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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중3부터 진행된 방황은 끝 모르고 이어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사춘기는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급작스레 돌아가시는 바람에 들판에 홀로 버려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말이 자취생활이지 굶기를 밥 먹듯 하였고 아침마다 지각도 자꾸만 횟수가 늘어만 갔다.

마침 방학이라 자유를 만끽하며 아버지 밥 해드리며 세월을 허송하였으니 내 삶에서 가장 방종을 누린 시기라 할 만하다. 길지 않은 방학이 끝나간다. 광주로 유학 간 아이들은 한두 주 거뜬히 넘길 새 밑반찬을 준비하여 바리바리 싸간다지만 나는 옷가지만 챙겨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를 타고 보니 다른 친구들은 모두 떠나가고 윗마을 강례에서 영만이와 효순이가 미리 타 있었다. 여느 때라면 2시간 이상이 소요되어 곡성 쪽보다 훨씬 더 먼 화순 전체를 관통하는 차에서 내렸겠지만 그날은 둘이나 함께 있어서 좋았다.

광성여객 버스는 화순 북면을 거쳐 이서적벽과 묘치재, 화순탄광을 거쳐 읍에서 마저 태우니 만원이다. 곧 너릿재를 통과하니 광주 지원동이다. 남광주 학동에서 내리지 않고 우린 곧바로 대인동 공용터미널 종점까지 갔다. 가는 내내 영만이에겐 공부보다 예쁜 여자애들 많이 만났느냐는 이야기, 효순이에겐 미팅 좀 시켜달라는 부탁을 하는 데도 근 3시간 가까이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시간이 짧기만 했다.

오후 3시 차를 탔으니 터미널 주차장에 내렸을 때는 도심 한복판이라 여전히 폭염이었다. 각자 짐을 챙기느라 땅콩 효순이에게 인사하는 걸 놓치고 말았다. 터미널 대합실 안쪽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아도 벌써 여자애는 사라지고 없었다.

"야, 영만아 효순이랑 빵이라도 먹고 헤어져야 하는 거 아니냐?"
"글게 말이다. 얼른 가보자."
"어느 쪽인지 알아?"
"응."

효순이는 경신여고를 다녔지만 북동성당 쪽에서 24번 시내버스를 탄다고 했다. 책가방 하나에 보자기로 싼 김치 통과 몸만 달랑 오는 친구들과 달리 내 등엔 커다란 옷 배낭이 있다. 양쪽 손에도 무거운 가방이 들려 있었다. 내일이 개학인지라 뒤춤에도 두둑이 들어 있었다.

"야, 지하도로 가야지."

마구 뛰었다. 북동과 고속버스터미널로 유일하게 통하는 서쪽 지하계단을 순식간에 뛰어내리고 올랐다. 그때 초등학생인지 중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다가왔다. 벌써 주변은 약간 어둑어둑해진 상태였다.

"성, 내가 채비가 없어각고 고흥 집엘 못 가거든. 나한테 돈 조금만 주면 안 되까?"
"우린 바쁜디…."
"글면 요짝으로 잠깐만 와봐."
"바쁘다니까 근다."

▲ 무서웠다.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끈질기게 버티니 저들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그들도 나같은 사람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조금은 순수한 이들을 만나 다행히 몸만 곳곳이 멍이 드는 걸로 끝이 났다.
ⓒ 시골아이 맛객
영만이도 됐다고 했다. 몸과 마음으론 어린 동생의 채근을 거부했지만 무거운 내 몸에 달린 짐 때문에 도리 없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괜스레 효순이 뒤를 쫓았다는 후회는 이미 때늦은 거다.

"요 새끼들이여. 성!"
"뭐라고 이놈들이라고?"
"잉."
"알았어."

광주일고를 지나 광주천으로 향하는 북동성당 인근 큰 도로에서 4~5미터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 어둠침침한 골목에 시골 촌놈 둘이 삽시간에 다섯 명에게 둘러싸였다. 일순간 생판 다르게 변한 상황에 어리둥절하며 궁지에 몰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얌마, 니기들 이리 와봐."
"왜요? 뭣땜시…."
"이 새끼들이 와보라면 오면 되지 주먹뎅이만한 것들이 지랄이여."

숫자로나 힘으로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더군다나 내겐 한 달치 자취방 월세와 책값, 용돈이 바지 뒷주머니에 만 원짜리로 스무 장이 넘게 들어 있었다. 여차하면 모두 뜯기어 알거지가 될 판이다.

영만이는 그래도 순순히 있던 돈을 모두 털어냈다. 하기야 수중에 만 2천원밖에 없었으니 정 안 되면 걸어서라도 집에 도착할 수도 있거니와 도시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소위 삥땅 뜯는 이런 저런 무용담을 수도 없이 들었을 테니 대처법을 조금은 알고 미리 작정을 하고 내줘도 무방하였을 게다.

