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요즘 성장소설은 아름답다. 외국을 무대로 한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그곳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고, 한국 작품 중 시골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마치 꿈 속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2%가 부족하다. '과거에는 이랬다'는 성장소설의 줄거리들은 요즘 각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희망을 줄 수도 있겠지만 현실과는 괴리감이 존재한다.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은 이 사회를 담아내는 성장소설은 보이지 않는다. 성장소설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 책 중에서, 내가 사는 이 도시이자 이 대한민국에서 읽어볼 만한 제대로 된 성장소설은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 문제를 전면으로 내세울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는 성장소설도 드물어 보인다.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이라는 작품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비하면 한국에서 무명 취급을 받고 있지만 작가와 작품은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탓에 웬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다. <운명>을 읽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평을 하고 저마다의 의견을 내세운다. 문학적으로 입증된 만큼 많은 이야기가 <운명>을 뒤따르고 있는데 굳이 여기에서 그런 것까지 다 언급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성장소설로서 <운명>을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이 부분에서 독자들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 책이 성장소설이라니?'라고.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유럽의 야만 시절에 강제수용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의 이야기를 성장소설로 본다면 어딘가 찝찝할 것이다. 그러나 <운명>만큼 적나라한 성장소설도 없다. 특히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사람들에게 더욱 권하고 싶은 성장소설이다.

15세 소년 죄르지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잔혹한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이유는 오로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내용을 짐작해 볼 것이다. ‘유대인’과 ‘아우슈비츠’라는 조합이 그렇다. 그 동안 숱한 책들과 영화들이 이 조합으로 전 세계인들을 울리고 또한 경악시켰다.

하지만 <운명>은 다르다. 잔혹한 내용을 폭로하는 것도 아니고, 경악스러운 내용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죄르지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을 삶으로 받아들인다. 부조리한 삶이지만 그곳에서 나름대로의 희망을 발견하려 한다. 생각할 시간이 있다는 것, 물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게 됐다는 것, 누군가를 알게 됐다는 것 등이 죄르지의 행복이라면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죄르지가 수동적인 인물이라 평할 수도 있겠다. 아우슈비츠의 생활에 적응하며 행복을 찾으려는 죄르지의 자세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 또한 의문을 품어볼 수도 있다. 그는 왜 분노하지 않는가? 억울하지 않은가? 그 나이에 이유 없이 감금당한 것에 투쟁할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러한 평과 의문은 명백히 제3자의 시각이다. 죄르지에게 그 삶은 그에게는 운명이다. 자유가 없는 운명, 거역할 수 없는 운명, 삶 자체가 운명인 것이다. 언젠가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 속에 그는 고통의 미학을 경험한다.

또한 아이러니한 대목이지만 죄르지의 삶은 거역할 수 없지만 또한 그의 것이다. 삶이 곧 운명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부여한 운명도 아니고, 강요받은 운명이 아니라 그가 살아있기에 존재하는 운명이다. 투정할 이유도 없고 외면하고 싶은 이유도 없다. 자신의 것이기에, 자신은 운명 속에서 희망을 움켜쥐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운명>은 '사람은 아름답다'는 격언을 생각게 해준다. 고통 속에서, 참담함 속에서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으려던 15세 소년의 모습은 읽는 사람에게 비장함마저 느끼게 해준다.

물론 임레 케르테스가 아우슈비츠와 나치 시대를 미화시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저자는 죄르지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참담한 과거를 잊지 않고,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는 삶의 부분으로 인식시켜 놓은 채 희망을 잡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사실을 명심하자. 죄르지는 울지 않았고 또한 절망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두려워하던 아우슈비츠라는 단어도 죄르지에게는 삶의 한부분일 뿐이었다. 명백한 것은 그에게는 그것이 운명이었고 그는 그 안에서 희망을 얻고 운명을 지켜나갔다.

무미건조한 문장으로 15세 소년의 삶을 다룬 <운명>은 그런 의미에서 각박한 현실로 딛고 선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아우슈비츠가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는 운명 그 자체이기에, 우리가 고난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에 <운명>을 훌륭한 성장소설이라 말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운명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민음사(2016)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