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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팔아 대학 보냈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엔 등록금이 하도 올라 1년에 예닐곱마리 팔아야 될까 모르겠다. 집집마다 애지중지 잘 키웠었는데...
ⓒ sigoli 고향
눈 오는 날이라고 아버지는 쉬지 않으셨다. 산으로 들로 나가기 힘들게 눈이 오면 이틀은 날을 잡아서 반드시 해치워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외양간과 돼지우리에 있는 '외양짚'을 내야 한다.

아래채 외양간으로 들어가 보자. 요즘처럼 시멘트로 콘크리트를 하여 오줌을 잘 흘러내리게 하고 지푸라기를 집어넣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라면 큰 일이 아니겠으나 당시엔 소외양간 바닥은 흙과 돌에 지푸라기를 깔아서 보온 겸 거름생산, 가축에게 최소한의 미용을 돕는다.

외양간 바깥쪽이나 내부 귀퉁이 한쪽에 오목하게 파서 오줌과 소똥 일부가 흘러내려 낮은 곳으로 모이도록 했는데 이걸 '합수'라고 했다. 합수가 차면 짚과 똥이 뒤섞인 외양간 짚 즉, 외양짚은 겨울이 시작될 무렵부터 2월까지는 치우지 않아도 되었으나 특히 암소가 질질 갈겨대는 오줌 양은 장마철 하늘에서 양동이로 부어대듯 하니 부사리가 아닌 이상 소매(오줌을 다르게 부르는 말. 소피는 사람에게만 썼다)를 퍼내야 했다.

날 수로 벌써 11월 중순부터 시작하여 2월도 중간에 걸쳐 있으니 부지런한 사람은 설 이전에 한번 치워주지만 대개는 날이 좀 풀리기 시작할 때라야 한번 손을 대는 큰 작업이다. 대공사였던 근본적인 원인은 먹는 양도 양이거니와 똥만 묻지 않게 짚을 조금씩 넣어준다지만 쇠죽을 먹으면서 여물을 혓바닥으로 곱게 쓸어먹지를 않고 조금 두꺼운 깎다구는 구시(구유) 밖으로 툭툭 밀어내니 여물이 소가 자는 곳에도 떨어진 때문이다.

어디 이뿐인가. 입이 걸지 않아 가리는 게 많은 놈은 구시에 남아 있는 여물을 긴 '입주뎅이'를 맘대로 놀려 주인 심사 상하게 쭉쭉 밀어대면 그 양은 실로 감당하기 힘이 든다. 지푸라기와 똥에 여물이 뒤섞여 차곡차곡 쌓이니 처음 높이보다 최대 6, 70cm나 높아진다.

아무리 소가 중하기로 서니 겨드랑이에 덕지덕지 다닥다닥 붙어 말라가는 쇠똥을 쇠빗으로 간간히 빗어줄 뿐 한 달이 멀다고 치워주는 일은 흔치 않았다. 게다가 대청소를 해주는 날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 염려하여 아예 동짓달, 섣달은 치울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은 게 통례였다.

▲ 쇠에 붙은 딱지를 벗겨주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게 빗어주면 값을 더 쳐주기도 했다. 쇠빗이 녹슬어 있지만 이걸 만나니 참 반갑다.
ⓒ sigoli 고향
가보 1호는 소다. 소 막부터 치우고 꿀꿀이를 깔끔하게 자도록 돕는 게 순서였다. 장화를 신었던 건 한참 뒤였으니 그냥 고무신 차림이다. 질러놓은 빗장을 풀고 고삐를 풀어 마당으로 끌고나오자 오랜만의 외출이라 나대기 일쑤다.

감나무 아래에 묶어 놓고는 마당에 있는 망옷자리 즉, 퇴비, 두엄자리를 잡고 쇠스랑으로 다소 마른 짚을 콕 찍어 꺼낸다. 문턱을 넘어 질질 끌고 가서는 낙엽이 쌓인 자리에 휙 던져 올린다. 묏자리를 잡아 뗏장을 한 켜 한 켜 올릴 모양으로 널찍하게 시작하였다.

겉을 대강 걷어내자 이젠 소똥과 짚이 오줌과 똥을 한껏 머금고 약간은 썩은 상태로 단단히 굳어 있다. 그 때 아버지 이맛살을 찌푸리게 한 철사도막이 발견되었다.

