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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완도읍에서 버스를 타고 조금 더 들어가면 '장좌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잠자리'로 착각하기도 쉬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은, 그러나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온 동네가 시끄럽다. 대보름 때마다 열리는 당제와 샘굿, 당산제, 지신밟기 등 연례행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마을 이장과 어른들을 중심으로 온 마을 사람들이 며칠 전부터 발벗고 나선다.

▲ 장도에서 바라본 장좌리
ⓒ 이진욱
마을 주민들 중 젊은 사람들은 거의 없다. 광주 등 다른 대도시로 취직하거나 다른 일로 외지로 갔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50대 이상이며 40대가 단 두 명 있다고 한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장좌리의 대보름 행사는 매우 규모가 커서 대보름날부터 한 5일동안은 계속 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인구도 줄었을뿐더러 요즘에는 교회를 다니는 이들도 많아져 대보름굿을 미신이라고 거부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대보름굿은 며칠 전부터 준비하는데 본격적인 준비는 전날부터이다. 장좌리에는 대보름을 맞아 타지에 있던 이들도 고향을 찾아온다. 평일이지만 직장에 휴가를 내고 일부러 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대보름 행사를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했으니 올해도 빠질 수 없다는 유달리 깊은 고향사랑이다. 이번 대보름 행사에 안양, 부산, 광주에 있던 이들이 고향을 찾아 장좌리로 왔다고 한다.

마을회관에 사람들이 모이면, 다 함께 모여 풍물연습에 들어간다. 여인네들은 여성회관(부녀회관)에 모여 각종 음식 만들기에 바쁘다. 저녁 늦게까지 연습을 마치고 나면 다들 일찍 귀가한다. 대보름날인 다음 날에는 새벽 일찍 일어냐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아침 7시에 당제를 지내는데, 이를 위해 5시쯤에는 모여야 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이들은 3시쯤에 모인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새벽에 일어나 목욕재개를 한다. 대보름날 새벽에 신성한 제를 올리기 위해 몸과 마음가짐을 깨끗히 하는 것이다.

새벽 5시쯤 모이면, 또 한번 풍물 연습을 한다. 이들은 무슨 풍물의 전문인들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은 일도 없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몇 가락을 뒤동냥으로 배운 것이 전부다.

그래서 이들의 가락은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없다. 풍물을 좀 배웠다는 이들이 보면 꽹과리, 장구, 북을 잡고 치는 동작들이 모두 서툴고 투박하다. 소리도 그리 매끄러운 소리가 아니다. 게다가 옷차림도 제각각이다. 맞춰서 입었다고는 하지만 조금씩 다르고 깔끔하지 못하다.

하지만 이런 풍물이 재미있다. 오히려 도시에서 흔히 본 사물놀이나 멋들어진 풍물판 공연보다도 더 재미있다. 신명이란 화려한 개인기, 춤사위, 우렁찬 연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자극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들쑤셔 깊은 곳에서부터 신명을 끌어올리는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가 확인되는 바로 그런 자리다.

▲ 새벽 6시, 풍물패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 이진욱
새벽 6시쯤이 되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장도로 향한다. 장도는 해변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섬이라고 해봐야 한 눈에 온 면적이 다 보일 정도의 아주 작은 섬이다.

장도로 가는 길 그러나 배를 타고 가지 않는다. 보름날의 새벽 6시쯤에는 썰물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냥 갯벌을 걸어서 장도로 들어간다. 추운 새벽 바닷바람을 맞으며 갯벌을 걸어가는 힘든 길이다.

장도에는 작은 숲이 있다. 숲이라고 해봐야 작은 집을 겨우 둘러쌀 정도의 규모다. 이 숲 안에는 사당이 있는데 이 사당에서 모시는 이는 다름아닌 해상왕 장보고 장군이다. '청해대사', '청해장군'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장보고 장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이 마을에서는 옛날부터 매년 대보름 때마다 이렇게 장보고 장군의 제를 지내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보름을 맞아 장보고 장군의 제를 올리는 것이다.

제를 올리는 사당 안은 매우 좁아 제주 두 명만이 들어간다. 그동안 풍물패는 밖에 서서 그때그때마다 적절하게 풍물을 울려준다.

▲ 당제를 모시는 모습. 그동안 풍물패는 사당 밖에서 풍물을 울린다.
ⓒ 이진욱
제를 지내는 동안 해가 떠온다. 바다 위에 있는 작은 섬에서 보는 일출도 볼만하다. 육지와 바다를 한쪽 배경으로 하고 섬의 갈대밭을 전경으로 삼아 떠오르는 일출이 꽤 장관이다.

