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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보기]버지니아텍 보도의 주역 한나영 시민기자 TV를 보고 있던 저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기사로 올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취재수첩을 꺼내 들었습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지만 해외통신원과 시민기자 경력 5년 차의 감각으로 보도 내용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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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미국 버지니아 주의 해리슨버그에 살고 있는 시민기자 한나영입니다. 오마이뉴스 해외통신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저는 지난 4월에 발생한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 당시의 취재활동과 <오마이뉴스> 국제부와의 협력, 그리고 기사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 4월 16일 화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식사준비를 하면서 미국의 공영 라디오방송인 NPR을 듣게 되었습니다. 버지니아공대에서 총기사건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저의 첫 반응은 "또 총기사고야?"라고 할 만큼 시큰둥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미국은 총기 소유가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이기 때문에 총기 관련 사고도 많습니다.

 

과거에도 캠퍼스 총기 사고가 많았던 터라 저는 이번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2시경에 집에 돌아와 TV를 켰을 때 충격적인 소식이 전 미국을 강타하고 있었습니다. ABC, CBS, NBC, FOX 등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모든 정규 방송을 중단한 채 버지니아공대의 참극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한 아시아계 남성이 기숙사와 강의실에 난입하여 총기를 난사했고 그 결과 무고한 학생과 교수들이 30여명 사망하고 10여명이 부상당했다는 끔찍한 소식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며 역대 최악의 총기 사건이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보도였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취재하고 싶었다

 

TV를 보고 있던 저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기사로 올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취재수첩을 꺼내 들었습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지만 해외통신원과 시민기자 경력 5년 차의 감각으로 보도 내용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화면은 카메라로 찍었고 혹시 특종 보도가 있을까 하여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 역시 이 사건을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교실에서 TV 속보를 봤다고 하더군요.

 

그날 밤, 아이들의 학교 행사가 있었는데 교장선생님은 버지니아공대 총기 사건 희생자에 대한 묵념을 제안했습니다. 미국 전체가 버지니아공대의 충격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원고를 쓰려고 컴퓨터를 켰을 때 예상했던 '이심전심' 쪽지가 와 있었습니다. 바로 <오마이뉴스> 국제부의 김경년 부장이 보낸 쪽지였습니다.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했는데 한 기자님 관할구역이 아닌지요. 살펴보시고 짧게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낮에 봤던 텔레비전 기사를 중심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메신저로 연결된 김 부장님으로부터 '지령'(?)이 떨어졌습니다.

 

"한 기자님, 버지니아 공대에 다녀와야겠어요. 지금 오연호 대표가 몸이 달아 있어요. 시민기자를 왜 활용하지 않고 있냐고요."

 

'몸이 달아있다'는 적나라한 표현으로 기사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오 대표님의 지령에 따라 저는 두 딸들을 데리고 사건 다음 날 아침 일찍 뉴스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범인이 한국계... 조심해야 되지 않을까?

 

차로 두 시간 반이 걸리는 버지니아 공대로 가면서 많이 흥분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시민기자로서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된 비극의 현장을 취재한다는 것이 저 개인으로서는 기회이자 영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흥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운전 중에 들은 NPR의 현장 기자회견에서 범인의 신분이 언급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범인은 버지니아 공대에 재학 중인 영어 전공 4학년. 승희 조. 한국인."

"엄마, 취재고 뭐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한국인'이라는 말에 두 딸들은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묻기도 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버지니아공대에 가는 걸 알고 있는 한국의 가족으로부터도 전화가 왔습니다.

 

"방금 전 끝난 기자회견에서 범인이 한국계라고 하더라. 조심해야 되지 않을까."

 

나중에 기사로도 나갔지만 이런 염려는 순전히 기우였습니다. 제가 버지니아공대에서 만나본 미국인들은 그 어느 누구도 범인의 국적이나 인종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걱정이나 불안한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의욕 넘치는 시민기자였습니다. 마침내 버지니아공대가 있는 블랙스버그에 거의 도착했을 때 국제부의 김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어디만큼 가셨죠? 도착하면 바로 현장의 모습을 스케치해서 전해주세요. 저도 오늘 밤 이곳에서 밤을 샐 예정이니 생생한 기사 부탁드립니다."

 

밤을 새면서 독자들에게 현장의 소식을 전하려는 국제부와 직접 발로 뛰는 시민기자의 협력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오마이뉴스> 독자들에게 생생한 소식을 전할 수 있다고 하니 제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습니다.