"호랭이 물어갈 철사토막이 왜 있다냐? 큰일 날 뻔 했구먼."

초식동물이 간혹 쇠토막을 먹었다가 창자가 터져 죽기도 하는데 부패한 사료를 많이 먹었다가 고창증(鼓脹症)에 걸려 죽는 일 다음으로 흔하고 위험한 게 철사다. 아이들이 더러 옷핀을 먹고도 밖으로 배출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도록 되새김질을 하는 소에겐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냄새도 발효가 한참이나 진행되었는지라 김을 폴폴 내며 다소 거뭇하다. 몽근겨(거칠지 않도록 가늘게 잘 빻아 벼 껍질과 쌀 겉이 섞인 고운 겨. 왕겨에 대비되는 말로 소나 염소, 돼지 따위 가축에게 먹인다)도 뒤섞여 있다.

끌어내기를 거듭하자 이젠 거의 떡진 상태다. 한 꺼풀 더 벗겨내자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가마솥을 열 때처럼 확 얼굴을 감싼다. 이제 아버지는 아예 신발을 벗고 긴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고 다닌다. 옷과 발목까지 묻을 뿐만 아니라 발효열에 의해 따끈따끈하기 때문이다.

절반 가까이 치웠을까 싶을 땐 벌써 웬만한 나무더미 높이로 올라가 있다. 툭툭 찍어 퇴비 무더기를 모아 온 힘을 다해 끌어내니 몸에서도 땀이 뻘뻘 난다. 오전 10시도 되지 않았는데 마루에 웃옷까지 벗어놓고 계속 하셨다.

"어이, 출출 헌디."
"한 잔 잡숫고 허실라요? 막둥아 주막에 좀 댕겨오니라. 한눈팔지 말고 후딱 와야 헌다 알았제? 니기 아부지 시장허신께."
"알았어라우."

▲ 막걸리는 마루에 걸터 앉아 먹어야 맛인데 예전엔 김치쪼가리에 먹어도 맛이 일품이었다.
ⓒ sigoli 고향
한 되짜리 노란 양은주전자를 들고 뛰어서 갔다 왔다.

'콸콸콸' 하얀 밀가루 막걸리를 따르자 흰 거품이 또르르 말렸다가 사라지기 전에 아버지는 큰 국그릇에 따라진 막걸리를 단번에 비우셨다. '꺼억' 반사적으로 트림을 한번 하시고는 김치를 한 쪼가리 물고 다시 일터로 들어가시려 한다.

"아부지 지가 헐 일 없으끄라우?"
"아서라. 니까짓 것이 뭘 헌다고. 똥 범벅이 될 것인께 뒤안에서부터 마당이나 쓸어."
"아녀라우 지는 아부지가 쇠시랑(쇠스랑)으로 끌어내면 호크(포크)로 몰랭이까장 떵그면 된디 그싸요."
"알아서 혀."

웬만한 아이들은 냄새가 심하여 접근하기를 꺼려 했지만 몸집이 작은 나는 힘닿는 데 까지 언제나 어른들이 하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장 헌옷차림에 바지가랑이를 나풀거리지 않게 양말목에 집어넣고 거들기 시작했다.

우리 포크는 삼지창(三指槍)이 아닌 오지창이다. 심부름하듯 건성건성 자잘한 일을 도울 때는 아버지께서 한번에 가져오는 양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세 번으로도 안 되자 조금씩 다섯 번에 나눠서 올렸다. 푹 찌르기보다 약간만 찔리게 하여 위로 떠서 올린다.

"읏샤."

아버지는 밖으로 끌어낸 뒤 절반씩 나눠 찍어 쭈욱 끌다가 일시에 막판 힘을 집중하여 치켜 올리고는 흘러내리지 않게 꾹꾹 눌러 단속을 하고 나머지를 또 올렸다. 20여 분 지나자 내 몸도 땀이 등짝부터 몽실몽실 피어 겨드랑이까지 적신다.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송 맺혔다.

▲ 왼쪽이 쇠스랑이고 오른쪽은 호쿠 또는 호크라 불렀던 농사용 포크다. 이제 곧 쇠스랑이라는 말도 사라질지 모르겠다.
ⓒ sigoli 고향
우리집 외양간은 왜 미련곰탱이처럼 넓기만 할까. 세 마리를 길러도 될 만큼이니 허허벌판이다. 이제 반을 갓 넘겼으니 보통일이 아니다. 괜히 동참하겠노라고 했다 싶었지만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다.

