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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식증, 폭식증 같은 하위 질환명으로 더 잘 알려진 섭식장애(Eating Disorders)는 현상으로서의 증상만 놓고 보면 수 세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뿌리 깊은, 인간적인 질환이다. 지난 5년간(2018년~2022년) 섭식장애로 진료받은 인원은 총 5만여명에 이른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숨은 환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모임으로, 지난 2023년 2월 말 국내에서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주최했다. 올해도 두 번째 행사(2/28~3/5)를 준비 중이다. 이번 연재기사를 통해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기획하고 준비해 온 과정과 고민을 펼쳐 보이고, 섭식장애를 경험한 당사자들과 가족 그리고 치료자의 글을 통해 지금-여기에서의 섭식장애의 진실을 밝히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기자말]
나는 올해로 32년 차 간호사로, 섭식장애 식사치료 전문가 겸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정신과에서 성인 환자들을 만나면서 정신질환의 고통과 이들에 대한 사회적 배제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알게 되었다.

통상 이들 환자들의 말은 신뢰나 존중을 받지 못했고 기껏해야 동정 어린 취급을 받을 뿐이었다. 사회에 복귀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고, 가족들로부터 버림받는 이들도 있었다.

섭식장애 병동에서 만난 이들 

이후 성인의 영역을 떠나 소아정신과 환자들을 보게 되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구성원의, 특히나 어린 나이의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 건강하지 못하고 미성숙한 부모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는 적도 많았다. 

그렇게 소아정신과 병동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2001년 말, 우리나라 최초의 섭식장애 입원병동이 개설됐다는 소식이 들렸고, 특수 파트를 경험해 보고 싶었던 차에 섭식장애라는 질병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해당 병동의 2교대 간호사로 지원했다.
 
외래 그룹치료 세션 형태로 진행되는 식사치료 현장에서. 글쓴이 안주란 치료사가 아이들이 아직 착석하지 않은 '슈퍼바이즈드 테이블(Supervised Table)'에 앉아 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 촬영한 사진.
 외래 그룹치료 세션 형태로 진행되는 식사치료 현장에서. 글쓴이 안주란 치료사가 아이들이 아직 착석하지 않은 '슈퍼바이즈드 테이블(Supervised Table)'에 앉아 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 촬영한 사진.
ⓒ 박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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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처음 만난 병동의 환자들. 입원한 환자들은 이십 대의 여자 환자들이 주류를 이뤘고, 하나같이 심성이 곱고, 여리고, 똑똑한 친구들이었다. 자발적 입원보다는 반강제적으로 부모 손에 이끌려서 입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입원실에서 가장 중요한 치료행위는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도록 하는 것. 그렇기에 하루에 각각 세 차례씩 식사와 간식을 먹는 시간은 매우 중요한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식탁에 모여 앉은 여남은 명의 환자들이 전부 식사를 끝내기 전에는 누구도 먼저 식탁을 벗어나면 안 되었고, 몰래 음식을 숨겼다면 그만큼 다시 채워서 먹는 것이 규칙이었다. 이 시간은 먹는 즐거움과 긴장이 공존하며, 치료자와 환자 사이 친절함과 예민함이 공존했다. 먹기를 거부하는 환자들을 나는 단호함과 따뜻함으로 설득하고 지지하며 치료를 이어나갔다. 

얼마 후 나는 평간호사에서 수간호사로 승진을 하게 됐고, 환자들에 대해 더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먹은 음식의 열량을 태우기 위해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고 간호사들 몰래 에어컨을 틀기도 했으며, 토한 뒤에 토사물을 숨겨놓기도 했다. 문 뒤에 숨어서 몰래 운동을 하고, 입에 넣은 음식을 삼키는 대신 넣고 있다가 뱉어내기도 했다. 

환자들은 자기 자신에 관대하지 않았다. 타인에게는 너무나 친절했지만, 자신의 몸이 편안해지거나 맛있는 음식이 입 안에 들어가는 것을 몹시도 두려워했다. 때로는 편하게 누워서 자는 것마저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기도 했다.
 
