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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공사
올더스 헉슬리가 “영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경전”이라고 찬양했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동양의 모든 유적보다도 얼마나 더 멋있는가?”라고 감탄해 마지않은 책이 있다. 바로 인도의 위대한 힌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이다.

어찌나 이 책에 매료되었던지 소로우는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던 2년 간의 숲속 생활은 물론이고 45세의 길지 않은 자신의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평생을 두고 <바가바드 기타>를 곁에 놓고 읽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인 <월든>에서 보게 되는 다음의 글은 <바가바드 가타>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아침마다 나는 <바가바드 기타>의 경이로운 우주 생성적인 철학에 나의 지성을 목욕시킨다. 이 책이 쓰여진 후 신들의 시대는 갔으며, 이것에 비하면 우리의 현대세계와 그 문학은 왜소하고 보잘것없다. 그 철학의 숭고함이 우리의 개념과는 너무나도 멀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우리의 전생에 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가 살던 19세기의 세계와 문학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마저도 <바가바드 기타> 앞에서는 왜소하고 보잘것없다고 말하고 있는 소로우의 이 진술은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겉으로는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속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아니, 더욱 풍요로워지고 찬란해진 물질세계 속에서 우리의 지성과 영혼은 오히려 점점 더 어두워지고 가난해져 왔다는 것이 보다 솔직한 고백일 터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이렇게 눈부신 무명(無明) 속에서 갈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큰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는 책이다.

700구절로 된 '신의 노래'인 <바가바드 기타>는 사촌들과의 전쟁을 앞두고 갑자기 삶과 죽음에 대한 회의에 빠진 한 왕자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왕권을 되찾기 위해 사촌 형제들과 큰아버지, 그리고 어릴 적 스승과 친척 어른들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격전의 날 아침에 왕자 아르주나는 고뇌에 찬 질문을 던진다.

“크리슈나여! 도대체 삶이 뭐길래 이런 전쟁을 해야 된단 말입니까?”

<바가바드 기타>는 이 질문에 대한 크리슈나의 대답이다.

힌두교에서는 이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Brahman)이 현상 세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인격신을 이슈바라(Īśvara)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슈바라의 창조하고 유지하고 해체하는 세 기능을 다시 인격화하여 각각 브라흐마(Brahma), 비슈누(Visnu), 시바(Śiva)라고 부른다.

<바가바드 기타>는 현상 세계에서의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신성의 세 측면 중에서 현상 세계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비슈누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비슈누는 세상에서 신적인 진리가 쇠퇴할 때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온다고 하는데, 아르주나 왕자의 전차몰이꾼으로 등장하여 그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크리슈나는 바로 비슈누 신의 여덟 번째 화신이다.

따라서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가 아르주나 왕자에게 전해주는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힌두교의 전통적인 입장을 따르고 있다. 즉, 자신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인 아트만(ātman, 참자아)을 깨닫고 그 아트만과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神性)과의 합일을 위하여 끊임없는 요가(yoga) 수련으로 정진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크리슈나는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요가의 세 가지 방식, 즉 카르마 요가(karma yoga, 행위의 길), 바크티 요가(bhakti yoga, 헌신의 길), 즈냐나 요가(jñāna yoga, 지혜의 길) 중에서 전통 힌두교에서는 차원이 낮은 것으로 평가되는 카르마 요가와 바크티 요가에 대해서 오히려 더 많은 강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성적인 사고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적합한 즈냐나 요가 대신에 감성이 풍부하고 활동성이 강한 사람들을 위한 바크티 요가와 카르마 요가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가바드 기타>가 일상적인 ‘이 세상에서의 삶’에 충실하면서 ‘영적인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보통사람들을 위해 쓰여졌음을 말해준다. <바가바드 기타>가 시대와 종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영향을 주는 대중적인 책이 된 것은 여기에 힘입은 바 크다.

<바가바드 가타>에 나오는 힌두교의 우주관은 기독교의 우주관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지만 크리슈나가 전해주는 가르침은 놀랍게도 예수의 가르침과 많이 닮아 있다. 그래서 혹자는 크리슈나를 ‘인도의 그리스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대 순서에 맞추어 말하자면 크리슈나가 먼저이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를 ‘팔레스타인의 크리슈나’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라고 역자는 지적하고 있다. <바가바드 기타>가 쓰여진 연대가 대략 기원전 4, 5세기 무렵이라는 데에 학자들 간에 큰 이견이 없으니 말이다.

따라서 150년 전 청교도의 나라 미국에서 소로우가 매일 아침 읽었던 책이 <성경>이 아니라 <바가바드 기타>였다는 사실은 그렇게 놀라워 보이지 않는다. 그는 <바가바드 기타>에서 ‘신학’이 아니라 ‘철학’을 읽었던 것이 분명하며, 그 철학은 공허한 말놀음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과 삶에 바로 닿아 있는 ‘삶의 철학’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가바드 기타>에서 배운 삶의 철학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대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렇듯 <바가바드 기타>는 한 번 읽고 책장에 던져 놓을 책이 결코 아니다. 침대 머리맡이나 화장실에 두어 매일 조금씩 읽으며 그 깊은 뜻을 음미하고 사색하면서 평생의 반려로 삼을 만한 책이다.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바가바드 기타>를 옆에 두고 살았던 소로우처럼 말이다.

접어놓은 페이지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한 사람은 ‘아홉 개의 문이 있는 도시’인 육체 안에서 평안하게 거한다. 그는 육체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종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육체를 움직이는 주인이다. 그는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하도록 강요하지도 않는다.(80쪽에서)

마음이 그대의 유일한 친구이자 적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그대가 곧 참자아라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고 그대를 죄와 허물이 많은 존재로 깎아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에고 의식을 극복한 사람에게는 마음이 자신의 친구이나, 자기 내면에서 참자아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마음이 그를 괴롭히는 적이다.(90쪽에서)

몸의 고행은 이런 것이다. 신과 지혜로운 사람과 영적인 스승을 섬기는 것, 청결함과 단순함과 절제와 비폭력, 이런 것이 몸의 훈련이다.
말의 고행은 이런 것이다. 위로하는 말과 진실되게 말하는 것, 친절하고 힘을 주는 말을 하는 것, 규칙적으로 경전을 낭독하는 것, 이런 것이 말의 훈련이다.
마음의 고행은 이런 것이다. 고요함과 부드러움과 침묵을 지키는 것, 자기를 제어하고 순수한 마음을 갖는 것, 이런 것이 마음의 훈련이다.(227-228쪽에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모든 행위를 포기하고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포기는 자기가 바라는 결과를 기대하는 행위, 곧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다. 행위의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은 즐거움과 괴로움과 그 중간, 이 세 가지 열매를 번갈아 맛본다. 그러나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한 사람은 행위나 행위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초월적인 자유를 누린다.(239쪽에서)

바가바드 기타

함석헌 옮김, 한길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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