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12 20:32최종 업데이트 21.08.12 23:11
  • 본문듣기

강예솔 영화감독은 열악한 환경에서 건강한 영화 제작 방식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후원 받은 만큼의 규모로만 영화를 찍는 방식을 시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 유성호

 
예술은 늘 배고픈 직업인가

예술계의 생태계는 늘 가뭄기다. 한 작품이 몇십 억에 팔렸다는 뉴스에 해당하는 예술가는 이미 죽었거나 전체 예술계에 극소수에 해당한다. 대개의 창작자들에게 표준근로시간과 최저임금은 해당되지 않는다. 창작을 위한 '노동'은 쉽게 수치화하기가 어렵고, 많은 창작물은 '상품'이 되기를 거부한다. 예술가 스스로 '노동자'라고 인지하는 경우도 보편적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척박한 예술생태계로 진입하는 많은 젊은 창작자들은 대체 어떻게 먹고 살아야할지 몰라 버티고 헤메다가 예술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예술은 배고프다'라는 사회적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건강하게' 창작하기 위해 새로운 창작 시스템을 고민하는 예술가가 있다. 바로 강예솔 영화감독이다.

스스로 '스토리텔러'라고 소개하는 강예솔 감독은 '감독'이라고만 소개하기에는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다. 영화, 영상, 문화기획, 게임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20대의 젊은 창작자이기 때문이다. 한 대학에서 언론홍보영상학을 전공한 그는 일반적으로 취업준비를 하는 또래의 청년들과는 다르게 창작자의 길을 선택했다.

강예솔 감독은 건강한 창작 문화를 고민하는 동료들을 만나 독립영화제작사 'HER FILM'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영화 창작을 위한 후원을 받고, 받은 만큼 영화를 만드는 '다큰아씨들'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착취'하지 않고 '과노동'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지난 7월 23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예술에도 돈이 필요하다 
 

‘건강한 영화 만들기’ 시도한 강예솔 감독 ⓒ 유성호

 
- 이미 한국에 많은 예술대학도 교육과정이 '취업'을 위한 커리큘럼으로 전환된 지 오래다. 특히 요즘에는 미술, 음악, 영화를 전공하더라도 자신의 진로를 어릴 때부터 철저히 준비해서 치열한 취업의 문을 통과하는 분위기이다. 대학 졸업 시기에 강예솔 감독은 어떠했나?

"취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이지 않다. '가난한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좋아하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고, 다수보다는 소수의 누군가만 알아주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일(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한데 그것을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환경적으로 충분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어려움들을 다 헤쳐나갈 수 있을 만큼 나의 작업이 예술적 가치를 갖는가, 예술을 나의 삶의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조금 더 어렸을 때 작업을 위해 갖고 있는 모든 돈을 끌어다가 다 써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생활비로 쓸 돈이 없더라. 그때 삶이 비참해지면서 엄청난 우울에 빠져들었다. 그러한 작업 방식은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런 방식으로는 지속적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는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절로 떠먹여 주지 않는다.

나는 나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돈을 마련해야 했다. 그때 이후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예술의 가치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나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업'으로 만들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 그래서 강예솔 감독이 참여하고 있는 '다큰아씨들' 프로젝트가 흥미롭다. 사람들에게 후원받은 만큼의 예산으로 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라고 들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영화' 하면 보통 떠올리는 상업영화와는 달리 독립영화 안에서는 (특히 단편영화에서는) 투자를 받기보다는 감독의 사비를 끌어모아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제작비가 부족한 경우가 많고, 스태프들의 인건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왜 발생했는가, 그 구조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고민은 '독립영화 안에서 어떻게 건강한 영화 만들기를 실행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뻗어나갔다. 그 고민과 생각들을 갖고 '다큰아씨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선 '영화감독'이 직업으로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가끔 누군가가 직업을 물어볼 때 영화감독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때가 있다. 직업을 통해서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상업영화 경력이 있지 않는 한 그것을 직업이라고 말을 하기가 민망한 경우가 종종 있다. 영화만으로 생계 유지를 하는 것이 어렵고, 대체로 많은 부업들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큰아씨들' 프로젝트는 2020년에 시작한 '후원받은 만큼만 찍는 영화' 프로젝트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를 소개하고, 그에 대해 동의를 하는 관객들이 있다면, 그 관객들로부터 후원을 받아 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이다.