본채와 마주보고 있는 남부지방 아래채 구조를 잠깐 보자.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우리 행랑채는 왼쪽이 변소 겸 2~3년 간 묵어 폭 삭아 잘 마른 거름이 들어 있다. 가운데가 외양간이다. 반대 끝 앞쪽이 두세 사람 뉘이기 좋을 아랫방이다. 이렇게 집이 작아서야 되겠는가.

바로 뒤쪽에 웬만한 집 안방보다 3배는 컸던 골방이 하나 있었다. 집들이랍시고 할 때 초등학생 40명이 들어갔던 규모니 앞방과 골방 둘을 합치면 얼마나 컸던가를 가히 짐작은 할 것이다. 측간, 외양간, 방이 거의 같은 크기와 비율로 나뉘었으니 외양간 넓이도 남의 집 두 배는 족히 되었다.

세상에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게 일을 미뤄서 차곡차곡 쌓아두고서 아무 처리도 못하는 짓이다. 아버지는 내가 하는 일머리와 양을 계산해서 당신이 대부분 직접 올리지만 내 몫이라고 꺼내놓는다.

올리고 또 치켜 올렸다. 떠서 수십 번을 반복해도 끝나지 않다가 아버지가 끌어온 망옷에 차츰 물기가 늘어 질어지고 몽글어지기 시작하는 걸로 보아 바닥이 서서히 드러날 모양이다.

"허리 아푼 게 찬찬히 하그라."
"괜찮아라우."
"낸중에 아풀 것인디…."

소똥이 뭍은 채 새마을 한 개비를 피워 물고 외양간으로 들어가시고 난 뒤였다. "쩡! 쩡!" "떵! 떵!" 쇠가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 "쩍쩍" 긁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엔 봄을 재촉하는 눈이 하염없이 날린다.

▲ 바크셔 흑돼지인데 요놈들이 얼마나 청결한지는 잘 모른다. 무척 영리하여 꼭 한곳에만 일을 본다. 진안으로 한번 가야겠다.
ⓒ sigoli 고향
점심때쯤 너른 마당에 떡 버티고 있는 외양짚 퇴비가 지붕 높이만큼 올라갔다. 이제 본채와 행랑채는 완전히 가려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쉬지 않고 합수를 퍼서 두엄자리에 부으셨다.

'어, 저러다 밤에 말래에서 쇠죽 먹는 것 볼라믄 큰일인디…'라는 생각에 이르러 아버지께 한 말씀 드렸더니 "측간 오가면서 보면 되제 뭤이 문제여"하며 단칼에 내 우려를 씻어주셨다.

낮밥은 방에서 먹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릎 아래 정강이와 장딴지, 복숭아씨가 소똥 범벅이 되어 다닥다닥 말라비틀어져 있으니 괜스레 미안하여 밖에다 차리라 하고는 손만 눈에 쓱쓱 비비고 진지를 드셨다. 나도 땀이 말라 약간 떨면서 밥을 먹었다.

"노곤(한없이 늘어지도록 피곤한 상태)허네."
"질쌈(길쌈, 여기서는 베 짜기) 그만허고 같이 허끄라우?"
"돼지막도 솔찬헐 것인디 한꾼에 하더라고."
"엄마랑 같이 허면 훨씬 수월헐 것이요."

점심을 먹자마자 외양간에 짚단을 석 다발 풀어 고르게 깔아주고 소를 들였다. 이제 돼지우리를 손볼 차례다. 소똥은 냄새가 덜하지만 돼지 똥은 각오를 해야 한다. 구정물을 먹는지라 더 질컥거리기도 하고 때론 얼굴에 배설물에 음식찌꺼기까지 버무려진 범벅이 얼굴에 튀기도 한다.

가로질러놓은 나무토막을 도끼로 차례대로 쳐내는 동안 까만 돼지는 잠시를 못 참고 자꾸만 밖으로 나오려 한다.

"요년이!"

'툭' 도끼대가리로 치자 "꽤액~" 소리를 내며 모퉁이로 들어갔다. 다 빼고 나서 비켜주자 돼지가 엉덩이를 뛰뚱거리며 마당으로 나온다. 이 때부터 나는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대문 앞에서 몽둥이를 들고 돼지가 골목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지켜서 있어야 한다.

