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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싱한 생멸치회 드셔 보셨나요
ⓒ 이종찬
한반도 남동쪽,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한 포구에 쪼그리고 앉아 수평선을 통통거리는 고깃배가 어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기장 대변항. 이윽고 표주박 모양의 유리등을 줄줄이 매단 고깃배가 짙푸른 파도를 일으키며 대변항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뱃머리를 꼭지점으로 삼아 하얗게 갈라지는 바다.

그물을 잔뜩 실은 고깃배가 대변항에 닿자 사람보다 갈매기떼가 먼저 고깃배를 하얗게 감싼다. 언뜻 파아란 하늘에 마구 펄럭이는 갈매기떼의 힘찬 날개짓이 만선의 깃발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고깃배는 항구에 닿자마자 싱싱한 왕멸치가 빼곡하게 매달린 그물을 힘껏 당기기 시작한다.

이윽고 '으쌰~ 으쌰~' 소리와 함께 그물에 매달린 왕멸치가 날치처럼 허공을 툭툭 튀어오른다. 검붉게 그을린 어부들의 땀 밴 목소리. 머리가 끊어져 여기저기 뒹구는 왕멸치. 플라스틱 양동이를 들고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왕멸치(이삭)를 열심히 주워 담는 아낙네들. 잽싸게 멸치를 물고 오르락 내리락거리는 갈매기떼.

▲ 금방 그물에서 털어낸 왕멸치로 횟감을 뜬다
ⓒ 이종찬

▲ 금방 살점을 뜬 생멸치회
ⓒ 이종찬
생멸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기장 대변항이다. 지금 기장 대변항에서는 바다에서 갓 잡아올린 싱싱한 왕멸치털이가 한창이다. 기장 대변항의 왕멸치잡이는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다. 하지만 가을에 잡히는 왕멸치보다 봄(4~5월)에 잡히는 왕멸치가 살이 통통하고 맛이 고소해 횟감으로 그만이다.

동해를 낀 울산과 양산, 부산 기장의 명물로 손꼽히는 멸치회. 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도 때를 잘 맞추지 않으면 싱싱한 멸치회를 맛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멸치는 성질이 급해 잡아올리는 순간 곧바로 죽어버리기 때문에 횟감으로 먹으려면 잡은 즉시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왕멸치의 살이 물컹해지면서 발효를 시작한다.

싱싱한 생멸치회는 한번 먹어본 사람은 그 맛을 쉬이 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일반 횟감처럼 왕멸치 살점을 발라내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것도 아니다. 딱히 그렇게 먹고 싶다면 그렇게 먹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뜬 멸치회는 살점을 재빨리 먹지 않으면 물컹물컹해지면서 물기가 나오므로 오래 두고 먹을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생멸치회는 대부분 여러 가지 채소를 넣고 손으로 버무려 회무침을 해서 먹는다. 멸치회를 채소에 버무리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싱싱한 왕멸치의 살점을 발라내 물로 두세 번 씻어 물기를 꼬옥 짠 뒤 미나리와 오이, 당근, 양파, 고추장, 물엿을 넣고 손으로 버무리기만 하면 그만이다.

▲ 멸치회는 횟감을 뜬 즉시 채소에 버무려 먹는 것이 좋다
ⓒ 이종찬

▲ 멸치회 무침에는 미나리, 오이, 당근, 양파, 양배추, 물엿, 고추장과 버무린다
ⓒ 이종찬
"아재요! 싱싱한 멸치회 좀 사 가이소. 요거 사가꼬 시원한 방파제에 가서 한번 드셔보이소. 멸치화캉 술 마시모 술이 안 취하지예."
"얼마죠?"
"요거 한 소쿠리에 5000원밖에 안 합니더. 무쳐 드리까예?"
"무쳐 주셔야 먹죠."
"그라모 조기(저기) 가게에 가서 양념장하고 야채로 사 오이소."


지난 22일(일) 오후 1시. 서정일, 김학수 기자와 함께 들러본 기장 대변항. 그날 아침 10시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일행들은 곧장 부산 해운대를 향해 달렸다. 해운대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해운대에서 한동안 때 이른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차를 타고 송정해수욕장을 지나 조금 더 달리자 이내 기장군 대변항으로 가는 팻말이 보인다.

대변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대변항 들머리에 들어서자 마치 오일장이 선 것처럼 시끌벅적하다. 행여 때를 놓칠새라 싱싱한 멸치회를 맛보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온 자동차의 행렬. 싱싱한 멸치회와 잘 익은 멸치젓갈을 수북히 쌓아놓고 지나는 손님을 잡아끄는 아낙네들의 안타까운 손짓 발짓.

