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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수업을 맡으면서 어떻게 수업을 펼쳐나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 한두 시간의 특강이 아니고 지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업이 끝난 뒤 아이들의 변화를 가져 와야 한다. 하지만 우선 급한 것은 당장 아이들이 논술에 재미를 붙이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논술 수업의 출발점은 아이들을 고민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 논술은 이론이 아니라 실기이므로 직접 써보게 한다는 것이다. 고민과 쓰는 작업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가 바로 논술의 열쇠라 할 수 있다.

그 방안의 하나로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논술거리를 주는 것이다. 논술로 지식의 량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제시되는 지문은 아이들이 읽고 이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지료가 제시되어야 한다.

아무리 흥미가 있는 논술거리라도 직접 써보라고 하면 아이들은 어떻게 쓸지를 몰라 힘들어한다. 그래서 모둠을 만들어 어떻게 쓸 것인가를 놓고 토의하게 한다. 모둠은 4명으로 하고 이 모둠을 통해 스스럼없이 자기 생각을 펼치고 정리하여 발표하고 평가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 과정에서 글의 흐름은 나름대로 짜이게 된다. 이 과정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 (가)글을 읽고 (나)글을 논거로 하여 (가)글의 뒷부분을 완성하시오.(1600자 내외로)

(가)
옛날 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아주 독특한 재판 풍습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건이 왕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큰 사건이면 보통의 절차에 따라 재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재판을 진행하였습니다.

재판은 그 나라의 가장 큰 경기장에서 열리게 됩니다. 피고인을 경기장 안에 혼자 들여보냅니다. 그 경기장에는 2개의 문이 있습니다. 한쪽 문안에는 그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기다리게 하고, 다른 쪽 문 안에는 굶주린 사나운 호랑이가 한 마리 들어있습니다.

물론 피고인은 어느 문안에 누가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피고인은 왕이 지시할 때 한 쪽 문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만약 그 문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나오면 그는 무죄로 인정되어 그녀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며, 호랑이가 나오면 그는 유죄로 인정되어 호랑이에게 물려 죽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지금 생각하면 이 재판은 공정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피고인이 문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신의 뜻에 따라 그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여기며 왕과 백성들은 그 재판을 공정한 재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나라에는 아주 멋진 젊은이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평민의 신분이었지만 너무나도 멋져 왕의 딸인 공주의 마음까지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와 공주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법은 평민과 왕족인 공주가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왕은 공주와 그 젊은이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화를 내었습니다. 공주를 평민에게 시집보낼 수 없었고, 또한 법에도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결국 재판에 회부되었고 왕의 명령에 따라 보통의 절차 따른 재판이 아닌 큰 경기장에서 열리는 특별한 방식에 의해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자인지 호랑이인지를 선택하는 재판 말입니다. 그 젊은이가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 문을 선택하면 젊은이는 그녀와 결혼을 해야 되고, 사나운 호랑이가 있는 문을 선택하게 되면 곧 바로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 재판의 결과로서는 젊은이는 공주와는 절대로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공주는 그 젊은이가 자기에게 재판 당일 눈으로 어느 문을 택할 것인지 물어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니까요. 그래서 공주는 그 젊은이를 사랑한 나머지 재판의 비밀, 즉 어느 문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지, 어느 문에 사나운 호랑이가 있는지를 공주의 힘으로 알아내었습니다.

그러나 공주는 몇 날 며칠을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공주로서 지금까지 누렸던 오만과 질투 그리고 소유욕이 공주를 괴롭혔고,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에 슬픔에 휩싸였기도 하였습니다.

드디어 재판이 열리는 날 경기장에는 많은 사람과 왕, 공주를 비롯한 요인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도 경기장 안으로 들여보내졌습니다. 그의 앞에는 두 개의 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방청석에 있는 공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공주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문을 택할지를. 그 때 공주는 두 문 중의 한 쪽문을 가리켜 젊은이에게 눈짓을 하였습니다. 그는 공주가 가리킨 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습니다.

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주는 자기가 사랑하는 젊은이가 사나운 호랑이에게 물려 죽게 할 수 없어서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 쪽을 가리켰을까요? 아니면 사랑하는 젊은이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눈뜨고 볼 수 없어서 호랑이가 있는 쪽을 가리켰을까요? 독자 여러분들도 공주의 입장이 되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겠습니까? - 프랑크 리챠드의 <숙녀인가 호랑이인가>

(나)
우리는 '소유란 삶의 방식'에 집착하는 한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 진정 행복해 지려면 오히려 소유가 아닌 자신의 '존재'에 집착해야 한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소유' 개념은 인류 역사 전체로 보았을 때는 오히려 낯선 개념이다. 소유란 삶의 방식은 서구 산업 사회의 생존 방식일 뿐이다. 예수, 석가모니 등 이전에 거의 모든 '인류의 스승'들은 '존재의 삶의 방식'을 강조했다. 우리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갖고 있으면 된다. 우리가 불행해지는 것은 생존의 필요성을 넘어서서 더 많은 물질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의 스승'들은 행복한 삶의 조건으로 '무소유의 삶', 즉 '존재의 삶의 방식'을 제안한다.