제사가 끝나면 아침식사다. 제사의 형식이 보수적이라 마을의 부녀자들은 사당 주변 가까이 있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제사가 끝나면 다같이 모여 식사를 한다. 마을 사람들이 준비해 온 식사는 김에 오곡밥 한 주걱을 떠 손으로 말은 즉석김밥, 남도 특유의 멸치젓이 들어간 김치, 그리고 국과 나물 등이다. 영하의 추운 날씨에 뜨거웠던 국도 금방 식어버릴 정도이지만, 이렇게 풍광이 좋고 인심 좋은 곳에서 먹는 식사는 무엇보다도 꿀맛이다.

식사가 끝나고 잠시 쉬었다가, 풍물패가 다시 소리를 울린다. 사당 앞에서 한판 신나게 두들긴 뒤, 당숲 주위를 세 바퀴 돈다. 이렇게 아침에 하는 당제는 공식적으로 끝난다.

▲ 사당 앞에서 풍물을 친 뒤 당숲 주위를 돈다. 육지마을과 바다를 배경으로 아침햇살을 받으며 치는 풍물이 가히 장관이다.
ⓒ 이진욱
이제 마을로 돌아와야 하는데, 이때는 밀물이 들어와서 걸어서 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미리 마을 사람들이 배를 갖다 대놓는데, 네 척의 배에 나눠타고 마을로 돌아온다. 이때, 배위에서 풍물을 치며 선상굿을 한다. 이 선상굿 또한 장관이다.

▲ 배 위에서 벌어지는 선상굿. 이 또한 장관이다.
ⓒ 이진욱
배들이 섬 주위를 돌며 한참동안 신나게 풍물을 치기도 하는데, 올해는 날씨가 너무 춥고 바람도 강해 바로 육지로 들어왔다. 5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 선상굿을 보기 위해 먼 데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마을에 들어오면 선착장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제 대보름의 일반적인 잔치가 남아았다. 마을 입구의 당산 앞에서 하는 당산굿과 우물에서 하는 샘굿이다. 마을 당산은 현재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다. 샘은 지금은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와 거의 쓰지 않지만 아직 마을 사람들의 중요한 식수원이기도 하다.

▲ 우물에서 치르는 샘굿. 아직 마을의 중요한 식수원이다.
ⓒ 이진욱
당산굿과 샘굿을 치는 동안 대보름 분위기가 물씬 난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풍물패의 가락에 맞춰 춤추고 뛰논다. 하지만 예전같지는 않다고 한다. 예전에 수백명이 함께 모였을 때의 그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 당산나무 앞에서 벌어지는 당산굿.
ⓒ 이진욱
당산굿과 샘굿 뒤에는 지신밟기다. 집집마다 돌며 집안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신나게 한판 두드리고 놀고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던 대보름 연례행사다.

▲ 집집마다 돌며 마당에서 신나게 펼쳐지는 지신밟기.
ⓒ 이진욱
한 십오여 년 전만 해도 지신밝기를 하면 족히 4~5일 동안 했다고 한다.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지신밟기에 참여했는데, 지금은 한 10가구 정도가 참여한다. 그래서 지금의 지신밟기는 대보름날 저녁이면 모두 끝난다.

지신밟기는 풍물패가 집의 대문앞에 가 풍물을 울리는 '문굿'으로 시작한다. 대문 앞에서 상쇠가 주인에게 집에 들어갈 것을 청하고, 허락이 떨어지면 마당에 들어가 한참을 신나게 두드리는 것이다. 이때 마을의 다른 많은 이들도 함께 모여 신나게 덩실덩실 춤을 추며 뛰논다. 대보름의 재미는 이런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한마음으로 신명나게 어울릴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한바탕 풍물판이 끝나고 나면 잠시 식사시간. 풍물패들은 하루종일 마을을 들쑤시며 힘들게 고생을 하기 때문에 지신밟기를 할때마다 새참(?)을 안 먹을 수 없다. 집주인은 집안의 무사안녕를 빌어주러 온 풍물패를 성의껏 대접한다.

풍물을 치는 동안 작은 소반에 쌀과 초를 올려 소박한 고사상을 차리고 풍물패에게는 밥과 국, 술과 안주, 거기에 돈까지 준다. 지신밟기에서 모인 돈은 모두 마을 공동의 관심사를 위해 쓰인다.

▲ 지신밟기 도중, 마을 사람들의 신명나는 놀이판이 벌어진다.
ⓒ 이진욱
잠시 새참시간이 끝나면 다시 풍물을 울리는데, 집안으로 들어가 안방, 부엌, 거실을 한바퀴 돌며 상쇠가 덕담을 하는 것으로 그 집의 지신밟기를 맺고는 다음 집으로 간다.

