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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해남 녹우당엘 갔다가 윤승현 고산 문화원장으로부터 보길도에 관한 흥미로운 옛 글 하나를 얻어왔습니다. 1928년 8월 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최용환(崔容煥)이란 이의 보길도 기행문이 그것입니다. 비록 짧은 여행기에 지나지 않지만 이 글이 보길도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는 더없이 소중한 사료가 될 듯합니다.

당시 최용환은 명승지로 알려진 보길도의 풍광과 고산 윤선도의 자취를 찾아 보길도를 여행했습니다. 최용환이 '영주(제주도) 가느니 보길도'라는 민요가 있다고 보길도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그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보길도를 얼마나 뛰어난 절승으로 여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보길도가 명승지라는 기록은 최용환보다 훨씬 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18세기 사람인 윤위(1725~1756)는 그의 '보길도지'에서 '동방의 명승지로는 금강산 삼일포와 보길도가 있는데 그윽한 아취로는 삼일포가 보길도보다 못하다'고도 했었지요.

여행기에서 최용환은 보길도의 부용리 골짜기를 둘러보고 무릉도원이라고 표현합니다. 작년에 완도군이 댐 증축 공사를 강행하려 했던 그 골짜기지요. 최용환이 무릉도원이라고 찬탄했던 그 부용리 골짜기는 이미 15년전에 상수원댐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망가져 버렸고, 지금은 그 일부분만이 겨우 위태롭게 맹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만약 그가 다시 살아돌아온다면 어떤 심경일까요.

최용환의 여행기는 보길도에 살고 있으나 내가 얼마나 이 섬의 역사와 문화에 무지한가를 새삼 일깨워 줍니다. 인근 섬 소안도의 소작쟁의와 항일 운동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국유림을 불하받아 사유림으로 만들어버린 일본인으로부터 산을 되찾기 위한 보길도
사람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었습니다. 제주 목사 일행의 죽음과 관련된 정자리의 섬놀이 전설도 그렇고, 옛날 보길도에는 모기가 없는 이상향이었다는 이야기 또한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최용환이 지금은 흔적만 남은 보옥리의 백련암을 방문했다는 사실에 눈이 번쩍 뜨입니다. 백련암은 기왓장 따위의 흔적은 있는데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이 없어서 안타까웠던 절터지요. 그 백련암이 바로 한국 불교 사상 가장 신비로운 스님인 진묵 대사가 보길도 시절 수행했었다고 전해지는 절인데 이제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릴 듯합니다.

또한 최용환의 여행기는 지금은 잊혀진 보길도의 여러 지명들을 찾는데도 큰 보탬이 될 것같습니다. 당장에 이름 없던 백련암터가 있는 산에 옥산이라는 이름을 돌려줄 수 있게 됐으며, 윤고산 보와 용수포 또한 그 정확한 위치를 찾아 이름을 부르면 되살아나겠지요.

최용환의 여행기 원문은 고어나 한문투의 표현이 많아 한학자인 정민 교수(한양대학교 국문학)에게 부탁해서 현대어로 고쳤습니다. 보길도를 한번쯤 다녀간 사람들은 소회가 남다를 것으로 생각됩니다.


푸른 바다 봄 안개 속을 돌아 나가면 넘실대는 섬놀이의 자태
- 윤고산의 무릉도원을 찾아서


적자산(赤紫山)에 부용(芙蓉)꽃 피고 옥산(玉山)에는 웃는 흰 연꽃

장사도(長蛇島)를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나루를 하나 건너면 노화도(蘆花島)의 팔경을 배경 삼아 남해를 향하고 있는 것이 보길도(甫吉島)다. 그 생김생김이 오히려 팔경을 지닌 노화도에 비길 것이 아니다. 남으로 적자봉에 올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건너 제주(濟州) 한라산(漢拏山)을 바라본다.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와 옥산(玉山)의 백련암(白蓮庵)을 찾고, 다시 동쪽으로 떨어져 부용동(芙蓉洞) 골짜기의 이른바 무릉도원을 더듬어 돌아나오면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미인의 자태들이다.