나는 상황이 달랐다. 담양 하고도 창평면이라 하면 일개 작은 면소재지에 지나지 않는다. 명색이 신생 시골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갔으니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모범생을 자처하며 재기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지라 형은 대학 때와 달리 내가 요구하는 대로 많게는 한번에 30만원을 넘게 부쳐주고 있었다.

내게 가장 풍족했던 시절이라 배짱보다 더 두둑한 게 내 주머니 사정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도시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세상사와는 담쌓고 여전히 1970년대 후반에 머물러 사는 촌놈에 지나지 않았다.

내 행동이 범상치 않음을 깨달은 그들은 나를 집중 추궁하기 시작했다. 껍질째 사과를 한번 베어 물고는 들고 있던 사과를 내 가슴에 사정없이 던졌다. 그도 모자라 씹고 있던 사과를 얼굴에 뱉어버리며 겁을 주고 있었다.

두 명이 양쪽 팔을 잡고는 주먹과 발길로 내 배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얼굴을 때리자 입에서 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아, 내 옷가지며 무거운 짐이여!'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야 꼬마야, 친구 엄마가 병원에 있다니까. 그러니까 우리 나눠쓰자. 응?"
"안 돼! 내 방값이란 말야."
"아따 긍께 나눠쓰자고 했자너. 너 절반 우리 반 쓰면 되잖냐? 그것도 안 돼?"

이젠 상황이 조금 바뀐 건가? 이젠 내 주머니에 돈이 가득 들어 있을 거라 확신을 한 깡패들은 사지를 잡고 몸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난 몸부림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찌나 몸을 비틀며 저항을 거세게 했던 지 오래 시간을 끌면 안 된다고 판단을 했던지 모른다.

"악-"
"사람 살려요."

내 친구 영만이는 괜히 건드려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는 건지 머리를 숙인 채 죽은 듯이 있었다. 야속한 순간이다. 나 같으면 여차하면 튀어서 사람 두엇만 불러오면 모든 게 정상으로 갈진대 꿈쩍도 않고 있고 내가 어찌 되든 상관이 없나보다. 더군다나 대로에서 몇 미터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치안이 허술하다니!

바로 건너편 공용터미널에선 수십만의 사람이 오가는 그 시각 우린 골목에서 10분을 훌쩍 넘겼다. 내가 지쳐갈 무렵이었다. 몸부림을 치며 수없이 맞아가며 버틴 지 20분에 육박할 무렵 그들은 내 뒷주머니에서 기어코 돈 주머니를 꺼냈다.

"안 돼~. 안 된다니까. 그러면 나는 못 살아. 내 돈 내놔."

처량하게 무릎을 꿇고 빌며 애걸복걸 시대로 접어들었다. 곧장 빠져나가도 될 일이지만 젖 먹던 힘까지 보태 사정을 하자 쉬 떠나지 못하고 몇 마디 나눈다.

"아따 이 새끼 정말 징그러운 놈이구만. 야, 어쩔까?"
"독종이다야. 그냥 줘서 보내, 재수 옴 붙었다야."
"얌마, 여깄다. 담부턴 이런 데 오지 마. 알았지?"

내 몸은 맘껏 구겨졌다. 마음도 상처를 크게 입었다. 깡패들이 내 돈을 탐내며 무참히 밟은 건 그렇다 치고 아무 저항이나 손도 쓰지 않은 영만이가 과연 내 친구인가 하는 의문이 들어 돈을 챙긴 뒤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다시 103번 시내버스로 갈아탄 건 8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9시 무렵 시내를 돌고 돌아 담양 창평에 도착하니 껄렁껄렁한 한 무리가 지나간다. 소름이 끼쳤다. 창평은 함평, 남평과 함께 3평으로 불리던 일제 때 순사들도 강 건너 불 보듯한 건달과 깡패들 소굴이요, 서방파 젖줄이 아니던가.

"야, 인자 오냐?"

어디서 나를 보았던 걸까? 아니면 내 친구도 한 명 끼어 있는지도 모른다.

"예, 형님, 개학 준비하느라고 자취방에 가는 길입니다."
"그래, 밤길 조심하고…."
"예, 형님. 들어가십쇼."

이렇게 해서 난 깡패들과 친하게 되어 그 뒤론 스물한 살 때 종로4가에서 대낮에 뺨따귀 한번 맞은 것 빼고는 얻어터지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퇴학당한 친구들에게 '형님'이라 부른 건 몇 시간 전 벌어진 사건을 겪고 나서니 얼마나 내 처세술이 뛰어난 건가. 더불어 세상 절반을 알았으니 혹독한 시련이 가르쳐준 교훈은 결코 작지 않다.

후배에게도 집단구타를 심심찮게 당했던 창평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나는 불과 한 시간만에 터득한 머리 좋은 아이였다. 지금도 8월 그 날을 떠올리면 웃음이 피식피식 나오곤 한다. 내 깡다구를 단련하는데도 한 몫 단단히 한 셈이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시골아이  바로가기☜  를 만들고 있습니다. 고향, 추억, 맛있는 이야기가 그립거든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SBS 유포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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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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