섭식장애 입원병동 입원실에서 가장 중요한 치료행위는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자료사진).
 섭식장애 입원병동 입원실에서 가장 중요한 치료행위는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자료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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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을 싫어하고,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고, 혐오하다 못해 몸이 없어져 버렸으면 하는 환자들은 주로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완벽함을 추구한다. 계획대로 하루 일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하루는 일찌감치 '망친 하루'가 되어 버린다. 자신을 지나치게 통제하는 신경성식욕부진증(거식증) 환자도 있는 한편, 폭식과 알코올 남용, 폭력적 행동을 통해 자신을 파괴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그녀들을 연민과 애정으로 돌보고 싶었다. 사랑스럽고 아까운 청춘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절박했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는 것이 그녀들에게 도움이 될는지는 언제나 고민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너무 잘 돌봤고, 서로 얘기를 깊이 들어주고 잘 통했고 서로를 궁금해했다.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를 깊이 잘 믿지는 못했다. 조심스럽고 경계심이 많았으며, 자기 영역에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다. 그러니 치료라는 명목으로 영역을 침범하는 치료자를 환영할 리 없다. 

각자가 분투하던 중, 만들어진 지 4년이 채 못 되어 입원병동이 문을 닫고 더 이상 간호사로서 섭식장애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할 기회가 없어졌다. 고민 끝에 나는 입원실에서 진행했던 식사치료를 외래 기반으로 계속 해보기로 결정했다.

입원실에서 식사치료는 섭식장애 치료 과정의 핵심 중 하나다. 식사치료는 환자가 놓지 못하는 음식에 대한 왜곡된 사고와 불안, 공포감, 강박적 규칙 등을 다루고 일반식을 편안히 먹을 수 있게 돕는 인지행동적 접근이자 노출요법이다.

환자가 외래 식사치료센터에 방문해, 치료자의 감독과 지지 하에 식사를 마치는 형태로 입원에 준하는 치료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굶주림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굳히고 완강히 버티는 아이들을 입원이라는 장치 없이, 더불어 스스로 내원하지 않으면 치료가 불가능한 '외래'라는 조건에서 도전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올해까지 20년 넘게 식사치료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치료에 중요한 것들  

환자가 한 수저의 밥을 먹고 한 모금의 물을 마시는 데에만 2시간가량 매달리곤 했다. 그들의 불안과 함께 싸우며 이들을 지지하고, 믿음을 주고, 안정감을 줄 수 있도록 나 스스로를 훈련시켰다. 

섭식장애 치료에서 특히 '조기 개입'은 병의 경과를 크게 바꿀 수 있는 황금률이다. 병과 시달리는 기간이 길수록 증상이 환자와 하나로 합쳐져 분리가 어려워지는 탓이다.

또 회복의 여정은 환자 본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걸 환자 혼자 힘으로만 알아서 헤쳐나가길 바라는 건 비현실적이다. 환자 본인이 감당해야 하지만, 혼자만으론 어렵기에 주변인들의 조력과 사회적 지지 또한 필수적이다. 

내가 섭식장애 임상 현장에 머문 지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학술적이고 통계적인 자료를 내 보일 능력은 아직 없지만, 쌓아온 이 경험들을 바탕으로 섭식장애를 고민하는 이들에 대한 애정과 존중을 지킨 채 앞으로도 이들과 함께하려 한다.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안주란은 2001년 섭식장애 전문 입원병동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면서부터 지금까지 20여년째 섭식장애 환자를 위한 식사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식사치료 전문가다. 현재 서울 백상식이장애센터(02-3452-9700)에서 외래 식사치료를 진행하고 있다.

섭식장애 인식주간 관련 더 자세한 소식은 여기(https://www.instagram.com/rabbitsubmarinecol/)에서 확인가능하다.


태그:#섭식장애인식주간, #섭식장애, #잠수함토끼콜렉티브, #EDAW2024, #인식적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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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로 구성된 비영리임의단체로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을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이름은 '(섭식장애) 환자는 결핍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위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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