봄안개가 어릴 때면 점점이 늘어나는 섬들

금산(金山)에 우거진 낙엽수도 볼만하고 망월봉(望月峯)의 달구경도 좋겠으나 보주산(寶珠山)을 앞에 둔 백련암의 장군대좌(將軍大座) 별당(別堂)은 더욱 명당이다. 정자리(亭子里)에서 보는 「섬놀이」구경은 더욱 볼만하다고 한다. 봄 새날이나 따뜻하고 청명한 날 서북(西
北)으로 보이는 잉도(芿島)와 닭섬(鷄島)을 내다보노라면 그 사이로 보이는 무수한 섬이 각각 아지랑이 꽃핀 바다 위로 걸음걸이도 가볍게 걸어오는데 그는 마치 육방(六房)을 앞세운 병부사(兵府使)의 행차(行次)나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불행한 제주목사(濟州牧使) 계절 찾아 해상행차(海上行次)

지금은 봄이 아니니 시절 덕을 입을 생각은 못할 일이지만 여기에는 재미있는 신화(神話) 비슷한 전설이 있다. 어떤 제주목사가 봄날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내다가 돌연히 일어나는 회오리바람에 탔던 배가 엎어졌다. 목사는 부하 장졸과 함께 마침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국
의 원혼이 되어 해마다 그가 죽은 봄이 되면 군악을 갖춘 행차가 예전처럼 섬을 거닐며 자기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지어 보이는 것이라 한다. 이는 봄이면 정자리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소위 이곳 사람은 『섬놀이』라고 한다. 섬들이 이렇게 놀기만 하면 어김없이 비가 온다는 것이다.

윤고산(尹孤山)의 무릉도원이 있던 자리, 시름도 잊은 경치

「제주 가느니 보길도」라는 한낱 옛날부터 전해 온 '민요'가 있다. 이는 삼백여년 전에 이조(李朝)의 처사 참의 벼슬을 지낸 윤고산이라는 선배가 망명을 하야 제주도로 향하야 가던 도중 경개가 빼어난 보길도를 지나다가 그만 이에 마음이 솔깃하여 「제주 가느니 보길
도는 어떠랴」하고 마침내 이 땅에 머물게 되면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살던 황원포(黃源浦) 어귀를 들어서면서부터는 옛부터 여름에도 모기가 없다는 말을 들어가면서 그가 살던 옛 무릉도원을 찾아 들어갔다.

시냇물은 맑은 절조인가, 푸른 솔은 높은 절개인 듯

광대봉(廣大峯)을 옆에 두고 적자봉 북쪽 기슭을 썩 내려서면서부터 펑퍼짐한 적은 평야를 이룬 곳에는 적자봉과 광대봉을 흐르는 시내가 이리 돌고 저리 돌아 호젓한 화원에 곡선미를 더한다. 몇 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이미 그의 후손은 끊어지고 지금은 터만 남은 그가 살던 집이 고요히 시냇물과 한가지로 말이 없으니, 입 다문 그 속 깊은 뜻을 알 길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가 말년에 연못 가운데 손수 심어 놓았던 한 그루의 소나무는 이제 늙어 병들었으나 오히려 청청한 맛이 고인의 기개를 말하여 주는 것만 같다. 그는 한 몸을 섬 가운데 숨기고 산수에 즐거움을 두어 냇가에 제방을 쌓고 황폐한 곳에 논 일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이 땅의 후생들에게 끼친 은공이 또한 적지 않다고 한다. 현재 용수포(龍水浦) 아래 저수지(貯水池)인 윤고산보(尹孤山洑)가 그것이며 곳곳에 개간된 논이 그것이다.

보길보교(甫吉普校)를 완성, 개척사업(開拓事業)도 진행

이러한 선생을 모셨던 이 섬 사람들은 오랜 숙원이 세가지 있었다. 하나는 섬 안에 있는 사립 보길학교를 완전하게 만들어 놓자는 것, 둘째는 국유림을 불하받은 일본인의 사유림을 매수하는 일, 셋째로는 간석지(干潟地) 개척이 그것이라 한다.

첫째 문제는 이 섬 안의 뜻있는 분인 김상근(金商瑾)씨의 성심성의와 도민의 열성으로 이삼년에 수만 원의 돈을 들여 교사를 새로 건축하고 이를 다시 보통학교로 만들어 이제는 자리가 완전히 잡혔다. 국유림 불하와 간석지 개간사업도 역시 앞서 말한 김상근씨의 주선으로 원만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은 이 섬 안의 전체 산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인 중촌조(中村組)의 소유산림 매수운동이 그것이라 한다. 머리를 왼편에 틀어 얹고 수건도 쓰지 않은 채 김을 매고 있는 부녀들은 그 의복이 큼직해서 노화도 부녀들보다는 좀 깨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창으로 나왔다.

(동아일보 1928년 8월 4일자 최용환(崔容煥) 글, 「도서순례 완도방면10」' 창해(滄海) 춘애(春靄)돌면 섬노리의 능파보(凌波步) - 윤교산의 화원을 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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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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