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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도솔 2002)는 제목만큼이나 풋풋하고 따스한 이야기다.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야생초들의 맛과 향기 때문에 풋풋하고, 구절마다 배어 있는 저자의 야생초에 대한 진실한 관심과 사랑 탓에 따스하다.

평범한 학생이던 그가 학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끌려간 회색의 차가운 밀실에서 발견한 것은 이름모를 야생초들이었다.

"감옥 마당에서 무참히 뽑혀나가는 야생초를 보며 나의 처지가 그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밟아도 밟아도 다시 살아나는 야생초의 끈질긴 생명력을 닮고자 하였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잡초'이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무진장한 보물을 보며,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신뢰하게 되었다."
- 저자의 서문 중에서


이야기는 92년 안동교도소 시절 자그마한 야생초밭을 꾸미고 뿌듯해하는 저자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동안 내가 여기저기서 떠옮겨 심은 것을 적어보겠다. 냉이, 제비꽃, 괭이밥, 씀바귀, 마디풀, 방가지똥, 지칭개, 개쑥갓, 황새냉이, 벼룩나물, 명아주, 쑥, 사철쑥, 상치, 꽃마리, 그리고 씨를 심어 싹을 틔운 나팔꽃과 사과나무, 뽕나무……."

교도소 안에서 이만한 밭을 일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토질이 비옥하지 않은데다 어렵사리 얻은 모종들을 "생쥐란 놈들이 잎을 모조리 갉아먹고 밑동만 삐죽이 남"겨두기도 하고, 다른 재소자들이 몰래 열매를 따버리거나 장난삼아 야생초를 뽑아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교도소 구내 청소를 하는 사람들.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는 후미진 곳에 나 있는 풀마저 깡그리 밀어버리"는 통에 저자의 야생초밭은 여러번 인재(人災)를 겪어야 했다.

이래 가지고서야 재소자들이 마음을 여유롭게 먹을 수 있겠느냐고, 저자의 불평은 대단하다. 교도소가 죄인을 순화시키는 곳이라면 건물과 그 대지도 그래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이제 여기에 남은 색깔은 회색과 땅색 그리고 우리가 입은 옷 색깔인 파란색밖에 없다. 아무리 이 셋을 섞어보아도 따뜻하고 안온한 느낌은 건져낼 수 없을 거다.… 어떻게 하면 더욱 삭막하고 직선과 직각만이 판을 치는 환경이 되게 할까 하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는 것같아."

모종을 가지고 오는 것도 간단치 않다. 텃밭을 가꾸는 다른 공장에서 얻거나 담당 교도관, 먼저 출소한 동료를 통해 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평소에 사람들을 잘 사귀어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도 아니면 직접 구하는 수밖에 없다.

일 년에 한두 번씩 사회 참관을 나갈 때 길가에 핀 야생초들을 퍼 담아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늘에서 쉬거나 간식을 먹을 동안 땡볕에서 부지런히 야생초를 캔 덕분에 자그마치 100여종에 가까운 야생초를 가꾸어볼 수 있었다.

"질경이는 모조리 황갈색 반점이 드는 병에 걸려 채취 불가능. 꿀풀 하나 정도가 겨우 수지를 맞출 만한데, 수량이 많질 않아 걱정. 박토에 난 풀들을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하나하나 뜯어내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겠니? 어떻게 한두개나마 건져볼까 해서 운동화에 짓밟힌 질경이 이파리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야생초는 그에게 삶이자 세상이었고 희망이었던 것이다. 장난삼아 코 밑에 붙인 강아지풀에서 삶의 평형감각을 발견하고, 잘난 것 못난 것 할 것 없이 어우러져 있는 자연을 보며 교만과 생존경쟁에 찌든 인간 세상을 본다. 화단 구석에 수줍게 핀 주름잎꽃을 보면서는 묵내뢰(默內雷:겉으로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속으로는 우레와 같다)의 미덕을 깨닫는다.

"평화란 절대적 평온, 정지, 무사, 고요의 상태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부단히 움직이고 사고하는 동적평형 상태라는 것이지.…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저 작은 꽃을 피워내가 위하여, 화단 구석의 내밀한 공간 속에 의젓하게 자리하기 위하여 쉼없이 움직이고 있는 주름잎의 내면을 그려본다."

