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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로화 결제가 도입된 지난 `99년 초 은행에서 갓 나온 빳빳한 유로화 수표를 파리의 샤를르 드골 공항에서 환전하는데 옆에 서 있던 일본인이 신기한 듯 물끄러미 필자를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유로화 도입이 결정되기는 했지만 당시만 해도 과연 유럽 시민들이 당초 약속대로 결국 지갑에 유로화 지폐를 지니고 다닐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유로화의 전면적인 통용 가능성에 회의적인 시각은 주로 미국과 영국에서 나왔다. 주로 월스트릿 저널을 비롯한 미국의 보수적 언론 그리고 공화당 주변의 씽크탱크들은 공.사석을 가릴 것 없이 유로화 도입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곤 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경제여건도 천차만별인 유럽의 각 나라가 같은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난센스요 황당한 공상에 불과하다는 자신만만한 분석이었다.

물론 이들의 분석이 전적으로 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유럽 내에서도 이런 시각에 동의하는 사람들 또한 다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예측을 우습게 뒤집을 수 있을 만큼 단일통화를 고대하는 유럽인들의 갈망 역시 강력했다는 것 역시 엄연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버스요금을 내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고 샌드위치 값을 치르고… 아침저녁으로 유로화를 사용하고 주머니 속에는 유로화 동전이 항상 찰랑거리지만 똑같은 동전을 독일,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등 유럽대륙의 모든 시민들이 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신기할 때가 많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마다 환전 먼저 하느라 바빴던 그간의 기억이 떠올라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유로화 도입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던 미국의 그 많은 회의론자들은 이제 무슨 말을 할까? 아마도 그들은 이제 말을 바꾸어 유로화 도입은 애초에 잘 못된 결정이었으며 유럽은 이 역사적인 오판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자신들의 그릇된 예측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사과도 없이…

기실 이들 분석가들의 확신에 찬 예측은 정세파악에 근거한 냉철한 분석이라기보다는 미국의 패권에 대적할 만한 수퍼 파워로 등장하는 유럽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과 불안함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들 소위 전문가 그룹은 자신들의 이념적 성향에 경도되어 실상을 직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들의 잘 못된 예측으로 정작 그들의 아군인 공화당을 비롯한 미국 보수세력의 정확한 국제정세판단에도 커다란 혼선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2.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가 진통 끝에 단일화 세부절차에 합의하고 결국 TV토론까지 무사히 마쳤다. 하지만 후보단일화의 성사여부에 대해서는 주요 언론을 비롯해 정치분석가들 대다수가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도 곳곳에 지뢰가 묻혀 있어 두 후보가 애초 합의한대로 단일후보를 선출하고 별 탈 없이 대선에 임할 수 있을지는 사실 아무도 자신 있게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1주일 전에 비해서는 그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제 TV토론까지 치른 마당에 이런 저런 구실을 들어 합의를 파기하는 후보는 치명상을 입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단일화가 이 정도로 급진전을 보이는 데 가장 당황하고 있을 사람들은 물론 한나라당 측이겠지만 한나라당 주변의 보수 언론들, 그리고 비슷한 성향의 정치분석가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들 보수언론과 주변의 소위 정치 전문가들이 그 동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두 후보의 이념적 성향과 성장배경이 천양지차인 만큼 후보단일화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쳐왔기에 그 충격이 더욱 클 것 같다. 반 이회창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표가 전체 유권자의 무려 65%에 달하는 데도 사태의 급 반전 가능성을 가볍게 보았다면 대세론의 주술에 빠진 범 보수세력의 안이함에 따른 자업자득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만약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의 참모들이 이들의 분석을 진실로 믿고 그에 따라 선거 전략을 준비해 왔다면 느닷없이 변한 대선환경에 새롭게 대응할 할 시간이 매우 부족할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정치적으로 야당에 편향된 언론과 분석가들의 희망사항에 가까운 예측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결국 부메랑을 맞은 셈이 된다.

언론이나 정치 분석가라고 해서 정치.이념적 편향을 지녀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고 그것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냉철해야 할 상황분석까지 한쪽으로 치우친다면 그것은 분명히 별개의 문제다. 정치.이념적인 선택과는 상관없이 언론과 정치분석가는 자기가 보고싶은 것 만 보거나 정치적 분석에 개인적인 희망사항을 적당히 뒤섞는 치명적인 오류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무현 후보나 정몽준 후보를 지지하는 언론과 정치 분석가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잘못된 분석과 상황판단은 자기가 지지하는 정파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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