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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절없이 살해된 아프간 한국 인질의 주검을 확인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무엇보다 대처할 방안이 마땅치 않다는 점에서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듯한 무력감과 좌절감이 엄습한다. 오죽하면 청와대조차 어제 성명에서 "수감자 맞교환은 우리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탈레반의 요구에 분명하게 선을 긋고 나섰을까.

탈레반이 인질을 추가 살해할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으로 우려되고 있는 가운데 오늘(8월 1일) 다수의 신문들은 사설을 통해 아프간 정부와 사실상 이번 사태 해결의 키를 쥐고 있는 미국의 전향적인 자세를 일제히 촉구했다. 어제 정부가 청와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에둘러 미국측의 전향적인 자세를 촉구하고 나선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번 사태 해결의 키 쥐고 있는 미국

▲ 시민단체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회원들이 31일 저녁 주한 미 대사관 앞에서 아프간 피랍 사태 해결을 위한 미국의 행동을 촉구하며 펼쳐놓은 피켓 위에 희생자 배형규 심성민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촛불을 올려놓았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한겨레>는 탈레반이 요구하고 있는 수감자 석방이 미국의 동의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는 점에서 미국측의 성의 있는 태도를 촉구했다. "테러 세력과는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인 국제원칙을 모르지 않으나, 우리로서는 21명의 무고한 생명을 안전하게 구하는 것이 일반적 국제원칙 보다 우선한다"는 점에서 "미국은 한국 정부가 국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에 협력해 온 점을 고려해 이번 인질 사태 해결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일 것"을 주문했다.

<경향신문>은 어제의 청와대 대변인 성명이 "자칫 미국을 궁지로 몰아넣음으로써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고, 협상 주체인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면서 "미국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문제라는 점에서 마지막 카드를 뽑아든 한국 정부의 입장을 존중해 인도적 고려를 해 주길 당부"했다.

<한국일보> 역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는 미국이 과연 어떤 도움이 되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돕고 있는 한국에 대해 미국이 인질 구출을 위한 실질적인 협력을 외면한다는 것은 동맹국의 도리가 아니"라고 질타했다.

<세계일보>는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탈레반의 요구에 대해 우리 정부가 '한국이 감당 못할 요구'라는 표현을 쓴 것과 관련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아프간을 돕기 위해 파병까지 한 한국의 목소리가 무시되어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중앙일보> 또한 "미국도 협상에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고, <조선일보> 역시 '국제사회의 유연한 입장'을 촉구했다.

거의 모든 신문들이 한결같이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적극적 대처를 주문했다. 국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프간에 파병한 한국 정부의 처지나 테러와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동맹국의 입장'을 고려하더라도 그렇거니와 인도적 차원에서라도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유연한 대응을 촉구했다. 탈레반 수감자와 인질 맞교환 요구를 적극 수용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 언론은, 또 한국 정부는 과연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미국의 '선처'를 호소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는 것일까?

아프간 정부, 치안책임 피할 수 없을 것

먼저 아프가니스탄 정부부터 따져보자. 인질 사태의 직접적인 책임은 누가 뭐라 해도 아프가니스탄 국내 치안을 책임져야 할 아프가니스탄 정부에게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현지 사정이 위험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위험한 지역을 여행하는 외국인들은 안전 확보를 위해 스스로 조심하고 주의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치안책임이 면책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자국민은 물론이고 정당한 절차를 밟아 입국한 외국인의 안전에 대해 무한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이런 그들이 자신들의 무능과 부패로 민심을 잃고, 탈레반의 활동 영역을 넓혀줘 결과적으로 명색이 '고속도로'라는 곳에서 집단 인질 사태를 빚은 데 대해서 그들은 할 말이 없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전쟁의 참화와 빈곤으로 고통 받고 있는 현지 주민들을 위한 '의료 봉사'라는 '선의의 목적'을 갖고 입국한 한국인들이라는 점에서 그 책임은 더더욱 무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책임이 한국인 인질들에게 있는 것처럼 떠넘기면서 탈레반의 인질 석방 요구에 불응하고 그나마 생존해 있는 인질 모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군사작전 가능성을 비치고 있는 것은 한 나라를 운영하고 책임지고 있는 '합법 정부'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석방에 성의 보이지 않는 아프간 정부