만약 후원금으로 100만 원이 모였다면 100만 원의 예산으로 영화를 만들고, 400만 원이 모였다면 400만 원의 예산으로 영화를 만든다. 이렇게 '후원받은 만큼만 찍는 영화' 방식을 통해 영화 만들기를 우리의 직업으로 인정받고, 그 직업을 지속 가능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제작 후원 홍보는 우리가 만든 독립영화제작사 HER FILM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진행했다(인스타그램에 홍보물과 계좌번호를 업로드하는 형태). 또 여성영화 온라인 플랫폼인 '퍼플레이'에서도 홍보를 함께 해주었다."
  

건강하게 영화를 만들고자 모인 <허필름>의 창작자들 (오른쪽부터)강예솔, 김소라(가운데 위), 허지예(가운데 아래), 박수안 ⓒ 허필름

 
- '다큰아씨들' 프로젝트를 설명하면서 '우리'라고 했는데, 누구와 함께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

"4명이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 영화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이들을 만나게 된 건 독립장편영화 <졸업>의 현장이었다. 나는 그 현장의 PD였고, 그곳에서 <졸업>의 허지예 감독, 조연출 박수안 감독, 배우이자 감독을 겸하고 있는 김소라 감독을 만나게 되었다.

그중 허지예 감독과는 독립영화제작사 HER FILM을 만들었다. '다큰아씨들' 프로젝트는 HER FILM 안에서 기획한 프로젝트이다. 박수안 감독과 김소라 감독에게 함께 프로젝트를 해볼 것을 제안했고, 그들이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4명의 창작자들이 고정된 역할을 맡기보다는 각자가 돌아가면서 연출을 맡고, 연출이 아닌 나머지 3명은 상황에 맞게 역할을 바꿔가며 영화를 만든다. 매 분기마다 하나의 영화를 만들어, 한 해에 총 4편의 영화를 만드는 프로세스를 기획했다. 기획한 영화마다 각각의 후원을 받고, 제작을 시작한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1년 정도가 지났다. 첫 1년은 여러 가지를 실험해보는 단계였다. 프로젝트의 규칙을 만들고, 그 프로세스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을 처음 시도해본 것이 허지예 감독의 다큰아씨들 시즌0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올해 2월부터 다큰아씨들 시즌1의 영화 <로봇이 아닙니다.>를 내가 연출을 맡아 만들게 되었다. 현재는 시즌 2로 박수안 감독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 강예솔 감독의 시즌1 으로 만든 영화가 궁금하다.

"제목은 <로봇이 아닙니다.>이다. 구글 로그인할 때 익숙하게 볼 수 있는 테스트를 부르는 말인데, 로그인하는 것이 사람인지 봇인지 분간하기 위한 보안 시스템(정식명칭은 reCAPTCHA)이다. 테스트는 그림 퍼즐 같은 형식인데, 제시된 문장에서 자동차를 고르라고 하면 퍼즐 안에서 자동차가 있는 퍼즐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 그 퍼즐 속 그림이 타이어나, 범퍼 같은 자동차의 전체가 아닌 일부일 때가 있다. '그것을 자동차라고 판단하는 것이 맞나?' 라는 질문이 들었다. 덧붙여 최근 몇 년 전부터 '로봇이 아닙니다' 테스트에서 유난히 자동차, 도로와 관련된 이미지가 많이 등장했는데, '로봇이 아닙니다'에 대해 조사하다 보니 해당 테스트의 결과가 자율주행자동차의 AI 학습에 쓰이는 데이터셋으로 활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예솔 감독의 영화 <로봇이 아닙니다.> 스틸컷 ⓒ 강예솔

 
우리는 어떤 대상을 볼 때 저마다의 기준을 갖고 판단을 한다. 우리는 각자 그 기준이 정확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만큼 모호한 것이 없다. 모호한 기준들은 모여 데이터가 되고, 그 데이터들은 AI에게 학습된다. 학습의 과정을 통해 AI가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과정은 오차 범위를 줄이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어떤 확실성의 세계로 나아간 것처럼 느낀다. <로봇이 아닙니다.>는 우리들의 인식과 사고 체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 그렇다면 <로봇이 아닙니다.>는 얼마의 제작비를 모았나?

"후원받은 금액은 440만 원 정도였다. 제작비의 대부분은 인건비로 사용되었다. <로봇이 아닙니다.> 영화는 별도의 현장 촬영을 하지 않고 이미지들을 리서치하여 그것을 변형하고, 재조합하고, 편집하여 만든 영화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영화의 프로덕션 과정은 거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영화에 비해 제작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들었다.

