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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머니스트
"당신은 나를 너무 몰라!"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했지만 신혼 첫날밤부터 말다툼을 벌이게 된 신부가 신랑에게 실망스럽다는 듯이 내뱉을 법한 이 말. 우리는 <시간의 발견>이라는 제목의 책 앞표지에서도 이 말을 만나게 된다. 책의 제목 밑에 이제 막 책을 펼쳐보려고 하는 독자를 향해 마치 소리치듯 적혀 있는 이 말은 따라서 '시간'이 '인간'에게 건네고 있는 말이다.

귀로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제 나의 눈이 향하는 곳은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천정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걸작 <천지 창조>에서 빠져나온 신의 집게손가락이다. 그 손 끝에 닿을 듯 말 듯 있어야 할 아담의 집게손가락은 보이지 않는다. 뒤표지에 그려진 손은 그 형태로 보아 앞표지의 신의 손을 반대 방향으로 그린 것이 틀림없어 보이니 결국 책의 시작과 끝이 모두 신의 손 안에 들어있는 셈이다.

이것은 결국 시간은 인간의 손으로는 잡을 수 없는, 다시 말해 인간의 머리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며 시간의 실체와 본질은 신의 영역 안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책의 제목도 인간은 단지 시간을 발견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겸손하게 <시간의 발견>이라고 붙인 것일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생물학자, 천문학자, 역사학자, 지질학자, 심리학자, 철학자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여덟 명의 필자가 펼쳐 놓고 있는 시간에 관한 열한 가지 관점은 여러 측면에서 바라 본 시간의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다. 하지만 시간의 실체와 본질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은 채 풀리지 않고 있다.

그렇더라도 <시간의 발견>을 읽는 재미는 만만치 않다. 역자는 이 책을 두고 '시간에 관한 종합백과사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시간의 도서관'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이 책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시간에 관한 풍부한 지식과 새로운 통찰을 던져주고 있다.

그 '시간 도서관'의 맨 앞자리에 놓여 있는 것은 이른바 '생체 시계'라고 불리는 생물학적 시간이다. 해가 뜨고 짐에 따라 꽃잎을 여닫는 식물들과 때가 되면 알아서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뿐만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이 나름대로의 생체 시계를 자신의 몸속에 지니고 있다고 한다.

또한 그것이 지구와 달과 태양의 천체 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경이롭고 신비로운 일이다. 지금 이곳의 내 몸 속에 흐르고 있는 시간이 1억5천만km나 떨어져 있는 태양의 빛에 감응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선사 시대의 사람들은 태양이 뜨고 지는 방향으로 거대한 석조 건축물들을 세움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흔히 잊고 지내는 이러한 경이감을 매번 새롭게 경험했다. 우리가 보기에 공간과 시간은 별개의 추상적 실체이지만, 선사 시대 사람들에게는 공간과 시간은 서로 얽혀 있는 것이어서 원형 석조물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면서 변함없이 오고가는 계절의 주기적 순환을 인식했던 것이다.

동양이나 중남미의 문명권에서는 이러한 순환적 시간관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보급과 더불어 시간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선형적 시간관이 점차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를 거쳐 재림으로 나아가는 선형적 '시간의 화살'이 이제 인간의 삶을 관통하게 된 것이다.

현대 기술 문명의 기반을 이루고 있기도 한 이러한 선형적 시간의 세계에서는 시간을 알기 위해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 볼 필요가 없다. 초 단위로 정밀하게 움직이는 시계침의 운동이 시간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라고 여겨졌던 천체의 운동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달력에 남아 있는 천체의 이름은 순환적 시간관이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20세기에 들어서 과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수십억 년을 넘나드는 먼 시간으로까지 여행이 가능해짐에 따라 시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와 상상력은 전례 없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거의 무한이라고 여겨질 정도의 광대한 시간의 심연 속에서 성서적 전통에 입각한 유한한 선형적 시간관은 큰 도전을 받게 되었다. 불과 400년 전까지만 해도 널리 인정되었던 지구 나이 6000년은 45억5천만 년이라는 엄청난 지질학적 시간에 묻혀버렸고 이제 인류는 그보다 더 오랜 우주의 나이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빅뱅이 이루어졌던 우주 최초의 순간을 발견하기 위하여 다시 하늘을 바라보게 된 인류가 마주치게 되는 것이 1600년 전에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고백록>이라는 사실은 놀랍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책에서 시간의 본질을 논의하면서, 신이 우주를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우회적으로 밝힘으로써 우주의 창조(현대 우주론에서는 빅뱅)와 더불어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그는 현재라는 시간이 무한히 작은 단위로 쪼개진다면 결국 현재는 시간을 점유하지 않는 순간이 될 터이고 이에 따라 현재와의 관계로서만 존재하는 과거와 미래의 실재 역시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즉 시간을 측정 가능한 단위로 매기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묻는 자에게 설명하려면 나는 모르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시간은 본질적으로 심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기와는 다른 기억과 내적 척도를 가진 타인에게 시간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는 뜻일 것이다. '시간 도서관'의 맨 마지막 서가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이 시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이다.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시간은 항상 같은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의 길이는 얼마일까? 시간의 흐름은 역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렇게 역행하는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그리고 과거로 흐르게 될까? 시간이 빅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면 그 끝도 있는 것일까?

지난 3천년 동안 철학자들을 난감하게 만든 이 모든 수수께끼들은 <시간의 발견>이라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는다. 그래서 책장을 덮고도 내 귀에는 "당신은 나를 너무 몰라!"라는 소리가 여전히 쟁쟁하게 들린다.

아마도 시간이란, 방향이라는 차원에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차원이 하나 더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미지의 차원이 이 책의 표지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신의 손안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 시간과 공간을 함께 묶어서 생각하는 우리의 인식 태도는 시간 속에 깃든 미지의 차원을 의식한 데서 온 무의식적인 버릇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시간의 발견>은 그 미지의 차원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가 꼭 건너야 하는 징검다리이며, 시간에 관하여 지금까지 이루어진 각 분야별 성과들을 모아 놓은 '시간의 도서관'이라 할만한 책이다.

시간의 발견 - 휴대폰 소녀 밈의

조정화 글, 퍼니이브 그림, 세종서적(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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