▲ 아프간 피랍자 가족들이 조속한 인질석방을 위해 미국정부가 나서줄 것을 요구하는 호소문을 전달하기 위해 1일 오후 광화문 미대사관을 방문했다. 대사관을 나선 피랍자 가족들이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외국인의 안전에 책임을 질 수 없다고 한다면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외국인의 입국을 아예 '원천 봉쇄'해야 맞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외국인의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해줄 의무와 책임이 있으며, 이번 인질 사태에 대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인질들의 무사 석방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지금까지 취해 온 일련의 조치나 태도들을 보면 인질들의 무사 석방에 과연 관심이나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잘못되고 왜곡된 정보와 위선적인 협상 태도로 우리 정부와 국민을 기만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만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우리 정부는 한국인 인질 2명을 살해하고 추가 살해 위협을 하고 있는 탈레반에 대해서 ‘좌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와 함께 파병까지 한 동맹국 국민들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했고, 이들의 석방에 성의를 다하고 있지 않은 아프가니스탄 정부 또한 강력하게 규탄하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부는 한국인 인질을 추가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탈레반뿐만 아니라, 그런 살육을 방치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대해서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미국, 무고한 인질들의 생명 외면해선 안 된다

아프가니스탄의 치안 유지 책임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다국적군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또한 그 책임이 크다.

9·11 테러의 주모자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의 체포와 알 카에다 소탕을 명분으로 다국적군 파병을 주도한 미국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대한 제1차적인 원인 제공자 가운데 하나다.

미국이 주도한 다국적군은 오사마 빈 라덴을 넘겨주지 않고, 알카에다를 비호한다는 이유로 탈레반 정권을 군사력으로 축출하고 지금의 카르자이 정권을 세웠다. 카르자이 정권의 뒤에는 바로 미국이 버티고 있다. 치안 유지 책임 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은 혼미한 아프가니스탄 정국의 전개에 대해서 미국의 책임 또한 아프가니스탄 정부 못지않다.

무엇보다도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민주 정부 수립과 민주주의의 정착을 주요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민주정부와 민주주의의 가치는 무엇보다 인권과 생명의 존중이다. 무고한 인질들의 생명을 최우선시하는 것이야말로 다국적군 파병의 으뜸 가치일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에 동의한다고 해도 인권과 생명 존중의 가치를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지난번 교환이 마지막? 세상에 '마지막'은 없다

▲ 배형규 목사에 이어 심성민씨가 아프간 탈레반에 의해 추가 살해된 31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아프간사태 평화해결 촉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두 희생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무고한 인질들이 한명씩 차례대로 살해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테러와의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를 자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미국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장에는 그러한 살육이 탈레반의 만행을 전 세계에 폭로해 탈레반을 소탕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정당화시켜주는 구실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23명의 인질들이 차례대로 살해당했을 때 전 세계인이 겪을 충격과 그 증오가 부를 또다른 '테러의 유혹'을 감안하자면 그것은 부메랑이 되기 십상이다.

탈레반의 인질 살해는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것을 방치하는 것 또한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미국은 테러범들과는 결코 협상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지난 3월 이탈리아 기자 석방을 위해 탈레반 수감자를 풀어준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면서 이번에는 수감자의 석방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세상에 '마지막'은 없다. 그 때는 그래도 한명의 인질이었지만, 이번에는 무려 23명(이제는 21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테러범이나 테러단체와의 협상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인질-탈레반 수감자 맞교환 불가 입장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는 많다.

테러에 극단적인 강경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이스라엘마저도 그들이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하마스 무장단체에 붙잡힌 자국 병사의 석방을 위해 자신들이 구금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수감자 수백 명과의 맞교환 석방 협상을 제안했을 정도다.

이스라엘은 이 때문에 지난해 팔레스타인과 전쟁까지 치렀다. 그런 이스라엘 정부의 방침에 대해 미국은 '테러와의 협상'이라고 비난한 적이 없다.

목숨을 놓고 저울질을 할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한국인 인질 23명(이제는 21명)의 목숨이 이탈리아 기자 한 명, 이스라엘 병사 한 명의 목숨 보다 못하다는 것인지 미국에게 묻게 된다.

우리 정부가 보다 분명하게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에게 인질 교환 협상을 당장 시작할 것을 요청해도 될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을까. 언론 또한 마찬가지다. 단지 '동맹국'의 이름으로만 미국의 '선처'를 호소할 일이 아니다.

태그:#백병규, #미디어워치, #탈레반, #인질 살해, #아프가니스탄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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