"흠흠흠" 흙냄새를 맡으니 기분이 좋은가 보다. 땅 속에 뭔가 맛난 것이라도 숨어 있는 걸까? 곧 돼지가 마당 곳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아부지 마당 다 파부요."
"저 호랭이 물어갈…."

▲ 쇠죽솥은 대단히 컸다. 한 때는 모조리 내 차지였는데 귀향하면 여물로 쇠죽쒀서 두어 마리 길러야겠다.
ⓒ sigoli 고향
말릴 방법이 없었다. 땅 속에 멧돼지나 집돼지가 제일 좋아하는 지렁이가 있질 않던가. 뒤지고 쭉쭉 밀어 흙과 각종 미네랄, 지렁이를 야금야금 씹으며 별식을 즐기고 있다. 잠시 안정이 되는가 싶더니 이젠 장독대 주변으로 옮겨 언제 건드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엉덩짝을 한 대 때려주자 뒤뜰로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돌아들어간다.

그 사이 어머니와 아버지는 짚과 돼지 똥이 뒤섞인 거친 망옷을 애초에 잡았던 두엄자리가 아닌 감나무 밑으로 질질 끌고 가서 담벼락에 바짝 붙였다. 퇴비감이라고 모두 같지는 않기 때문에 돼지 막에서 나온 것은 따로 둔 이유가 필시 있었다. 가축 분뇨마다 발효열을 내뿜는 정도가 달랐다. 돼지똥은 소똥보다 더 고열을 발산하니 뭔가 긴요하게 쓸 모양이다.

며칠 뒤에 알았지만 비닐하우스가 없었던 당시 고구마 싹을 틔우는데 이만한 재료가 없었다. 그날 밤부터 불이 난 듯 부엌보다 더 김을 뱉어내는 돼지 그것 위에 날이 더 풀리면 황토를 몇 가마 끼얹고 그 위에 고구마를 올려 거적을 덮어놓았다. 일주일쯤 뒤에 고구마 싹이 돋아나 밭에 고구마를 붙였으니 소용 없는 것이 무엇이랴.

둘이서 같이 하니 훨씬 일찍 끝났다. 돼지를 우리에 가두느라 애를 먹었지만 이제 뒤처리가 장난이 아니다. 마당과 변소간 입구며 외양간 앞 쇠족가마솥 근처를 빠짐 없이 쓸어 모았다. 물을 데워 부엌에서 개학맞이 목욕을 하고 나니 가뿐했다.

"뇌약(온 힘이 다 빠져 기력이 거의 없는 상태)하시. 튀약(결려서 움직이기 힘든 상태)이 나부렀단마시."
"심들먼 녈 하믄 되제 왜 한사코 다 하셨소?"
"어디 일이 그러간디."

다음날 아버지는 쓰지 않던 근육을 오랜만에 되게 쓰신 탓에 곳곳이 결리는데도 풍년농사를 위해 헛간에 여름내 쟁여두었던 두엄을 잘게 부숴 한쪽으로 옮기며 뒤집었다. 퇴비는 자신을 썩혀서 땅 힘을 북돋워준다. 화학비료가 없던 시절 농사는 곧 거름 양에 비례했으니 이토록 며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도 근사한 선물이 하나 떨어졌다. 까맣게 잊고 있던 꽃뱜(꽃뱀, 화사)보다 더 좋은 능담(능구렁이)으로 담가 3년 묵은 뱀술을 쇠스랑으로 찍을 뻔하다가 대단한 발견을 하셨으니 그날 저녁엔 큰아버지도 우리 집으로 오셨다. 하루 더 지나서 아버지는 사흘 동안 몸져누우셨다.

▲ 예전 헛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더러 있다. 퇴비를 살리고 헛간을 지으면 음식쓰레기 문제와 유기농 농사 걱정없겠네.
ⓒ sigoli 고향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6, 70년대 어렸을 적 이야기를 쓴다. 엄마가 만들어 주신 잊을 수 없는 맛을 되살리고, 아버지와 지냈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건 한 때 우리 삶의 전부였던 소중한 추억이기 때문이다. 동무들과 즐겼던 놀이와 농사이야기도 낱낱이 보고할 생각이다. 여세를 몰아 시골아이 고향(www.sigoli.com)을 만들어 함께 농촌과 고향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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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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