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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주쿠의 고층빌딩 지역.

@BRI@'반일 감정도 일본생활 반 년이면 뒤바뀐다.'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 자주 접하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같은 말들을 입에 담기가 쉽지 않다. 일본에 대한 칭찬은 자칫 '친일'로 비쳐져 주위로부터 비난의 시선을 받기 쉽고, 그렇다고 덩달아 일본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이 보고 겪은 현실을 부정하는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일본 거주자들에게 이국 생활의 어려움에 더해 다른 차원의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있다. 일본에 대한 인식변화는 한국인들의 일본관이 선입견이나 단편적인 정보에 근거하거나, 한국인들의 일본관이 일본사회의 특정 단면만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론과 인터넷에 넘치는 일본에 대한 정보 홍수는 역설적으로 이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문제는 일본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70년대 80년대나, 정보 과잉 상태에 있는 현재에 있어서도 한국인들의 일본관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정보량에 상관없이 한국인들이 접하는 일본 정보는 일본의 본모습을 반영하기 보다는 한국인들이 보고자 하는 일본의 모습인 경우가 많다.

게이오 대학 둘러본 한국 대학 관계자의 소감

▲ 일본 도쿄의 하라주쿠 거리 풍경
ⓒ 김귀현
필자가 보고 겪은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서 우리들이 일본에게 배워야 하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일본요! 와서 보니까 거의 배울 게 없네요. 우리도 거의 하고 있는 것이 많아요."

필자가 소속하고 있는 게이오대학 후지사와 캠퍼스를 둘러본 어느 대학교 관계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 관계자는 소속 대학교에서 새로운 도서관을 건립한다면서 이에 앞서 세계 유수의 대학을 찾아다니며 경험과 노하우를 배우고 있다고 방문 목적을 밝혔다. 관계자들을 외국에 파견한 것은 외국의 도서관들이 한국에 비해 무언가 앞서 있는 게 있을 거라는 기대를 전제로 한 것일 것이다.

이 관계자는 무언가 특별한 시스템, 기자재, 서비스가 있을 것을 기대하고 일본의 유수대학들을 방문했을 것이다. 도서관을 짓는 것은 비용이 허락한다면 어느 학교나 가능한 일이다. 외국의 고가 데이터베이스를 구입하거나, 최신의 기자재를 도입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도서관 시설을 갖춘다는 것과 그 도서관이 최상의 성과를 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제 일본 노조로부터 배울 게 없어요. 일본 노조는 이미 사측에 굴복했어요."

몇 년 전 양국의 노동단체 교류 모임에 참석한 한국의 노조단체 한 간부가 냉소적으로 내뱉은 말이다. 일본의 노동 단체가 한국에 비해서 덜 강경하고 덜 투쟁적인지는 모르겠다. 그 간부의 눈에는 그런 것이 일본 노동운동의 퇴조로, 자본에 굴복한 일본 노조로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닛산자동차는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종업원 15만명의 7.5%에 해당되는 2만명을 해고했다. 그러나 해고된 2만명이 대규모 집회를 열어 경찰과 난투극을 벌여 사상자가 발생하거나 아니면 본사 건물을 점거해서 농성을 벌였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후로 닛산은 보기 좋게 경영재건에 성공했다.

"모든 책임은 저에게!" 교장들의 자살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필수과목 수업시간을 입시과목 수업으로 전용한 한 고등학교 교장이 자살을 하면서 남긴 유언 중 일부다. 물론 학생들에게도 "흔들림 없이 공부하기를 바란다"는 당부도 함께 남겼다.

2006년 일본 전국의 고등학교에서 통일시험(한국의 수능 시험에 해당하는 시험)의 시험과목은 아니지만, 문부성 지침에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어 있는 과목의 수업시간을 입시과목 수업으로 전용한 사례가 전국적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수만명의 학생들이 필수과목 수업시간 부족으로 대학 진학이 어렵게 된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대부분의 학교장들은 변명보다는 학부모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거나, 몇몇 교장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물론 이들의 죽음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겠지만 문부성은 문제가 된 해당 학교에 특례를 적용, 보충수업을 통해 필수과목 수업 일수를 채우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일단락 됐다.

"고이즈미 정권 종언과 함께 정치계에 있어서 저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됩니다."

지난 9월 15일 고이즈미 수상과 함께 우정민영화 등 '구조개혁'을 이끌어 왔던 다케나카 헤이조 총무성 장관이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고이즈미 내각 출범과 함께 학자 출신으로 고이즈미 내각에 참가한 다케나카씨는 '내각은 정치가를 우선적으로 기용해야 한다'는 자민당의 반발에 참의원 선거를 통해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지만, 고이즈미 내각과 함께 정치인으로서 길을 접었다. 아베 수상 취임 2개월이 경과하고 있지만 다케나카씨 관련 뉴스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앞의 두 사례는 한국인들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을, 뒤의 두 사례는 일본의 현실을 제시한 것이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에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의 저변에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한국에 비해서 앞선 면이 있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하다.

일본에서 배울 게 있다? 없다?

이는 일본 예찬자는 물론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일본에서 새로운 행정용어가 만들어지면 얼마지나지 않아 한국에서도 같은 용어가 등장한다. 그 이외도 눈에 띄지는 않지만 한국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많은 부분들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내용으로 갱신을 거듭하고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서양의 개념을 들여 오거나 어떤 경우는 공모를 통해서 국민의 아이디어를 빌리기도 한다. 그러나 수입된 개념과 제도는 한국 현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공모는 해당 기관의 실적은 될지언정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고 만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그래서 일본에서 배울 게 있다는 말이냐 없다는 말이냐'고 필자를 다그칠지도 모르겠다. 그 대답은 필자가 제시하는 것은 아니고 독자분들 스스로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고민해서 얻는 결론이야말로 본인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분들의 판단을 돕기 위한 몇가지 시점은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일본의 외형으로 일본의 본질을 파악하지 말라는 것이다. 뉴스나 인터넷을 통해서 경기회복지수, 주가 등등 다양한 숫자가 일본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듯이 비쳐진다. 이런 숫자들은 변동하는 일본 사회의 한 순간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둘째, 개인적인 경험으로 일본사회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 상대에 대한 냉소와 분노를 가지고는 상대에 대해서 제대로 배울 수 없거니와 상대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방도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막부 말기의 사상가 사쿠마 쇼잔이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서양문명을 이루는 기술(아트)를 실제로 만들어 봄으로서, 그 원리를 알게된다.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그 시점에서 서양인과 같은 눈높이에 서서 기술을 응용하고 개량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서양과 경쟁할 수 있고 마침내는 서양에 대항하거나 서양을 뛰어 넘을 수가 있다."(<일본의 근대1(중앙공론)>서 재인용)

덧붙이는 글 | 필자 이홍천씨는 현재 일본 게이오대학 정책미디어연구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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