드라마 <글리치>의 한 장면. ⓒ 넷플릭스

 
입시를 치르고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하고 취업했다. 두근거림 없는 연애를 하고 그 상대와 결혼을 계획한다. 오직 사회가 정상이라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수행하며 이렇게 살면 정상이 되리라 다짐한다. 마음에서 들끓고 있는 '이건 아닌데' 하는 혼란의 수런거림을 꾹꾹 눌러가며 사람들 하는 대로 살면 살아질 줄 알았다. '니가 이상한 거야'라고 가스라이팅하는 수군댐을 내면화하고, 사회가 원하는 정상이 되기 위해 진짜 나를 밀어냈다.
 
오랜 자기 부정의 시간은 사회가 원하는 정상성을 구축하며 가짜 자아와 살아낸 세월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던가. 거짓된 자아는 사소한 트리거로 분열되고, 웃고 떠들고 행복한 척하는 날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다. 거짓 자아에 넌더리가 난 어느 날, 껍데기만 존재하는 자신이 비치는 거울을 산산이 깨버리게 된다. '이건 내가 아니야.' 
 
나를 찾아, 내가 지운 기억을 찾아 나서는 데는 산을 옮길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그 산을 함께 들어 올려줄 조력자가 필요하다. 이때 친구의 도래를 믿으며 기다렸다. 짠하고 나타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해결사를 자처하는 보라는 지효에게 태산보다 큰 믿음을 준다. 누가 나를 이렇게 믿어주겠는가. 누가 나의 실패를 "다시 찾으면 되지"라며 일으켜 세우겠는가. 각자도생을 교리처럼 외치는 집단최면 사회에서, 누가 나보다 나를 더 신뢰해 주겠는가.
 
마치 이날을 기다려왔다는 듯 좌충우돌하면서도 의기투합으로 진실을 쟁취하는 두 여자 주인공의 분투는 보기 드문 여성 서사를 성취한다. 우정을 시험하는 교활한 농간에 휘둘리지 않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뚫고 전진하는 의리 있는 여자들의 분투가 아름답다.
 
이들의 비정상이 오히려 정상임을 인정하는 주체는 남루한 지구인이 아니라, '찌질한' 이들이 자신들의 막중한 성물을 보존할 유일한 적임자임을 일찍이 알아챈 외계 생명체다. 자신이 본 것이 진짜라는 믿음, 내가 미친 게 아니라는 자기 확신이야말로 이 세상을 구원할 가장 힘센 권능이 아니던가. 초월의 환희는 이들을 슈퍼히어로 급으로 각성시킨다. 큰 힘을 지닌 히어로의 큰 책임감으로, 너만 잘하고 너만 잘 살면 구원받는다는 집단 최면을 "거짓말"이라고 깡그리 깨부순다. 지효와 보라의 의기투합이 시작되었다. 서로의 용기가 되는 여자들을 지켜보는 관객의 가슴도 벅차오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됩니다.
<글리치> 전여빈, 나나 외계 생명체 여성 서사 여성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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