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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스케치북, 색연필, 네모칸 노트, 파일집 등 수업시 필요한 문구류를 가방에 넣는다. 군산 말랭이마을 성인 문해교육 수업 '동네글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올해 나는 매주 월요일 아침 두 시간씩, 총 6개월간의 문해교육을 위한 글방선생으로 변신한다.

10명의 어른들 중, 가장 나이 어린 70세 덕순 어머니가 1등으로 교실에 들어왔다. 평생 생선 장사를 하시며 고객과의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 없다는 그녀는 '첫 수업인데 당연히 일찍 와야지'라고 말씀하셨다. 갑자기 진찰 받으러 병원에 가신 두 분을 제외한 모든 신청자가 참여했다.
 
6개월동안 진행될 글방수업에 대한 전체적 설명에ㅐ 귀를 쫑긋한 어른들
▲ 동네글방수업 첫 시간 6개월동안 진행될 글방수업에 대한 전체적 설명에ㅐ 귀를 쫑긋한 어른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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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에 들어가기 전 글방교육의 전체 수업계획표와 6개월간의 교육 과정이 끝났을 때 당신들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할지를 설명했다. 2월에는 문해교육의 사례견학차 제주도를 방문하며 당신들의 글방수업에 대한 정신적 준비를 했었다. 1차 워크숍(문해능력평가와 시낭송시간)까지 마치고 나니 그들의 배움에 대한 의지는 문해교육 담당자인 나를 공부시켰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는 제가 호칭을 바꿀 거예요. 어머님이란 말 대신에 00학생이라고 부를 거예요. 그리고 반장도 뽑구요, 글방 가방도 나눠드려요. 제가 이름을 부르면 나오셔서 책가방을 받아주세요. 이 가방 속에는 기본적인 문구류와 책이 들어있어요."

반장으로 가장 어린 덕순님이 뽑혔다. 앞으로 결석, 지각이 없도록 도와주신다고 했다. 1회 수업을 할 때마다 40분 수업으로 3교시로 나누어서 진행했다. 오늘의 1교시는 교과서를 중심으로 앞으로 할 글자인지수업, 2교시는 시 소개와 시낭송수업, 3교시는 그림책 읽어주기 및 그림표현수업을 진행했다. 교과서수업은 내가 맡고, 시낭송과 그림책 수업은 동료인 김정희 선생이 맡았다.

낱글자 인지가 부족한 어머님들은 나의 첫 수업으로 준비된 파워포인트를 보는 것도 힘들어했다. 첫날이라고 '기역, 니은, 디귿...'을 하는 줄 알았다고, 당신은 글자부터 알고 싶다고 했다. 교과서의 소개를 전자책으로 설명하면서 다음 시간부터는 낱글자부터 배우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우리나라 글자의 자음과 모음의 수를 물으니 모른다고 하셔서 '숙제예요'라고 했다.

2교시의 시 수업에서 김 선생은 김용택 시인의 <세상의 길가>를 준비했다. 함께 낭송하는 학생들의 소리를 들으며 그녀들이 가졌던 배움의 가난함은 글방을 통해 그녀들의 살이 되고 새벽밥 같이 하얀 풀꽃으로 피어날 거라고 ,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마음속으로 들려주었다.
 
마을 어머니들 모두 젊은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책 속에 있다며 지난 추억을 나누는 발표시간이었다
▲ 윤구병 작가의 <우리 순이 어디가니> 그림책 들려주기 마을 어머니들 모두 젊은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책 속에 있다며 지난 추억을 나누는 발표시간이었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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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교시에 준비한 그림책시간. 윤구병 작가의 <우리 순이 어디 가니>. 김 선생의 구수하고 명확한 이야기 소리는 한순간에 학생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김 선생은 시인으로 등단했고, 2권의 그림 에세이를 출간한 작가로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는 글방 식구 모두를 따뜻한 봄 들판으로 안내했다. 이야기 책을 듣고 난 학생들은 당신들의 어릴 적, 젊을 적 시간을 떠올리며 '다 우리 살던 얘기네. 똑같어 똑같어'를 연발했다.

그림책과 시낭송이 끝난 후 학생들의 첫 수업에 대한 느낌을 묻고 그림으로 표현하자는 의견을 냈다. 첫날이니, 글자보다는 봄을 주제로 말랭이 마을의 풍경을 그려보자고 했다.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던 사람들도 스케치북을 열고 연필을 잡고, 뭔가 스케치를 했다. 나는 그들의 그림을 보며,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를, 제목을 단다면 무엇이라고 쓰고 싶은지를 물었다. 그녀들의 얘기에 일일이 스케치북에 그림 제목을 달아주었다.
  
"너는 그림도 못 그린다면서 그렇게 잘 그리냐. 그래도 초등학교를 다녀서 나보다 낫고만. 나는 진짜 처음 그려본다. 참새라고 그렸는디, 이게 새가 왜 이렇게 생겼다냐. 꽃도 이상하고만. 나는 개나리를 그리고 싶은디, 이파리가 왜 이렇게 흔들거린다냐." 정엽 학생이 말했다.

"어머니, 흔들리지 않는 이파리가 어디 있어요. 어머니가 그린 이파리가 진짜 살아있는 꽃이네. 세상에 꽃들과 나무들은 모두 흔들거리는 것이 진짜예요"라고 격려했다.
 
낭송후 그림으로 말랭이 마을의 꽃을 그리며 <봄이 오는 소리>라고 제목을 붙여이는 정엽님
▲ 김용택 시인의 시<세상의 길가> 낭송 낭송후 그림으로 말랭이 마을의 꽃을 그리며 <봄이 오는 소리>라고 제목을 붙여이는 정엽님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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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할망들이 그린 그림들보다 더 잘 그렸다고, 우리 말랭이 학생들의 시화작품을 배우러 올 거라며 한껏 추임새를 넣었다. 어머니들은 각자의 성격대로 정말 개성 넘치는 그림으로 당신들의 속을 나타냈다. 단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사는 법을 당신들이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 

첫 번째 수업을 마친다고 고하니 반장 덕순어머님의 구령이 나왔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재밌게 살아간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오늘도 나는 말랭이 마을 어른들에게서 큰 선물을 받았다. 그녀들의 삶의 지혜, 그녀들의 건강한 기운, 그리고 그녀들의 배움의 열정이다. 그 선물을 가득 안고 책방에 올라 월명산을 바라보니 곧 피어날 벚꽃들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오늘도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가슴을 톡톡 두드리며 김용택 시인의 시 <세상의 길가>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세상의 길가 - 김용택

내 가난함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배부릅니다.

(중략)

내 서러운 눈물로
적시는 세상의 어느 길가에서
새벽밥같이 하얀
풀꽃들이 피어납니다.

태그:#군산말랭이마을, #동네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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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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