존재의 삶의 방식이란 '어떤 것을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며 세계와 하나가 되게 살아가는 방식'이다. 소유에 집착한 사람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일한다. 그러나 자기 존재에 충실한 사람은 그 일이 자신의 삶을 더욱더 충실하게 해주기 때문에 일에 열중한다.

또, 소유에 집착한 사람은 자기 것을 빼앗아 갈까봐 다른 이들에게 적대적이지만, 존재에 충실한 사람은 빼앗길 것이 없기에 다른 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지식에 있어서도 소유에 집착한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이 파괴될까봐 자기 정당화에 급급한 반면에, 존재에 충실한 사람은 더 나은 완성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자기 지식을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이 논제의 가장 큰 핵심은 공주가 가리킨 문에서 호랑이가 나오느냐 숙녀가 나오느냐가 아니라 공주의 사랑이 소유에 근거한 사랑이냐 존재에 바탕을 둔 사랑이냐 하는 것이다. 소유에 근거한 사랑이라면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뺏길 수는 없으므로 호랑이가 나올 것이고, 존재에 바탕을 둔 사랑이라면 남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랑은 아름다워질 수 있으므로 당연히 숙녀가 나올 것이다.

그가 문을 열자 그를 향해 달려드는 것은 호랑이었습니다. 그는 호랑이에게 물어뜯기면서 공주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눈을 감았습니다. 공주는 사랑하는 사람의 끔찍한 마지막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다른 여자에게는 보낼 수 없었어요. 그래도 내 사랑이 영원할 테니 당신은 내 사랑 안에서 사세요."

공주는 태어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원하는 것을 소유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유하지 않고서는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를 다른 여인에게 보내면 그와의 사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에 그를 죽여서라도 자신의 곁에 두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공주는 이상해져 갔습니다.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혼자 웃곤 했습니다. 처음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리라 여겼던 왕은 시간이 지나도 공주의 혼잣말이 멈추지 않자 하루는 공주를 불러 다그쳤습니다. 돌아오는 공주의 대답에 왕은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아바마마, 전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요."

그렇게 2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공주의 혼잣말은 그동안 하루도 멈추는 날이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왕은 왕궁의 의사들과 공주의 혼잣말을 멈추게 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의사가 말했습니다. "공주께서 원하는 것은 그 젊은이입니다. 젊은이를 곱씹지 않으면 젊은이를 잃을까 두려우신 것이죠. 그렇다면 공주께서 젊은이를 곱씹어 않아도 마치 곁에 젊은이가 있는 것처럼 될 수 있도록 젊은이와 연관된 모든 것을 공주 곁에 두는 것이 어떨는지요?"

무슨 방도든 해결책이 필요했던 왕은 그 의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와 연관 있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를 떠올릴 수 있게 많은 것들이 공주에게로 전해졌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공주의 방은 온통 젊은이의 흔적들로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공주의 혼잣말은 멈추지 않는 듯했고, 왕이 또 다른 방도를 찾으려 할 때쯤 한 남자가 왕궁을 찾아왔습니다. "전 그의 오랜 친구입니다. 공주에게 전해 들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것은 젊은이가 죽기 전날 공주에게 남긴 편지였습니다. 그는 편지를 전하며 말했습니다. "공주님의 소유욕은 끝이 없군요." 방으로 돌아온 공주는 젊은이의 편지를 뜯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공주님, 얼마 전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순간순간 당신을 내 곁에서 보내기 싫어서 안달하는 나를 발견하며 내가 이런 모습이면 당신을 소유하고픈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어 읽은 책입니다. 그 책에서 나는 내가 당신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의 사랑이 한층 깊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내일 심판의 날에 심판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서로를 소유하지 못함에 슬퍼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사랑이 존재함을 안다면 우리의 사랑은 그것으로 아름답습니다.

공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공주는 자신이 그와 자신의 사랑의 존재를 의심하고 소유하려 한 지난 2년이, 떠난 그를 얼마나 괴롭게 했을지 생각하며 후회했습니다. 그 후 공주는 다시는 혼잣말을 하지 않았고, 그녀의 방을 가득 메웠던 그의 흔적들도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았습니다.

이렇게 그를 놓아주고 소유욕과 집착에서 벗어나자 공주는 그녀를 괴롭히던 그를 잃을 지도 모른단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걸렸습니다. 어딘가에서 그가 존재하고 있고 그들의 사랑도 존재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 부산국제외고 3학년 김도연


이 글에서 공주 사랑 역시 소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며 호랑이를 선택하였다. 하지만 지문에서도 말하고 있듯 소유에 근거한 삶으로는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 공주 역시 그 남자를 영원히 소유하기 죽음의 문을 가리켜 주었지만 그로 인해 공주는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

이 글의 창의력과 논리력은 여기서 돋보인다. 공주가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 존재의 삶으로 옮겨 가는 과정이다. 공주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한 과정에서 젊은이의 친구가 등장하고, 이 친구에게서 받은 젊은이의 편지로 공주는 소유의 헛됨을 깨우치고 존재의 삶으로 옮겨간다.

아이들은 이 과정을 힘들어하지 않았다. 논술거리도 재미있어 하였고, 서로 토의하고 발표하고 평가하는 과정도 즐겼다. 논술은 고민을 즐기는 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태그:#통합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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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행복에서 물러나 시골 살이하면서 자연에서 느끼고 배우며 그리고 깨닫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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