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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의 학문, 특히 인문학은 몇몇 국학분야를 제외하고 외국의 이론을 수입-모방-재생산하는 하청을 주된 작업으로 간주해왔다. 인터넷이나 이메일과 같은 신소재가 대중화되기 전에는 해당국가에 거주하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은 연구자들이 신속한 정보수집과 해석능력을 바탕으로 학문적 경쟁력을 보장받았다. 과학기술문명의 신속한 발전과 보급으로 오늘날 그런 정신적인 자살행위는 많이 사라졌지만, 인문학의 대외종속은 여전하다.

이런 측면에서 살필 때 <고대문명교류사>는 매우 뜻 있는 저작이다. 우리에게 간첩 '깐수'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필자 정수일씨는 남북분단의 현실을 온몸으로 드러내면서 짧지 않은 감옥살이를 체험한 우리 현대사의 살아 있는 증인이기도 하다. 그런 필자가 우리 인문학의 자생성을 강조하면서 집필한 책이 바로 <고대문명교류사>이다.

"이제 우리도 학문, 특히 인문학 분야에서 남의 뒤따름만이 아니라 무언가 앞섬이 있어야 하겠다는 시대적 사명을 깊이 간직하면서..." (9쪽)

식민지 조선 청년의 부끄러움과 자의식을 아름답게 노래했던 윤동주의 시처럼 그의 희망이 미래의 빛나는 등불로 자리할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남한 인문학자들의 숙원이자 삶의 최대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제목에 드러나 있듯이 <고대문명교류사>는 매우 방대한 시간과 공간을 담고 있다. 인류가 태동한 시원(始原)에서 기독교의 동방전래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대와 이른바 구대륙이라 불리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3대륙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을 망라하고 있음이 그 까닭이다.

필자가 이 저작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점은 '서구문명 중심주의'에 기초한 '선진서양' 혹은 '후진동양' 따위의 그릇된 발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등으로 촉발된 서양의 기술문명발전이 동양의 그것을 앞지른 시기가 겨우 200년 남짓이라고 판단하는 필자는 오천 년 인류문명사에 비출 때 그것은 '새 발의 피'라고 사유하는 것이다.

나아가 문명의 지속적인 교류를 고려하면서 서로 다른 문명의 생성양상과 진화과정에 관심을 맞추어야 한다고 필자는 지적한다. 따라서 '동과 서', '후진과 선진'의 이분법적인 분류는 인류문명을 올바르게 개관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대문명교류사>를 관류하는 기본적인 관점은 문명의 부단한 교류이다.

"인류는 출현할 때부터 비록 원시적이지만 문명을 창조하고 향유하였으며, 접촉과 교류를 통해 그 영역을 부단히 확대하고 다양화해왔다." (43쪽)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 문명의 발원과 진화 및 사멸의 도식이 아니라, 이질적인 문명들의 지속적인 만남과 교류의 관점으로 문명사를 통관하는 자세가 이 저작에는 수미일관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문명의 교류현장과 한반도를 연결함으로써 서구의 인문학 체계에서 그 동안 등한시되어왔던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재조명하는 혁신적인 시도를 꾀하고 있다

아울러 <고대문명교류사>는 지금까지 문명사 연구에서 변방에 위치하고 있던 이민족의 역사적인 의미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스키타이'와 '흉노'로 대표되는 유목 기마민족의 역사적인 발자취와 문명을 유라시아 전체의 역사적 흥망과 결부하여 장쾌하게 논하고 있다.

제6장 '로마와 한의 교류'에서 필자는 헬레니즘 문화의 역사적인 의미를 보다 확장하여 규정한다.

"헬레니즘 문화는 고전 그리스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로 이어져온 고대 오리엔트 문화와의 첫 만남이며, 또한 인도나 중국의 고대문화와 서방문화와의 접촉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동서문명 교류사에 중요한 한 장을 열어놓았다. 이때까지 아시아와 유럽은 페르시아의 매개로 간접관계만을 맺어왔으나 이제는 직접관계로 변하였다." (362쪽)

따라서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유럽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축을 이루고 있던 헬레니즘을 중국문화와 접목함으로써 문화에 대한 우리의 안목과 관점을 한 단계 고양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필자는 '실크로드'를 논하면서 고대의 실크로드 개념을 부단히 확장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독특한 개념을 창출한다.

"실크로드가 문명교류의 통로에 대한 상징적인 지칭이라고 할 때, 초원로와 오아시스 육로, 해로의 3대 통로는 그 간선에 불과하다... 요컨대 실크로드는 3대 간선과 5대 지선을 비롯해 수만 갈래의 길로 구성되어 있는 범세계적인 망상적 (網狀的) 교통로임을 인식해야 한다." (611-612쪽)

이런 입장에서 필자는 한반도와 실크로드가 매우 깊은 연관이 있음을 주장하면서 한반도에서의 '실크로드학'을 주창한다.

"한반도 역사 전개과정, 특히 서역과의 교류사를 추적해보면 한반도도 예외 없이 시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종 실크로드라는 대 교통망의 한 고리로 그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응분의 역할과 기여를 하였음을 긍정하게 된다. 따라서 실크로드의 대한 (對韓) 연계양상을 구명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절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616-617쪽)

그의 관점은 오늘날 남북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상호연결 가능성으로 인하여 대륙을 향해 새로이 열리고 있는 우리의 반도적 시선확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대문명교류사>는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 일부일 따름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문명교류와 결부된 저작을 준비하고 있으며 (677쪽의 후기 참조), 따라서 우리는 머지 않아 중세와 근현대의 문명교류와 결부된 그의 노작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방대한 저작에 필자는 '참고문헌 목록'을 첨부하고 있지 않으며, 더러는 각주의 인용에서도 모호한 처리를 남김으로써 독자들의 불만을 야기한다. '고대문명교류사 연표'나 '찾아보기'와 같은 자상한 배려가 부록의 형태로 마련되었으면 한다.

이와 아울러 몇몇 오류들의 시정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를테면 동일한 정보의 반복 (비단과 로마의 쇠망관계: 343-344쪽과 389쪽), 인물의 불분명한 생몰 연대 (총카파 관련자료: 508-509쪽), 모호한 시기구분 (에데싸 기록: 539쪽) 등을 본보기로 지적할 수 있겠다.

고대문명교류사

정수일 지음, 사계절(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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