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02 15:17최종 업데이트 24.01.0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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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가요?"

얼마전 상담을 받으러 갔을 때 몇가지 고민을 이야기 하다 이런 질문을 받았다. 잠시 입을 떼지 못하고 고민을 하다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말로 솔직한 답이었다. 무엇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가. 그래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점점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게 어려워진다.


가령 올해 12월 나는 잠시 대만의 가오슝과 타이난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1년 내내 휴가를 제대로 쓰지 못했더니 연차가 열흘 가까이 쌓여 있었다. 바쁜 일이 없으니 휴가를 쓰고는 싶은데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랐다. 해외에 나가겠다는 결정은 따지고 보면 자의로 내린 게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선택한 건 맞지만 '지금 이 시기가 아니면 언제 외국에 가겠냐'는 주변의 말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어디로 떠날 것인가. 후보는 아시아권으로 좁혀졌다. 딱히 그곳을 원해서는 아니었다. 주어진 휴가를 보니 그것보다 멀리 나가는 건 불가능하겠다 싶었다. 태국과 베트남을 생각했지만 이내 후보에서 지웠다. 기온 차가 너무 심하게 나는 휴가지는 다녀왔다간 딱 몸살에 시달리기 좋겠다고 생각했다(슬픈 건 그런 이유로 골랐던 대만 또한 여름이었다는 것이다).

숙소와 항공권을 재빨리 예약했다. 어차피 갈 거라면 늦게 예약해봤자 가격만 비싸질 거란 생각에서였다. 모든 결정이 그런 식이었다. 지금 아니면 해외는 어려우니까. 어디는 너무 더우니까. 예약이 늦으면 비싸지니까.

물론 막상 대만에 도착했을 때는 즐거웠다. 하지만 공항에 가는 아침까지도 원하지 않는 휴가를 떠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12월에 대만으로 떠나는 휴가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거기에 '내가 원해서'는 없었으니까.

막연하고 모르는 건 많을 수 밖에 없다

작년 12월 말에는 고향인 부산에 잠시 다녀왔다. 부산에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한 해 동안 너무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연말이라도 함께 보내자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산에 가길 일주일 정도 앞두고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었다. 가까운 친척이 암에 걸렸다고 한다.

나도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요즘 의사들은 '말기'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고 한다. 같은 암에 걸려도 사람마다 경험하는 게 다른데 괜한 오해를 부를 수도 있어서란다. 친척은 현재 암 4기였다. 친척을 방문하는 날 함께 가는 일행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5기나 6기도 있느냐고. 그런 건 없다고 한다.

'4기 암'에 걸린 사람을 마주하는 건 마음이 복잡한 일이었다. 병에 걸린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익숙한 말이 모두 무력하다. 완치를 희망하거나 일상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말과 같은 것. 의사가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어보니 결론은 이미 내려졌고 아직 모르는 건 시기였다. 아니 사실 다들 생각하는 시기가 있었지만 숨을 죽이고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뿐이었다.

종양 때문인지 항암 치료 때문인지 아픈 친척은 기력이 이전 같지 않았고 무척 마르기도 했다. 그건 단순히 사람이 힘이 없는 것과 달랐다. 헤어지기 전 친척을 끌어안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부산에 올 때 이 사람은 여기 없을지 모른다. 속은 그런데 겉으로는 다음을 기약하는 작별을 했다.

물어도 괜찮지만 답을 구해선 안 되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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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인 중 한 사람과 카페에서 단 둘이 커피를 마셨다. 처음에는 모르는 척 서로의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하지만 방안에 이미 들어온 코끼리가 알아서 사라지겠는가. 동행인은 결국 커피를 마시다 눈물을 흘렸다. 왜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그 친척이 저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왜 하필 가장 정 많고 살갑고 타인에게 잘 베풀던 선한 사람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냐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건 내게 익숙한 질문이기도 했다. 많은 경우 성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건 다른 이들에 비해 더욱 빠르고 자주 부고를 접하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거의 해마다 한 번에서 두 번은 멀고 가까운 사이의 동료들을 보냈다. 이를 악물고 질문했다. 왜 하필 당신인가.

사람이 죽는 데는 분명한 원인이 있다. 암에 걸려서, 우울증을 앓다가, 사고로 혹은 재해로. 많은 경우 이 원인에는 사회적인 문제가 엮여 있기도 하다. 우리가 치열하게 이유와 원인을 질문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질문이 '왜 하필 그 사람인가'가 되면 거기서부터는 딱히 답을 구할 수 없다. 반드시 그 사람일 이유가 없다는 건 역설적으로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건 사람이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다.

동행인에게 그렇게 말했다. 여러 번의 부고를 겪고 나니 알게 된 게 있다고. 이유를 질문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비난해도 괜찮다고. 하지만 절대로 답을 구하려고 해선 안 된다고. 그건 가능한 일도 아닐뿐더러 사람을 망가지게 만들기도 한다고.

막연한 한 해의 시작이라도 외롭지는 않기를 바라며

언젠가 본 영화에서 중년 남성인 등장인물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자기 자신을 더 잘 알수록 세상에 덜 흔들리게 된다고. 어린 나이에 영화를 보던 나는 생각했다. 저 나이를 먹도록 스스로를 모른다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적어도 자기 자신과는 365일을 내내 함께할 텐데.

하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게 된 건, 삶에서 했던 많은 선택 중 사실은 내 욕구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게 정말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고 원하는지 판단할 근거가 별로 많지 않게 된다. 반추를 반복할수록 점점 모호해진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나를 모르는만큼 세상을 잘 알기도 어렵다. 특히 사람이 나고 죽는 것과 관련하여서는 더욱 그렇다. 원리는 알 수 있지만 결과는 결코 모르는 가장 대표적인 영역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건 늘 반복되는 일이다. 마치 해가 지면 다시 달이 뜨는 것처럼. 하지만 누가 우리에게 오고 언제 떠나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 일이 정말로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람이 알 수 없는 영역에 답을 구하고자 골몰하면 현실을 살아갈 수 없다. 필연적으로 상처를 입고 무너지게 된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소리치는 것과 같다. 그런 맥락에서 내게 겸손은 일종의 생존전략과도 같다. 모를 수 밖에 없는 게 있다면 그 영역의 순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자 한다. 아플수록 무릎을 꿇어야 하는 일은 분명히 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나면 정말로 고개를 들어야 할 곳이 어딘지 보인다.

2023년이 끝나고 2024년이 왔다. 시간과 날짜는 인간이 정한 것이기에 세상은 그와 무관하게 움직인다. 2023년의 막바지까지도 세상은 시끄러웠고 누군가는 더욱 심란한 연말을 보냈을 것이다. 연말의 여파가 이어지며 누군가는 심란한 새해를 시작하고 답이 없는 질문을 품은 채 방황할지도 모르겠다. 원하지 않는 방식의 마무리였고 시작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전할 확신이 담긴 위로는 없다. 무엇도 어떻게 되리라 약속할 수 없으니까. 다만 분명한 건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헤매겠지만 결코 홀로 그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도 사연도 각각 다를지라도.

한 해의 시작이 막연하고 심란할지라도 외롭지는 않기를 바란다. 조금만 더 함께 마음을 추스르고 용기를 내보자. 그리고 견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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