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키는 왜 자라지 않는 걸까? 1m 70cm도 안 되는 땅딸막한 아이, 땅과 가장 친근한 족속 중 한 명으로 전락하는 비운의 주인공의 비애를 누가 알아줄까? 중학교 1학년 때는 19번이었다가 다음해 14번, 이듬해엔 9번까지 밀렸다.

아홉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이 문제였는지, 5학년 때 머리를 다쳐 약을 달고 살아서인지 갈수록 키가 크지 않아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춘기와 겹친 때라 여자애들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는 자신을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 교문 들어가기가 겁이 났던 시절 1, 2학년 땐 날이면 날마다 걸렸다. 모자가 삐딱하다, 호크를 잠그지 않았다, 명찰이 틀어졌다, 머리가 길다 참 갖가지였지요. 그런 제가 3학년 땐 선도부가 되었답니다.
ⓒ 시골아이
한편 나는 전형적인 암기과목파다. 국영수만 보던 시험에선 시골 중학교에서 3, 40등을 오르락내리락하다가도 전 과목을 보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선 전교에서 3, 4등을 거머쥐며 아이들 부러움을 한껏 샀으며 평소 한참이나 처졌던 성적을 일거에 만회하는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성적만 좋았을 뿐 학교생활에선 조분하거나 착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 했다. 선생님 보는 데선 세상에서 가장 착한 양이었다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시면 아이들을 꼬드겨 교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실장을 곤혹스럽게 하는 일을 일삼고 자율학습시간엔 1/4이나 되는 아이들을 이끌고 이발한다는 핑계로 학교를 빠져나가 김일과 김덕 프로레슬링을 보고 오는 통에 뭇매를 맞기도 했다. 그렇다고 복장이 단정하지도 않았다.

아침마다 호크가 불량하다고 지적받고 명찰이 삐딱하다고 걸리기 일쑤였다. 2학년 이후론 여자애들 편지를 가장 많이 받는 귀염둥이이기도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반마다 돌아다니며 장난질을 심하게 했고 1년 선배 몇 명과는 말을 트고 지낼 정도로 보통이 아닌 특별한 학생이었다.

키는 작았으나 놀아본 놈들의 전형으로 선생님이 정해준 앞자리를 마다하고 맨 뒷자리에서 교실 전체 분위기를 한눈에 파악하는 사령관이었다. 그렇게 화려한 나날을 보내며 이른바 껄렁거리던 아이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그러니 '떠든 사람'에 내 이름이 빠질 때가 없어 학기를 마치면 '행동발달상황'에 가장 나쁜 점수인 '다'가 매겨졌다가 성적우수자에게 주어지는 우등상을 받지 못하게 됨에 따라 선생님께 불려가 "너 임마 이 게 뭐야? 공부만 잘하면 다냐고? 행동이 방정하지 못하면 우등상을 탈 수 없다니까. 너 어쩔래?"라는 말을 듣곤 했다.

가만히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다'를 '나'로 조정하여 간신히 상을 탈 수 있게 해줬고 그 날만 조신할 뿐 언제 그런 소리 들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갔다. 미꾸라지처럼 선생님 감시 눈초리를 피해 불량한 짓만을 골라하다가 3학년이 되었다.

3월 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도부원 발표가 있던 어느 날 내겐 뜻밖의 선물이 하사되었다. 2학년 때 담임이었던 문병탁 선생님께서 학생과장이 되더니 개교 이래 가장 키가 작은 아이, 못된 짓만 골라하던 학생인 나를 선도부에 포함시킨 게 아닌가.

공식적으로 매를 갖고 다닐 수 있도록 허가된 학생, 1, 2학년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니 참으로 내 생애 가장 강력한 무기가 쥐어진 셈이었다.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해림이를 원 없이 볼 수 있도록 허가가 되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않았던 행운, 무한한 힘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전적으로 내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다짐하고는 근엄한 표정으로 아침 자습시간과 점심시간에 1, 2학년 교실을 순회하게 되었다.

등교시간에는 교문 앞에서 아이들 복장을 점검하며 칼 같은 규율을 적용하여 한 치 흔들림 없이 아이들을 벌벌 떨게도 하고 기합을 원 없이 받게도 했다. 특히나 1학년 교실에 가면 후배들이 벌벌 떨도록 주눅이 들게 했다.

청소 시간 순시도 구석구석 빠짐없어 가장 깔끔하게 지도했다. 기강확립 차원에서 우리 초등학교 출신 후배들을 더 족쳤으니 나중에 군대에 갔다 온 후배가 "왜, 성은 우리들을 그렇게 엄하게 했어요?"라고 항의까지 했겠는가. 내 구차한 변명은 이랬다.

"얌마, 내가 너희들만 봐주면 애들이 뭐라고 하겠냐? 그렇게 하면 분위기를 잡을 수 없잖아. 그래도 난 눈물을 머금고 법대로 했을 뿐이다. 그러니 오해가 없도록…."
"정말 형이 무서웠다니까요. 성한테 찾아가서 우리 동네 아이들이라도 좀 봐주라고 하고 싶었어요."
"그래, 그래 미안하다. 자, 막걸리나 묵자. 짜식이 다 커가지고 쑥스럽게 뭐냐?"