그에 뒤질새라 대변항을 맞은 편에도 횟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비슷한 규모의 횟집마다 이곳이 멸치의 고장이라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멸치회' '멸치찌개' '멸치젓갈'이란 글씨가 줄줄이 붙어 있다. 간혹 횟집 유리창 한 귀퉁이에 '도미' '도다리'란 글씨도 언뜻언뜻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멸치'란 큰 글씨에 짓눌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 먼저 살점을 뜬 멸치회를 물에 씻는다
ⓒ 이종찬

▲ 멸치 살점은 아주 연하므로 물로 헹구듯이 씻어야 한다
ⓒ 이종찬
"어떻게 할까요? 횟집에 들어가서 멸치회를 먹을까요, 아니면 여기 노점에서 멸치회를 사서 방파제 너머 수평선을 바라보며 먹을까요? 횟집에서는 멸치회 한 접시에 2만원쯤 줘야 하고, 여기 노점에서는 멸치회값 5천원에 양념과 야채값만 조금 더 보태면 되는데."
"소주 몇 병 사들고 갯바위로 갑시다. 생멸치회는 아무래도 파도 치는 갯바위에 앉아 소주 한 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먹어야 제 맛이 나지 않겠어요."


대변항 도로변에 있는 노점 곳곳에 수북히 쌓여 있는 싱싱한 생멸치회. 어느 곳에서 살까.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금방 그물에서 털어낸 생멸치를 다듬고 있던 30대 중반의 아낙네가 옷자락을 잡아 끈다. 언뜻 눈웃음 치는 아낙네의 쌍꺼풀 진 동그란 눈동자가 생멸치의 동그란 눈을 닮은 듯하다.

그곳에서 아낙네가 무쳐주는 생멸치 회무침 한 접시를 들고 찾아간 곳은 대변항 방파제 너머 갯바위. 검푸른 바다 위에 놓인 끝없는 수평선 위에는 고깃배 몇 척 통통거리고, 갈매기 몇 마리 하늘을 부채질하고 있다. 마치 파랗게 텅 빈 하늘이 서러워 이렇게라도 날지 않으면 도저히 못견디겠다는 투다.

파도가 제법 세게 치는 갯바위에 앉아 소주 한 잔 곁들여 먹는 생멸치회. 캬! 소주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생멸치회 한 점 입에 물자 살점을 미처 씹을 틈도 없이 그대로 스르륵 녹아버린다. 입안 가득 번지는 고소하고도 새콤달콤한 생멸치회의 맛. 그래, 이 기막힌 맛을 어찌 놓칠 수 있으랴. 이 끝내주는 감칠맛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 미나리, 당근, 양배추, 양파를 넣는다
ⓒ 이종찬

▲ 채소를 넣은 멸치회 무침에 고추장을 넣는다
ⓒ 이종찬
소주 한 잔 입에 털어넣고 아삭아삭 씹히는 채소와 함께 먹는 생멸치회의 맛도 일품이다. 소주 한 잔 입에 털어넣고 수평선이 끝없이 보내는 파도를 바라보며 한 점 집어먹는 생멸치회의 맛은 신선하다. 좋은 벗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소주 한 잔 부딪치며 또 한 점 집어먹는 생멸치회의 맛은 벗의 마음 씀씀이처럼 감칠맛이 가득하다.

"히야! 5천 원어치가 굉장히 많네요. 생멸치회가 그리 비싸지 않은 걸 보면 서민적인 음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요. 하지만 아무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지요. 예전에는 멸치회나 갈치회는 이곳 바닷가 사람들이 아니면 맛보기가 어려웠지요. 멸치젓갈이나 갈치속젓은 어디서나 먹을 수 있었지만."


기장 대변항은 멸치가 으뜸이지만 갈치와 미역, 다시마도 유명하다. 특히 갈치회는 이곳이 아니라면 쉬이 맛보기 어려운 횟감이다. 한가지 더. 보다 싱싱하고 담백한 멸치회를 맛보려면 멸치잡이배가 많이 들어오는 아침나절이 좋고, 주말보다는 평일에 오는 것이 더욱 좋다. 주말에는 멸치회를 미리 손질해 놓기 때문에 신선도가 그만큼 떨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물엿을 붓고 손으로 살짝살짝 버무리면 끝
ⓒ 이종찬
신선한 생멸치의 고장 대변항. 그래. 이제 곧 오월이 가고 나면 이곳 대변항에 오더라도 싱싱한 생멸치회를 맛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오월이 다 가기 전에 기장 대변항에 가서 마악 그물에서 털어낸 고소한 생멸치회를 먹어보자. 그리고 잘 익은 생멸치육젓 한 통(5000원)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입맛 떨어질 때마다 쬐끔씩 꺼내 먹어보자. 생멸치의 고소하고도 담백한 맛에 이 세상 시름이 절로 사라지리라.

덧붙이는 글 | ☞1.자가용/서울-경부고속도로-부산나들목-반송-석대-기장방면 14번 국도-대변항  
2.고속버스/서울-부산고속터미널-노포동전철역-동래전철역-좌석버스 183번, 일반버스 188번-대변항(3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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