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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기도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인생이 순조롭게 잘 풀려가는 사람의 근원을 추적해 가다 보면 꼭 후손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해주었던 부모나 그 윗대 조상이 있다더군요.

사랑하는 딸 자경이를 위해 힘드는 줄 모르고 수종사 언덕배기를 훠이훠이 올라가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자식을 위해 장독대 한 귀퉁이 정한수 떠 놓고 간절한 정성을 드리는 옛날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자식을 보호하고 걱정하는 모성본능은 대충 건달인 나보다 당신이 몇 수 위란 사실. 참 민망하면서도 고맙고 또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에 당신을 바로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름이 뭐지요? 제 새끼 낳아 남의 둥지 속에 밀어놓고 제 멋대로 쏘다니는 싸가지 없는 어미새 이름 말입니다. 그 싸가지가 나인 것 같아 혼자 웃었습니다. 돌이켜 보니 두 아이 낳아 진 자리 마른 자리 내 손으로 거둬 준 기억이 별반 없더군요.

외할머니나 친할머니 그도 아니면 이모가 우리 아이들의 어릴 적 보호자들이었습니다. 대충 커 내 곁에 다가선 아이들. 내 손으로 키워보지 않아 내 새끼들의 특성이 무엇인지 몰라 한참이나 얼떨떨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냥 먼 발치에서 알아서 잘 크겠지. 근거없는 믿음 하나로 천하태평이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날 이때까지 우리 아이들 반듯하게 자라준 것은 우리도 모르는 조상들의 음덕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정한수 떠놓고 정성 드리는 부모의 마음. 아빠의 간절한 기도가 있는 한 우리 아이들 인생에 큰 어려움 없으리란 믿음에 마음 느긋합니다. 성격이 팔자란 말 있지요?

뭐든지 내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버릇. 이 성격 탓에 말년 팔자는 걱정없을 것 같습니다. 내 말년 팔자를 피게 해준 일등 공신 당신. 쑥스러움에 입 밖에 내놓지 못했던 마음 한자락 들쳐내렵니다.

내가 한 짓 중에서 제일 잘 한 짓, 바로 당신을 만난 거라고. 고구마 넝쿨처럼 당신과 함께 딸려온 우리 아이들 그리고 담양 사람들.
이들을 만난 것은 내 인생의 최대 행운이라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틀 전, 남편에게 보냈던 '사랑 고백'이다. 같이 산 스물세 해. 파란만장과 우여곡절, 바람 잘 날 없었던 삶 속에서 남편에겐 유달리 인색했던 내 마음에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가시밭길인 줄 뻔히 알면서 내가 좋아 선택한 사람인데 사랑한단 말 한 마디, 고맙단 말 한 마디 제 정신으론 해 본 기억이 없다. 미우면 꼴도 보기 싫다고 길길이 뛰었고, 울화가 치밀면 그만 살고 싶다고 악을 써 남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겼던 적이 수도 없었다.

스물 세 해.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미움보다 사랑이 훨씬 컸다는 것은 자명한 일 아닌가. 그럼에도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 못한 것은 수줍기 짝이 없는 못난 마음때문이었다.

설 다음 날, 초이틀은 우리 친정 엄마 생신이다. 큰 형님 댁에서 차례를 모시고 오후에 친정으로 돌아왔다. 설 뒤끝 음식에 몇 가지만 더하면 엄마 생신상이 차려지니 부담이 없었다.

아들 딸 사 남매에 손주 여덟. 그득하게 세워놓고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인 엄마, 아버지는 행복에 겨워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생신축하 노래가 끝나고 촛불이 꺼졌을 때, 남편이 호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장모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셔서 자식들에게 기쁨을 주십시오. 장인, 장모님 모시고 한 집에 산 지가 벌써 6년쨉니다. 그동안 두 분을 뵈며 불보살이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 여러 번 들었지요. 뭐든지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 자식과 형제들에게 쏟는 헌신적인 사랑. 장모님의 이런 정성 덕으로 우리 사 남매와 손주 여덟 아무 탈없이 잘 살게 된 것 같습니다."

맏사위의 축하 말씀에 엄마 눈자위가 축축해졌다. 백년 손님 맏사위가 어려워 당신 집인데도 늘 조심조심 숨을 죽이셨던 엄마, 아버지셨다. 든든하긴 해도 스스럼없는 내 자식만 하겠는가.

그런 사위가 이제 명실공히 당신들 울타리이고 보호자가 된 셈이었다. 사위의 그늘이 너무 든든해 행여 사위가 나간달까봐 전전긍긍인 엄마 아버지를 보니 남편의 마음씀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생전의 어머니에게 못다한 효도. 그 회환을 남아계신 장인, 장모에게는 남기지 않으려는 듯 정성을 다하는 남편. 그런 남편에게 역시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전하질 못했다.

사랑은 생성과 소멸이 초를 다투는 세포와 같은 것. 변하지 않는 사랑이란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 손바닥 하나 뒤짚으면 증오라는 것.

관계에는 관리가 필요한 것 같다. 가장 가까운 남편과 아내 사이엔 다른 이들에게 쏟는 배려의 몇 배가 더 필요한 것은,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는 애정의 사각지대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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