한 집에 머무르면 최소 30~40분 정도는 있기 때문에 그동안 신나는 놀이판이 벌어진다. 또 새참을 먹으며 나누는 사람들 간 대화 속에는 정겨움과 고향사랑이 묻어나온다.

저녁 무렵. 지신밟기도 한 10집쯤 돌았을까. 대보름굿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해가 뉘엿 넘어갈 즈음 지신밟기도 끝나고 마지막 '갯제' 순서만 남앗다. 갯제는 풍어제다. 바닷가 어촌마을이기 때문에 풍어제는 빠질 수 없다. 저녁이 되면 다시 썰물이 빠지는데 이 때 갯벌에 나가 갯벌 위에서 상을 차려놓고 풍물을 울리며 고사를 드리는 절차다.

▲ 갯벌에서 마지막으로 치르는 갯제.
ⓒ 이진욱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고사상이 들썩거릴 정도다. 상을 제대로 차릴 엄두를 내지 못해 상 위에 그냥 제수를 반찬통째 올려놓았다. 제주가 축문과 소원지을 읽고 절을 한 뒤 갯벌에서 한바탕 풍물판이 벌어진다. 제사 음식은 종류별로 조금씩 떠서 갯벌 바닥에 돌로 눌러 묻어둔다. 이른바 '고시레'다.

다시 마을회관 앞으로 돌아왔다. 마을회관 앞에서 신나게 풍물을 두드리는 것으로 대보름굿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달도 떠오르기 전에 끝난 것이다. 거창한 달집태우기나 쥐불놀이같은 것은 없다. 세련된 형식은 없어도 투박한 가락과 소리, 사람들의 정성 속에 마을 사람들의 뜻이 모이고 단합하는 연례행사가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한 4~5일은 마을 전체가 떠들썩거렸을 대보름굿, 이제는 이렇게 하루면 끝이 난다. 장좌리 대보름굿은 이렇게 또 한해의 연례행사를 치르며 마을 사람들에게 삶의 활력소를 심어주고는 내년을 기약하게 되었다.

"고맙네 그려. 여긴 그리 외지에 알려지지도 않은 곳이여. 젊은이들도 하나 없구. 이런델 찾아와서 새벽부터 지금까지 따라다니며 고생했지. 고맙네."

외부에서 구경하러 온 이들이 한 15명쯤 되었는데, 대개 무슨 대학원의 연구원인 듯 보였다. 민속을 연구하는 이들이 답사차 온 것 같았다. 그래서 각자 저마다 카메라나 캠코더 또는 필기도구를 들고 왔다. 이들은 새벽부터 있었던 장도에서의 당제, 선상굿, 당산굿, 샘굿까지 보고 나서 지신밟기가 시작될 때쯤 다들 없어졌다.

형식을 갖춘 것은 다 보았으니 볼 건 다봤다는 것일까? 지신밟기와 갯제까지 끝까지 남아서 보던 이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이 더욱 고마워하고 잘해주신다.

"울 장좌리 굿은 앞으로 한 10년은 더 허것지?"

한 아저씨가 대화 중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해가 바뀔수록 규모가 축소되고 앚혀져가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마을 젋은이들은 다 떠나고 어린 아이들과 50대 이상 어른들이 전부니 아쉬움은 더욱 깊다.

그래서인지 답사를 나온 필자를 참으로 반갑게도 맞아주신다. 처음 보는 필자를 한 아저씨가 자신의 집에서 묵도록 해 주고 맛있는 식사까지 대접해 주셨을 정도다. 아마 도시로 떠난 자신의 아들을 보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한 아주머니는 지신밟기 도중 술에 취해 대놓고 "너, 내 아들삼자. 내 아들아!"하고 말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나서서 치르는 대보름굿은 도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도시에서 다시 이런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나서서 치르는 대보름 축제를 볼 수 있을까? 이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인 듯 싶다. 이 곳 완도 장좌리의 대보름굿은 이러한 마을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치르는 대보름굿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나마 예전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다고, 아니 계속 축소되어가고 있다고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마을 어른들의 하루 더 묵고 가라는 배려를 아쉽지만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 내년에도 또 오라는 어른들의 부탁이 귓전을 맴돈다.

덧붙이는 글 | 더 많은 사진을 기자의 홈페이지 http://ralarala.com에 올릴 예정입니다. 홈페이지 방문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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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을 하고 학교수업도 하며, 공공운수노조 방과후학교강사지부 (http://asteacher.ner) 지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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