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은 흥미로운 소재다. 국가의 녹을 먹는 경찰이라면 감행할 수 없는 일을 탐정은 얼마든지 해낸다. 법의 경계를 넘나들고 절차며 제도에 구속받지 않는 탐정의 자유로운 추리극이 보는 이를 희열로 이끌고는 한다. 셜록 홈즈나 에르퀼 포와로 같은 유명한 탐정 캐릭터는 소설과 드라마, 영화의 경계를 수시로 오가며 여러 편의 시리즈로 이어졌다.
 
그러나 모두가 명탐정 소리를 듣는 건 아니다. 명탐정 캐릭터를 입었다고 해서 유명한 탐정시리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껏 수많은 탐정물이 나왔으나 그중 특별한 명성을 얻은 건 소수에 국한된다. 많은 수가 탐정 개인이 지나치게 활약한 나머지 극의 완성도를 해쳤고, 또 적지 않은 수는 극을 짜임새 있게 만들려다 탐정이 부각되지 못하고 잊히곤 하였다.
 
결국 남은 건 단 몇 명의 탐정, 국적으로 나누자면 영국의 셜록 홈즈와 벨기에의 에르퀼 포와로, 그리고 프랑스엔 바로 이 탐정이 있는 것이다.
 
탐정 말로 포스터

▲ 탐정 말로 포스터 ⓒ 이놀미디어

 
돌아온 탐정의 시대, 하드보일드 말로의 귀환
 
필립 말로는 미국 문학계가 낳은 유명한 탐정이다. 프랑스에서 시작해 영국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추리와 탐정물이 미국으로 건너와 하드보일드풍의 문학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이룬 하나의 결정이라 해도 좋겠다. 한때 영화와 드라마, 문학작품으로 제작된 건 물론이고 여러 작품에서 오마주를 발견할 수 있는 성공한 탐정물이다.
 
마틴 스콜세지가 출세작 <비열한 거리>의 제목을 작명한 것도 필립 말로가 등장하는 소설 글귀에서 착안한 것이고, 술과 담배를 즐기며 트렌치코트에 중절모를 쓴 차림으로 총을 난사하는 영화 속 캐릭터들도 말로가 그 시초라 해도 좋을 정도다. 다시 말해 말로는 적어도 미국에선 홈즈나 포와로 부럽지 않은 존재감을 얻었던 탐정이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은 2020년대 들어 다시금 영화화에 돌입한다. 가이 리치의 영화 시리즈와 영국 BBC의 드라마 시리즈로 선풍적 인기를 끈 <셜록 홈즈>를 시작으로 <나이브스 아웃>의 성공, 나아가 케네스 브래너의 에르퀼 포와로 시리즈의 흥행까지가 할리우드 제작자를 추리물과 탐정물을 훑어보게끔 이끌었던 것이다. 자연히 챈들러의 소설이 검토될 밖에 없었고, 제법 긴 기간 동안 뒷방으로 밀려나 있던 이 낡은 캐릭터가 새로운 세대에겐 신선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받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 명감독이 살려낸 옛 탐정
 
탐정 말로 스틸컷

▲ 탐정 말로 스틸컷 ⓒ 이놀미디어

 
<탐정 말로>가 바로 그 작품이다. '예전에 이런 탐정이 있었다더라' 하고 전설처럼 전해져온 필립 말로가 드디어 당대 배우의 옷을 입고 스크린 위에 등장한다. 초췌하면서도 강인한, 스스로를 망치는 듯하지만 마지막 선만큼은 악착같이 넘지 않는 이 깡다구 있는 탐정을 리암 니슨이 연기한다.