 

버지니아 공대는 슬픔에 잠겨있었습니다. 밝은 햇볕이 내리쬐는 아침이었지만 캠퍼스에는 적막감마저 감돌고 있었습니다. 경비도 삼엄했습니다. 도처에 깔린 경찰, 경찰차, 경찰견들과 기자들, 수많은 언론사 차량들을 보면서 이곳이 세계를 경악케 한 현장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주차증을 얻기 위해 방문자센터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비상상황이기 때문에 폐쇄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곳을 빠져나와 주차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던 딸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엄마, 저기 프레스 차량들만 주차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주차해 봐. 엄마도 기자라면서."

 

취재현장에서 나는 <오마이뉴스> 특파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는 때로 정체성의 혼란을 갖기도 합니다.

 

'시민이야? 기자야?'

 

시민과 기자의 합성어인 '시민기자'라는 말은 누구나 자발적으로 기사를 쓸 수 있는 기사생산자로서 원고료도 받게 하고 기자라는 거창한(?) 타이틀도 받게 하지만 직업 기자가 아닌 만큼 한계도 있습니다. 저 역시 이런 고민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버지니아공대 총기 사건에서는 저 자신을 <오마이뉴스>를 대표하는 특파원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나라 언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프레스 전용 주차장 입구에서 주차관리인이 진입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누구던가요? 이미 결심을 끝낸 시민기자 특파원이 아니던가요? 그래서 저는 관리인에게 '오마이뉴스 해외통신원'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관리인은 특파원으로도 번역되는 'CORRESPONDENT' 명함을 찬찬히 읽어보더니 곧장 차단기를 치워줬습니다.

 

'그래. 나는 한국의 <오마이뉴스>가 파송한 특파원이지!'

 

그렇게 주차문제를 해결한 뒤 저는 국제전화를 통해 바로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했습니다.

 

"지금 현장에는 경찰들이 도처에 깔려있습니다. 건물들도 폐쇄된 상태이고요. 학생들은 버지니아공대의 상징색인 주황색과 자주색 옷을 입었습니다. 캠퍼스에는 NBC, FOX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방송국 차량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짐을 싸서 교문을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NPR에 따르면 버지니아공대는 이번 주에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이고 사고가 났던 노리스홀에서는 이번 학기 내내 수업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번 사건의 충격으로 상담이 필요한 학생들은 늦은 시간까지 카운셀링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흥분된 목소리로 사건 현장의 이모저모를 두서없이 전달하던 저에게 김 부장은 이런 주문을 했습니다.

 

"한 기자님, 그렇게 '막' 말씀하지 마시고 좀 정리해서 천천히 불러주시면 좋겠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제가 흥분해서요. 전화 끝나면 이곳에 재학 중인 한국 학생들을 만나보고 이따 2시에 있게 될 추모집회 내용도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끊습니다."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할 때는 딸아이가 저 대신 전화를 받아 현장의 모습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의 데스크와의 몇 차례 전화통화를 거쳐 버지니아공대 관련 기사는 최종 3신까지 나갔습니다. 한국 시간으로는 한밤중이었던 그 때 버지니아공대의 현장 분위기와 한국 학생들과 미국 학생들 인터뷰, 부시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추모집회, 노리스홀과 웨스트 엠블러 존스턴 참사 현장, 세계 언론인들이 총 집합한 미디어 전쟁 등이 관련기사로 나갔습니다.

 

딸들도 함께 한 생생한 취재 경험

 

현장의 분위기는 그런대로 전달이 잘된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사진이었습니다. '이미지의 위력'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잘 찍은 사진 한 장은 오히려 백 쪽짜리 기사보다 힘이 있습니다. 그런 만큼 저는 생생한 현장 사진을 빨리 전송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임시 프레스센터로 지정된 버지니아공대 동창회관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번듯한 포토 아이디를 가진 전업기자가 아닌 까닭에 시간이 좀 걸려 취재 허가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복잡한 통과의례를 거친 뒤 뒤늦게 프레스센터에 입성한 저는 마침내 기사를 작성하고 사진 전송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오마이뉴스> 연락을 받고 버지니아공대로 떠났던 오전 7시 반부터 집에 도착한 11시 반까지 무려 16시간이 걸린 긴 하루였습니다.

 

하루 종일 시달려 몸은 피곤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 현장을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하고 사진을 전송했던 일은 대단히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학교도 빠지고 생생한 기자 체험학습을 할 수 있었던 제 딸들에게도 이번 취재 경험은 대단히 유익한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두 딸 가운데 하나쯤은 이런 생생한 체험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 앞으로 훌륭한 전업기자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오마이뉴스>에 감사를 드립니다.


태그:#버지니아 공대, #세계시민기자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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