<로봇이 아닙니다.>를 펀딩할 때 HER FILM 공식 SNS를 통해 영화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공유하였다. 그래서 후원 관객들이 <로봇이 아닙니다.>가 어떤 영화가 될지 상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다큰아씨들이 활용하는 플랫폼 특성상 후원자의 대다수는 20, 30대분들이었다."
  
착취하지 않고 창작하는 예술
 

강예솔 영화감독은 <로봇이 아닙니다> 프로젝트를 인스타그램을 통해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제작 과정을 소개하며 후원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 유성호

<다큰아씨들>의 기획으로 후원받은 영화제작비. 주로 인스타를 통해 홍보가 진행되었다. (인스타계정 @herfilmproduction) ⓒ 허필름

 
- 보통 기존에 많이 알려는 펀딩 플랫폼을 사용하기 마련인데, 별도의 펀딩 체계를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펀딩 플랫폼들의 특징은 목표금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프로젝트는 목표금 없이 후원 받은 만큼만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펀딩 플랫폼을 통한 펀딩은 목표금에 도달하지 못하면 실패한다. 실패할 경우 여태껏 모인 모든 후원금이 회수되는데, 그 후원금이라도 받기 위해 무리해서 자비로 모자란 금액을 채워넣는 창작자들이 많다. 결국 만들고 싶은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갭을 채우기 위한 과정에서 다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큰아씨들' 프로젝트는 그러한 플랫폼의 형태와는 다르게 진행해보자고 생각했다."

- 새로운 펀딩 시스템을 만들고 영화를 만들어보니 어떠한가?

"다큰아씨들 시즌1 <로봇이 아닙니다.>의 후원을 진행할 때, 시즌0 <SAVE THE CAT>과는 다르게 작은 금액이더라도 새롭게 유입되는 후원자들의 수가 많이 늘어났다. 플랫폼 특성상 신규 유입이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점점 '다큰아씨들' 프로젝트를 찾아주는 새로운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다큰아씨들' 프로젝트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70~80% 정도는 확신이 생겼다. 우리가 고민을 갖고 진심을 담아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면 지속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 영화는 '산업'이라고 불릴 만큼 손익계산이 철저한 분야이다. 100만 원을 투자했더라도 1000만 원 또는 그 이상의 결과물을 내야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어쩌면 그러한 부분이 영화산업과 영화현상의 사람들을 착취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다큰아씨들' 프로젝트는 받은 만큼 만들겠다는 기획이 굉장히 흥미롭다.

"예전에 다큰아씨들 동료들과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모두 영화를 만드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데,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왜 불행하고 영화를 포기하고 싶게 하는가, 라는 것이었다. 물론 나를 비롯해 다큰아씨들 동료들이 한국에 있는 모든 영화 제작 환경을 경험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영화 현장에서, 창작 과정에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하는 창작가들이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고 창작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우리의 유일무이한 프로젝트로 두려는 욕심은 없다. 여러 창작자들이 '다큰아씨들' 프로젝트를 그것을 모방하고 그와 유사한 다른 플랫폼을 만드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건강한 영화 만들기'라는 다큰아씨들' 프로젝트가 갖는 모토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큰아씨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우리들의 운영방식, 규칙들을 HER FILM 공식 SNS 상에 업로드 해두었다. 그것을 매뉴얼 삼아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고, '건강한 영화 만들기'에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건강하게 창작하기, 즐겁게 창작하기, 과노동하지 않고, 착취하지 않고 창작하기,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창작하기. 이러한 지침들은 비단 '창작'이라는 영역에만 적용되는 것들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일하는 모든 노동 환경에서도 고민되어야 할 것들이다.

'누군가를 착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술계'라고 누군가 당연하게 이야기한다면,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바꿔보겠다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자신이 일하는 창작 환경에서 올바른 가치를 찾고, 동료를 찾고, 실험하고 부딪치는 강예솔 감독의 고민과 활동은 충분히 진지하고 치밀했다.

'요즘 세대는 받은 만큼만 일한다'며 누군가는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기성세대가 만든 '일한 만큼 주지 않는' 생태계에서 젊은 창작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생존 원칙일지도 모르겠다.
 

강예솔 영화감독은 단편영화나 독립영화가 예산 부족으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후원 받은 만큼의 규모로만 영화를 찍는 방식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강 영화감독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하는 창작자들이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고 창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건강한 영화 만들기에 동참해 달라”고 말했다. ⓒ 유성호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