노쇠한 육체를 현란한 카메라 워킹으로 가려가며 찍어냈던 <테이큰> 시리즈와 그 뒤 나온 아류들을 떠올리면 니슨이 비로소 제게 정말 잘 어울리는 배역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연출은 닐 조단이다. 할리우드 키드라 불렸던 1990년대 영화팬에겐 친숙한 이름이다. 다른 작품은 몰라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크라잉 게임>은 그대로 전설이 되었다. 뒤에 나온 영화는 이들의 근처에도 미치지 못했다지만 한때나마 절정에 올라본 그의 이름을 잊지 못하는 영화팬이 많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연출한 작품이 바로 <탐정 말로>인데, 극중 주인공 필립 말로 또한 한 시절을 경찰로 풍미하고 물러난 퇴물 탐정이니만큼 통하는 바가 없다고는 못할 것이다.
   
고구마 넝쿨처럼 꼬리를 무는 비밀
 
탐정 말로 스틸컷

▲ 탐정 말로 스틸컷 ⓒ 이놀미디어

 
필립 말로가 연출하고 리암 니슨이 주연한 영화는 소설 <블랙 아이드 블론드>를 원작으로 한 탐정물이다. 탐정 개인의 캐릭터성에 치중한 탐정물은 추리물로부터 파생된 독자적 장르로 보아야 옳다. 이 영화 또한 그와 같아서 범인과 음모에 치중한 연출보다는 오랜 기간 대중의 시선에서 비켜났던 말로의 캐릭터를 복원하고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영화적 재미에 집중한 작품이 되었다.
 
챈들러의 소설 원작이 인기를 끈 뒤 수많은 작가가 그가 미처 끝내지 못한 시리즈의 이런저런 면모를 다듬어 후속편 격 책을 내었는데, <블랙 아이드 블론드>도 그중 하나다. 말하자면 책은 원작자이자 유명 작가인 챈들러의 소설이 아니다. 벤자민 블랙, 즉 존 밴빌이 필명으로 낸 <롱 굿바이>의 후속편 격 탐정물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 자체는 딱히 걸출하다 할 수 없겠으나 캘리포니아와 영화판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영화화 할 때 그 맛이 더욱 살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탐정이 의뢰받은 작은 사건이 고구마 넝쿨처럼 다른 사건들로 이어진다. 점차 깊고 어두운 범죄가 모습을 드러내며 의뢰인마저 신뢰할 수 없는 순간이 닥쳐온다. 불명예 퇴직 후 연금수령 권한까지 잃어버린 늙은 탐정이 멈추지 않고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어딘지 결연한 기상까지 엿보게 한다.
 
새 시리즈의 서막일까, 늙은 탐정의 퇴장일까
 
탐정 말로 스틸컷

▲ 탐정 말로 스틸컷 ⓒ 이놀미디어

 
챈들러가 낳은 작품에 비해 밴빌의 기량이 영 미치지 못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반세기 전 영화화 된 챈들러의 작품들을 리메이크하는 대신 밴빌의 후속작을 영화화한 선택은 그리 나쁘게만 볼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보다 인지도가 크게 떨어진 캐릭터의 가능성을 살피는 한편으로, 성공할 경우 검증된 명작들을 연달아 영화화할 기회 또한 타진할 수 있는 일이다.
 
초점을 잡지 못하고 분주하게 떠다니는 닐 조단의 연출은 유달리 이번 이야기와 어울리는 듯도 하다. 거듭하여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와 그들이 풍기는 서로 다른 분위기, 백 년 전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각지의 뜨내기가 서로 다른 연유로 사건에 엮여드는 모습이 정돈되지 않은 세계가 주는 묘미를 맛보게 한다.
 
탁월하고 천재적인 기량의 탐정이 수월하게 난제를 해결하는 탐정물에 익숙했던 이에겐 좀처럼 풀리지 않는 매듭을 쥐고 한참을 고생하는 둔탁한 탐정의 모습이 낯설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뒷모습이 친숙하면서도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건 지난 시대 이 작품이 거둔 성취의 비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때로는 독자를 놀라게 하는 특출남보다 애잔한 감상을 일으키는 뒷모습에 더욱 정이 가는 법이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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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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