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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아주 오래된 농담>
ⓒ 강지이
"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농담?"
"그래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
- <아주 오래된 농담> 중에서


책 <아주 오래된 농담>은 박완서가 5년여 만에 쓴 장편 소설이다. 실천문학에 연재되었던 이 소설은 자본주의의 허상을 드러내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온통 거짓말과 위선으로 가득찬 우리 사회는 한 가정의 모습을 통해서 극명히 드러난다.

소설 속 한 가정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노력 끝에 자식 셋이 모두 성공한 집안이다. 큰아들은 미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유명 사업가가 되고 작은 아들은 의사가 되어 별 어려움 없이 세상을 살게 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인물은 늦둥이로 태어난 이들의 여동생 영묘이다. 어느 부잣집에 시집을 가면서 영묘의 인생은 언뜻 보기엔 팔자를 고친 듯하다. 하지만 그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재벌가의 속내란 일반인들로서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아들에게 죽음을 은폐하는 사람들. 이들의 목적은 그로 하여금 죽음을 준비할 수 없게 함으로써 그의 처(영묘)와 자식들을 자신들에게 묶어 두려는 것에 있다.

자신의 동생이 이와 같은 고통 속에 존재를 느낀 오빠 영빈은 어떻게든 영묘를 그 구렁텅이에서 끌어내려고 한다. 이 심각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고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는 인물이 바로 그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내연의 관계에 있는 현금이라는 여자이다.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랐던 현금은 어느 날 아버지가 파산을 당하면서 졸지에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된다.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를 그 집에 보관하려던 현금의 어머니와 그 집 식구들의 실랑이 등을 통해 그녀는 세상살이의 속내를 일찌감치 느껴 버렸다.

"한지붕 밑에 사는 식구끼리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다는 게 나의 성장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했다. 그러나 그 동안 정신은 획기적인 발전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원활하게 움직여 주는 힘은 결코 사랑 따위가 아니라 돈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엄마와 외숙모는 인두겁 뒤의 숨은 오장육부를 까발려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세상을 일찍 알아버린 여자 현금과 의사로서 성공 가도만을 달려 온 남자 영빈의 사랑은 그래서 누나와 남동생의 애정처럼 다른 시각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를 통해 보여주는 세상의 모습은 씁쓸하면서도 사실적인 시각을 갖추고 있다.

삶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적다는 영빈의 말은 홀로 된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평범한 선택만을 해 왔던 자신의 삶을 반영한다.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직업을 갖고 좋아할 만한 여자와 결혼을 하여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 가는 것.

그래서 그가 현금을 우연히 만났을 때 미친 듯이 그녀를 좇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영빈의 가족 구도는 일상적인 우리 사회의 한 가정의 모습이지만, 그 속에는 위태로움과 갈등이 항상 존재한다.

"70대와 40대와 30대와 10대가 한지붕 밑에 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위태로운 구도인가. 그가 모르고 있다 뿐 식구들은 끊임없이 지지고 볶고 싸우고 화해하고 미워하고 갈등하며 겨우겨우 모여 살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영빈은 그 안의 균형이 아슬아슬해질수록 가족이라는 본래의 외피는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영묘의 남편이 결국 자신의 병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자 영빈은 의사로서 커다란 회의를 느낀다. 보호자가 환자에게 시한부 인생을 알리지 말도록 부탁하는 한국 사회의 모순은 어찌 보면 우리 사회의 기만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기 발견 못한 암으로 시한부인 환자에게 외국 같으면 당연히 당사자에게 알릴 것을 우리는 보호자에게 먼저 통고를 하고 보호자는 거의가 다 환자에게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다를 왜 그렇게 속이려 드는지 모르겠어. 그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생각해 봐. 사람이란 거의 다 속아 사는 거 아니니? 사랑에 속고, 시대에 속고, 이상에 속고…. 일생을 속아 산 것도 분한데 죽을 때까지 기만을 당해야 옳겠냐? 이런 거짓말을 강요당할 때처럼 의사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낀 적도 없다니까."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사회, 그 사회 속에 우리의 가정이 위태롭게 존재하며 우리의 삶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가고 있다. 작가가 보여 주려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현대 사회의 영악한 구조는 책의 결말부에서 시원하게 끝을 맺는다.

돈 많고 출세한 큰오빠 덕분에 불행했던 영묘의 인생은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새로운 삶 또한 권력과 물질을 손에 쥔 오빠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자유를 얻는 일조차 돈과 권력의 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70대의 완숙미를 얻은 작가 박완서가 바라보는 현대 사회의 모습은 이런 모순들로 가득 찬 세상이다. 모순과 허상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긍정적 가치와 희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독자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아주 오래된 농담 - 개정판

박완서 지음, 실천문학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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