눈물을 머금고 자로 잰 듯 엄격하게 하다보니 아이들에게 무서운 존재로 각인이 되었다니 미안할 뿐이다. 3년간 장학금을 준다는 창평고에 일찌감치 고교 진학을 결정짓자 공부에 대한 흥미는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여자 꼬시기와 선도부 활동에 빠졌다.

날씨가 한없이 뜨겁던 오뉴월 어느 날, 점심시간에 교실이 아닌 교문을 지키는 순서가 돌아왔다. 조무래기들을 잡는 것보다 개구멍으로 학교 밖 점방을 오가던 여학생들을 적발하는 책임이 내가 할 일이었다.

다른 선도부원들은 내가 보기에 다소 멍청하다시피 교문 앞에서만 서 있다가 종이 울리면 돌아오곤 했는데 약한 고리가 어디라는 걸 죄다 파악한 나로서는 언덕배기에서 매점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떡 버티고 있게 되었다.

"야, 하드 좀 사자."
"야 이 가시내들아 안 돼. 얼른 안 들어가."
"야, 규환아 오늘 딱 한번만."
"안 된다니까."
"날씨도 떠운께 한나씩만 먹자."
"야, 너 명옥이 정말 그럴 거야?"

▲ 개구멍은 이런 곳도 있지만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측백나무였지요. 그 아래를 통과하면 참 향이 좋았답니다.
ⓒ 시골아이
이젠 박영숙이가 나서 미인계까지 동원했다.

"야, 규환아 한번만 눈감아주라."
"싫다니까. 니들 봐주면 다 봐줘야 하는데…."
"아따 글지 말고. 그면 은하 소개시켜주께."
"됐어야. 은하는 내가 알아서 허면 됭께 남 걱정들 말고 들어가 어서."
"아따 그러지 말고 한번만…."
"니들 정 이러면 수첩에 적어서 학생과장님께 보고한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나를 밀치며 평소대로 점방 아줌마와 접선을 시도한다. 학교 언덕에서 찻길로 돈을 자그마한 돌멩이로 감아 던진다.

"아줌마 여기 천원 있응께 하드 3개랑 브라보콘 두 개 갖다 주세요."
"알았어. 쬐까만 지달려. 금방 갔다 올게."

이윽고 매점 주인이자 같은 학년 여학생 정미라 어머니가 비닐봉지에 아이스크림을 싸서 개구멍으로 던져준다. 여기서 모른 척 넘어가 줄까도 생각했다. 곧 마음을 다잡고 만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줌마,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시 가져가세요. 다른 애들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래 학생?"
"안 된다니까요. 이러면 선생님께 제가 혼난다니까요."

점심시간 달콤한 향수를 여학생들은 얼마나 기다렸겠는가. 많을 땐 거의 서른 명이 넘는 여학생들이 이곳을 통해 달달한 맛을 보며 더위를 달래려한 추억을 가로막는 첨병이 되었다. 그런 내게 원성이 쏟아지는 걸 모를 리 없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번 내뱉은 말 주워 담을 수도 없어 자로 잰 듯 원칙으로 일관했다.

내가 나가지 않은 날엔 평소 하던 대로 하다가도 그날 이후 여자애들은 내가 나오는 날짜를 확인하여서는 김규환이가 점심 먹고 나오는 시간보다 일찍 아주머니와 접선하여 아이스크림을 먹곤 했다.

이런 듬직한 선도부원을 뽑은 학생주임 선생님은 걱정을 붙들어 매고 남녀학생들의 추문 현장을 찾는 데 골몰하였으니 전 해와 달리 큰 사건사고 없이 한 해를 보냈다.

하지만 사람은 이중성이 있는지라 3학년 우리 교실에선 담임선생님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적을 당하는 불량학생으로 낙인이 찍혀 옴짝달싹 하지 못해 밖으로 돌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어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선생, 지금도 선도부가 있는가?"
"그럼."
"그럼 누가 뽑는가?"
"예전이나 똑같아. 학생주임이 뽑지 뭐."
"여학교라서 조금 규율은 약할 것 같은데…."
"그렇지, 달라진 점은 기합은 예년 같지 않고 매도 들 수가 없다는 점인데 여전히 무서운 존재지."

마을이 소란하면 후배들을 불러 매를 직접 꺾어오라 해서 분위기를 다잡기까지 했던 그 때 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행여 서운한 감정 있었다면 오늘로 말끔히 잊길 바란다. 한 가지 내가 아끼는 후배들이 욕먹는 건 싫어서 더 호되게 한 것뿐이니까….

덧붙이는 글 | 삽화를 그린 김용철 기자는 40여 권의 어린이 만화를 그렸고 맛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독일 월드컵 소식을 현지에 가서 생생하게 전달할 계획입니다. 고향신문 시골아이☜ 를 함께 만들고 있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