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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돌산도 입구 바닷가에 재현되어 있는 거북선.
ⓒ 이철영
왕은 도성을 비우고 국토의 서북 끝까지 도망했다. 그와 반대인 아득한 남쪽 끝에서 이순신은 절대고독과 맞서고 있었다. 한 사람의 순수한 장수로서 나라와 백성과 임금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왜적은 오히려 손쉬운 상대였을 것이다.

권력다툼의 복마전과 백성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는 장수를 두려워하는 왕의 소심함에 이르기까지 그가 상대해야 할 적은 오히려 나라 안에 있었다. 그는 왕과 권신들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버리지 않았다. 첫 싸움터인 옥포로부터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각대로 싸웠고 승리했다.

백의종군에서 돌아온 그는, 명량에서 12척의 배로 133척의 적선에 종잇장과 같은 일자진(一字陣)으로 맞섰다. 가슴이 저밀 뿐, 그의 깊은 절망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힘의 근원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운명의 그림대로 노량에서 죽었다. 그에게는 오직 이름 없는 조선의 병사들과 조선의 배가 있을 뿐이었다.

▲ 진남관에서 바라 본 여수 앞바다와 돌산대교.
ⓒ 이철영
조선의 병사들은 자신의 아낙이 왜적들에게 능욕 당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들은 배와 한 몸이 되어 끝없이 적진 속으로 파고들었다. 조선의 목수들이 만든 배는 나무의 휘어진 모양과 결을 따라 다듬고 연결되어 견고하였다. 또 유연하기 그지없어 물고기 마냥 물결을 타고 넘었다. 쇠못을 써서 지어진 왜선들은 나무못으로 연결된 억세고 두꺼운 판재의 조선 배들에 부딪혀 맥없이 깨졌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살아남은 12척의 전선(戰船)을 믿었다. 배와 한 덩어리가 된 그의 병사들을 믿었다. 그의 진법과 명령에 따라 배와 병사들은 학의 날개를 펴고 춤을 추었다. 너울너울 춤추다 몽둥이로 변하여 일격을 가했다. 송곳이 되어 심장부를 찔렀다. 건듯건듯 밀고 당기다 칼날이 되어 적진의 허리를 베었고, 일순 광풍처럼 휘몰아쳐 적들의 숨통을 끊었다. 수군들에게 전쟁터인 바다는 마을 앞 냇가의 물길처럼 친숙했다. 좌우회전이 빠르고 흘수선이 얕아 조수간만이 큰 해안 사정에 적합한 조선의 배들은 그들을 그렇게 물 만난 물고기로 만들어 주었다.

▲ 전남 여수시 시전동 소재 ‘선소(船所)’. 호리병 모양으로 생긴 곳을 ‘굴강(掘江)’이라 한다.
ⓒ 이철영
조선수군의 주력인 판옥선과 거북선을 비롯한 군선(軍船)들은 ‘선소(船所)’라는 곳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임진왜란 이전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서 건조한 거북선(귀선, 龜船)은 현재의 전남 여수시 진남관 일대에 있는 전라좌수영 본영 선소, 시전동 소재 선소, 방답진 선소 3곳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라좌수영 본영이 있었던 진남관 앞 일대는 매립되고 도로로 변하여 옛 자취를 찾기 힘들고 시전동과 방답진 소재 선소는 ‘굴강(掘江)’등이 복원된 유적에서 그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다. 특히 ‘굴강’은 현재까지의 연구결과 특정한 용도를 단정하지는 못하나 조선(造船), 수리(修理), 피항처(避港處)등 ‘선소’의 중심적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전라좌수영 본영 자리에 건립된 국보 제 304호 진남관(여수시 군자동).
ⓒ 이철영
해상제국을 건설했던 장보고의 시대나 그 이전, 또 고려, 조선중기까지도 이 땅은 육로보다는 바닷길에 익숙하고 다른 나라와도 활발한 해상교류가 이루어진 훌륭한 해양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배를 짓는 기술자들도 대접 받았고 뛰어난 조선기술이 이어내려 올 수 있었으며, 이충무공 또한 배 목수들을 우대하여 거북선과 판옥선이라는 강력하고 뛰어난 군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뿌리 깊은 기술 천시와 쇄국(鎖國)으로 치달았던 조선은 유구한 해양강국의 전통을 잇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배와 해양’을 지워버리는 우를 범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쇄국’을 주창하면서도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수군을 만들어야 한다 생각하고 조선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군선인 충무공의 거북선을 재현키로 했었다.

▲ 68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진남관은 현존 지방관아 건물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 이철영
언더우드(Underwood, H.H., 元漢慶)가 1934년에 발표한 < Korean Boats and Ships >라는 논문은 “대원군 시절, 프랑스의 원정이 예상되었을 때, 한 불운한 관리는 쇄국주의자인 독재자로부터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명을 받은 그는 절망적인 불안 속에서 명실상부한 철갑선을 만들기 위한 시도에 많은 재물과 정력을 소비했으나, 철갑선은 비정하게도 뜨기를 거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이(洋夷)들이 물밀듯 밀려오는 소용돌이 속에서 시효를 상실해버린 거북선을 재현하고자 했던 대원군의 노력이 눈물겨운데, 그것이 지금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지 반추해 보게 된다.

▲ 진남관임난유물전시관에 꾸며놓은 전라좌수영 미니어처.
ⓒ 이철영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사보 5월 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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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기행 연재했던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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