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에 시작해 6월 18일까지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이어진 '원초적 비디오 본색' 전시회

2022년 11월에 시작해 6월 18일까지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이어진 '원초적 비디오 본색' 전시회 ⓒ 성하훈

 
'5만 점의 비디오는 광주에 남을 수 있을까?'
 
지난 18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7개월 동안 이어진 '원초적 비디오 본색' 전시회가 마무리됐다. 2022년 11월 23일 시작된 전시회는 조대영 광주 동구 인문학당 프로그램 디렉터가 소장하고 있던 5만 점의 비디오테이프를 비롯한 자료들이 처음 일반에 공개된 시간이었다. (관련기사: 불법 뛰어넘어 한국 영화 성장 '발판' 된 비디오테이프)
 
오랜 시간 창고에 잠자고 있던 비디오테이프는 뜻밖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7개월 동안 10만 6천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았고,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이 생긴 이래 최고의 흥행 전시회로 우뚝 설 만큼 성황을 이뤘다.

원래 지난 2월까지 3개월로 예정된 전시였으나 관람 행렬이 이어지자 4개월 더 연장됐고, 마지막날까지 열기는 식지 않았다. 원래 예정보다 더 길게 전시 연장된 것도 특별한 일이었고, 덕분에 전시가 열렸던 아시아문화전당의 존재감도 한층 높아졌다.
 
이번 전시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관람객이 모든 세대를 망라했다는 점이다. 한국영화의 한 시대를 상징하는 비디오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에 7080 세대가 움직였다. DVD나 블루레이, 온라인 동영상 등으로 인해 사라진 비디오 시대의 향수를 느끼기 위해 발걸음한 것이었다. MZ세대에게는 보기 힘든 옛 문물(?)을 볼 수 있다는 호기심이 작용한 듯했다. 급속한 변화 속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비디오를 통해 지난 시간을 체험했다.
 
하지만 전시회가 종료되면서 최고 흥행 전시를 만들었던 조대영 디렉터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30년 이상 간직해 온 자식 같은 비디오테이프가 다시 창고로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할지 기로에 섰기 때문이다.
 
긴 시간 창고 안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햇빛을 본 비디오테이프가 계속 생기를 얻기 원하는 것이 조대영 디렉터의 마음이었고, 이왕이면 계속 광주에서 그 가치를 이어가길 바라는 것이 조대영의 염원이었다. 단순히 조대영에 국한된 것이 아닌 광주 영화인들의 공통된 고민이기도 하다.
 
비디오에 담긴 한국 영화운동 역사
 
조대영의 비디오가 갖는 의미는 가볍지 않다. 자체가 광주 영화운동의 출발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활발했던 영화운동은 해방 이후 독재정권 시대를 지나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다시 깨어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였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5.18 광주민중항쟁이었다. 군부독재의 총칼에 유린당한 민중들의 모습에 영화 역시 부도덕한 권력을 향해 날아가는 저항의 도구가 됐다.
 
대표적인 것이 비디오였다. 광주항쟁의 진실이 왜곡되고 은폐될 때 비디오는 언론매체가 하지 못한 일을 감당해 냈다. 1980년대 중반 알음알음 보던 비디오는 광주의 실상을 전달했다.
 
1980년대 중반 광주 영화운동은 민중문화운동에 기반을 두고 5월 항쟁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였던 박관현(전남대 총학생회장) 열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방식으로 전개됐으나, 지속성을 갖지 못하고 약화된 이후, 1990년대 들어 시네마테크 운동이 발화됐다.
 
 1994년 비디오를 활용해 굿펠라스가 개최한 영화제

1994년 비디오를 활용해 굿펠라스가 개최한 영화제 ⓒ 조대영 제공

 
출발은 조대영이 조직한 영화감상 모임 '굿펠라스'였다. 비디오테이프가 하나둘 모아진 시점이기도 했다. 이후 류승완 감독 부인 강혜정(영화사 외유내강 대표)이 활동했던 서울 혜화동의 시네마테크 '영화세상'이 정리될 때 그 비디오테이프를 통째로 인수했다. 비디오대여점까지 운영했던 조대영의 열정 덕분에 사라지지 않고 현재까지 남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조대영의 비디오테이프에는 한국시네마테크 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다. 복제된 테이프를 통해 해외영화를 보고 영화를 공부할 수 있었다. 개봉한 영화를 극장에 가지 않고 빌려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시네필로 불리는 영화마니아가 양산됐다. 1990년대 영화산업에서 비디오 시대는 2차 판권의 대명사였다. 당시 영화 제작 비용에서 비디오 판권료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고, 한국영화 성장의 밑바탕이 됐다.
 
따라서 조대영의 비디오테이프에는 개인을 넘어 광주 영화운동이 담겨 있고, 한 발짝 더 나아가 한국 영화운동의 가치와 정체성이 스며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영화의 자산으로의 비중과 희소성이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다시 창고로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이유다.
 
"어떻게든 광주에 남길 수 있길 원해"
 
전시회 마지막 날인 지난 18일 광주극장 영화의 집에서는 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집담회자리가 마련됐다. 비디오테이프를 어두운 창고나 다른 지역으로 보내지 않고 오롯이 광주의 자산이 되길 원하는 지역 영화인들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머리를 맞댄 시간이었다.
 
집담회 패널로 참석한 김형중 문학평론가는 비디오 컬렉션의 쓰임에 대해 "기능을 다한 비디오는 예술작품으로 바라보는 것이 맞다. 예술작품으로서 비디오의 가치는 상영 목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연구와 전시, 교육 목적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경운 교수(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는 "꼭 영화사가 아니어도 지역의 문화사 안에서 비디오와 비디오문화를 바라볼 수 있다. 1980년대 광주 비디오를 비롯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일어난 수많은 비합법 예술운동의 차원에서 본다면 비디오와 광주는 뗄 수 없는 관계"라며 "실제 이러한 자산이 개인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으로 전환되려면 광주시의 구체적인 담당 부서가 자신의 일로 다가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광주와 전남의 문화예술인들 역시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화경 소설가는 "어디 가서 구하지도 못할 희귀한 비디오테이프들을 광주가 지금 붙들지 못한다면, 광주의 MZ세대는 돈 들이고 품 팔아 다른 곳으로 가서 즐겨야 할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속된 말로 '뭔 짓이라도 지금 당장 해봐야 하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이유진 광주동구예술여행센터장은 "시네필들의 여행 성지 광주를 상상한다"며 "그 중심에 비디오테이프가 놓이는 것도 좋겠다. 다른 곳 어디에도 없는 5만여 편의 비디오 컬렉션을 가지고 해 볼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조대영 광주 동구인문학당 프로그램 디렉터

조대영 광주 동구인문학당 프로그램 디렉터 ⓒ 성하훈

 
조대영 디렉터는 "현재 전시를 마친 방대한 자료들은 사진 촬영 등 전시회를 결산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라며 "당분간은 이 비디오들을 내가 끌어안아야 하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 전시 기간 숱한 화제도 모으고 여러 기관과 기업에서 접촉해 왔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월 한국영상자료원 김홍준 원장이 직접 전시회를 찾아 주의 깊게 살펴보기도 했다. 대형 출판사 등에서 인수 의사를 전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조대형 디렉터는 "형편 상 다른 지역의 제안을 마냥 뿌리칠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어떻게든 광주에 남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개관 90년을 앞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 중 하나인 광주극장이 자리하고 있고, 한국 영화운동의 출발과도 같은 5월 정신이 시작된 곳에서 한국영화의 자산이 오래 유지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조대영 비디오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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