뿐만 아니다. 야생초는 교도소의 생기 없는 식단에 질린 저자에게 입맛을 불어넣어주는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씀바귀, 뽀리뱅이, 조뱅이, 방가지똥, 박주가리 덩굴 등 되는 대로 솎아서 물김치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상큼한 나물무침을 만들기도 한다. 야초차를 만들어 향과 맛을 음미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

뉴욕 소재 사회과학대학원에서 제3세계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학원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후에 그 사건이 국가기관에 의한 조작극임이 밝혀져 1998년에 풀려났다. 13년 2개월 동안의 수감 생활 동안 그는 그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사소한 물건이나 벌레, 풀 같은 존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감옥 안에 야생초 화단을 만들어 100여종에 가까운 풀들을 심어 가꾼 것 역시 그러한 관심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99년부터 2년 동안은 유럽에 머물며 생태농업을 공부하면서 유럽의 대안공동체들을 살펴보기도 했다. 이즈막 그는 활발한 저술과 강연 와중에 청년시절부터의 오랜 숙원이었던 생태공동체의 실현에 온 열정을 쏟고 있다. 2001년부터는 생태공동체 연구모임(www.commune.or.kr)을 이끌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수년의 수감 생활 동안 터득한 차만드는 비법을 슬쩍 귀띔해주기도 한다. 우선 바짝 말린 국화꽃 대여섯 송이와 산국꽃 한두 송이, 아니스 씨앗 두어개를 망사주머니에 넣고 물을 넣어 끓인다. 한번 팔팔 끓으면 난로 뚜껑을 덮고 약한 불로 20분 정도 더 끓인다. 다 끓인 다음 잘 말린 쑥 한 잎을 넣어 충분히 우려내면 완성. 그는 이렇게 하면 한꺼번에 네 가지 맛이 느껴지는가 하면 어떤 때는 두 가지 혹은 세 가지의 맛이 섞여 새로운 맛을 내기도 한다고 신이 나서 설명한다. 이런 야생초의 절묘한 맛을 모르는 현대인들도 그는 마땅찮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얄팍한 입맛을 위하여 원래의 야채가 가진 여러 가지 영양소와 맛을 제거해버리고 특정의 맛과 영양소만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래놓고 요리할 땐 그 위에 갖은 양념을 다 뿌리고 또 영양을 보충한다고 각종 비타민제를 따로 먹고 있다. 우습지 않니? 이것이 문명이다."

저자는 자연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 야생초를 '잡초'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중심적인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흔히 잡초를 '원치않는 장소에 난 풀' 혹은 '잘못된 자리에 난 잘못된 풀' 등으로 정의를 하는데, 이러한 인식에 의해 엄청난 양의 농약과 화학비료가 식물과 우리 몸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생태계의 다양성도 해치게 되었다.

지구상에 알려진 식물종 35만여종 중에서 인간들이 먹는 3천종을 제외한 34만 7천 종류의 식물이 잡초라는 이유로 없어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3만종 가량 재배되던 벼의 종자가 요즘은 12가지에 그치고 있다.

이른바 녹색혁명이라고 불리는 이같은 변화는 사회 시스템도 변화시켰다. 선진국이 개발한 다수확품종 하나를 재배하기 위해 돈이 없는 제3세계 정부는 빚을 져서 비료나 농약, 관개수 정비, 농기계 도입 등을 추진해야 했다. 결국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빈농의 비율은 점점 늘어났고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나라들이 빚더미에 올랐다.

그는 이러한 이유에서 잡초라는 말 대신 야초(野草)라는 말을 쓰자고, '야생초와 더불어 짓는 농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야생초와 함께 농사를 짓게 되면 첫째 종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고 둘째 토양침식과 오염을 방지할 수 있다. 셋째 이산화탄소 증가를 억제할 수 있으며 넷째 환경과 경관이 좋아진다. 다섯째로 먹거리가 다양해져 영양원이 풍부해지며 여섯째 다양한 생필품 재료를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야생초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 조화로운 삶, 삶의 총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저자는 일곱가지 장점을 일일이 꼽으며 생태주의와 공동체의 중요성을, 상업주의로부터의 농업 해방을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이야기가 '이상주의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인류의 역사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상주의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 이상주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타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지지 않고 역사발전을 해왔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다.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는 이상주의자의 이상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더 더욱 싱그럽고 풋풋하다. 비가 잦은 여름 막바지, 풋풋한 풀향기와 정겨운 사람냄새로 가득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야생초 편지 - 출간10주년 개정판

황대권 글.그림, 도솔(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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