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벌교 시가지
ⓒ 조갑환
소설 <태백산맥>의 고향, 벌교에 직장 발령이 나서 내려온 지가 벌써 6개월이다. 올 겨울, 2월부터 벌교에서 생활하였다. 벌교에 내려온 이후 벌교이야기를 한 번 써보겠다고 작정하고 있었으나 그럭저럭 지금까지 못 쓰고 있다.

처음 벌교에 오면서 벌교에 대한 인상은 ‘순천에 가서 인물자랑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돈 자랑 하지 말고 벌교에 가서 주먹자랑 하지 말라’는 남도사람들이 말하는 주먹이었다. 누구나 벌교에 발령이 나서 간다고 하면 ‘그 쪽 주먹이 센 곳인데’ 하며 은근이 겁을 주고는 했다.

그러나 벌교에 와 6개월을 지내면서 나는 거의 주먹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벌교 분들에게 물어 보았다.

“벌교에서 주먹자랑 하지 말랬는데 전혀 느낄 수 없으니 주먹들이 다 떠나고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벌교 호랑이들이 늙어서 이빨이 다 빠져버린 겁니까.”

언젠가 말을 꺼내었더니 벌교 분도 웃으면서 그 말의 유래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벌교는 포구이고 순천, 여수, 고흥, 목포 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라서 일제 강점기부터 일본사람들이 내륙에서 생산된 농산물들을 벌교포구를 통해서 가져갔다고 한다. 당시에 그것을 아니꼽게 본 벌교 사람들이 일본 사람을 두들겨 패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의 입에서 ‘벌교에 가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퍼뜨려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벌교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민족 정신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요즈음에 타 지역 사람들이 벌교라 하면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소설 <태백산맥>이고 다음에는 꼬막일 것이다. 벌교를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할 일이 <태백산맥>일 것 같아서 1권을 읽었는데 나처럼 역사 의식에 관심이 적은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 지루해서 그만 읽고 말았다.

그래도 1권에서 벌교의 지명 및 당시의 시설들이 거의 나온다. <태백산맥>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시설들이 소화다리인 듯싶다. 벌교 천을 잇는 다리인데 일제강점기, 1931년에 생긴 다리로서 벌교에서 순천, 목포 쪽으로 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 했다고 한다.

이 다리를 비롯해서 홍교, 금융조합, 벌교역, 현부자네 등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배경의 문화재들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지고 있는 벌교의 자랑스러운 문화재들이다.

벌교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 중에는 가을부터 봄까지는 꼬막정식이 유명하고 여름에는 순천만에서 잡히는 장뚱어 요리가 유명하다. 장뚱어는 순천만에서 낚시로 잡는데 탕, 구이, 전골요리가 있다.

나는 벌교에 와서 꼬막정식을 즐겨 먹었었다. 벌교에 손님들이 찾아오면 나는 주로 꼬막정식을 대접하였다. 꼬막정식 1인분에 만원이라 부담도 덜하고 벌교 특산물이어서 대접받는 사람도 한 번 먹어보고 싶어 한다.

꼬막정식을 먹을 때는 먼저 삶은 참 꼬막을 한 바가지 갖다 준다. 나는 처음에 와서는 꼬막을 손가락으로 까먹었다. 그런데 그렇게 먹는 게 아니란다. 꼬막의 뒷부분 옴팍한 곳에 젓가락을 끼고 젖히면 꼬막의 뒤쪽이 열린다. 그렇게 해서 꼬막을 먹는데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이제는 제법 잘 까먹는다.

벌교읍내는 한산하다. 벌교 상인들은 장사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한탄이다. 교통이 좋아져서 순천에 다니는 시내버스가 자주 왕래하기 때문에 벌교사람들이 주로 순천의 대형마트를 이용한다.

또한 전에는 고흥사람들이 벌교에서 물건들을 사가지고 들어가고는 했는데 지금은 우회도로가 나버려 벌교를 거치지 않고 가 버린다.

전남의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벌교도 젊은이들이 떠나고 없다. 젊은이들이 다 대도시로 떠나고 노인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난다. 인구가 줄다보니 장사가 안 되고 장사가 안 되다 보니 상인들도 하나 둘 인근 도시로 떠나는 실정이다.

그래도 벌교가 제법 붐비는 때는 4, 9일 열리는 5일장이다. 그때는 송광, 외서, 동강, 남양 등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집에서 지은 농산물, 고흥 만에서 잡히는 수산물들을 가지고 나온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없는 벌교에서 얼마나 소비가 될까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5일장만은 제법 붐빈다.

벌교에 장례예식장이 2개가 있다. 언젠가 장례예식장 사장하고 담소할 기회가 있었다.

“다른 장사는 다 안 되더라도 장례예식장만은 잘 되겠습니다. 지금 벌교나 인근에 노인들뿐이잖습니까. 전부 사장님의 대기 고객들 아닙니까. 하하하.”

웃으면서 애기했더니 장례예식장 사장은 별로 전망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런 대로 잘 되는데 이 사업도 앞으로 10년 밖에 못할 것 같습니다. 10년 후에는 자식들이 서울이나 광주로 운구해가서 장례를 치를 것입니다. 지금도 조문객들이 많은 자기들이 사는 도시에서 장례를 치르려고 하거든요.”

월요일이면 나는 광주에서 벌교로 내려온다. 벌교에 오는 길은 주암호를 끼고 달리는 2차선이다. 순천 송광을 지나 외서로 달리는 길은 산골짜기를 따라서 달린다.

아침에 벌교로 가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길 옆에 서 있을 때가 있다. 그러면 차를 세워서 벌교까지 꼭 태워드리곤 한다. 저 산골에서 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너무 정겹다.

그 분들은 저 산골에 흐르는 계곡물처럼 마음들이 맑을 것만 같다. 그 분들은 벌교의 병원에 간다든가 장에 가시는 분들이다. 벌교에서 그 분들을 내려드리면, “오메 정말 고맙소라. 아이고 선상님 복 많이 받을쇼 잉” 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신다.

나도 그럴 때 시골에 사시는 우리 장인 장모를 모시는 것 같아서 가슴 뿌듯하다. 순박하고 마음씨 고운 남도인들의 마음들이 광주에서는 찾아 볼 수 없지만 벌교 주위에서 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마음에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태그:#벌교, #태백산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여행에 관한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여행싸이트에 글을 올리고 싶어 기자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