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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성 사자문
ⓒ 이승철

"이 문이 바로 사자문입니다. 양의 문이라고도 하지요."

버스에서 내려 잠깐 걸어 올라간 곳은 예루살렘성 안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성문 앞이었다. 큼직큼직한 돌을 반듯반듯하게 잘라서 쌓은 웅장한 성이 자못 위압적이다.

"저 성문 위의 성벽에 두 마리씩 양쪽에 사자를 새겨놓은 조각이 보이지요? 저 사자조각 때문에 사자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가이드가 가리키는 성문 위의 성벽에는 정말 사자모양을 조각해 놓은 것이 보였다.

"지금 보시는 이 성은 성경에 나오는 그 예루살렘성이 아닙니다. 그 성은 아주 옛날에 바벨론의 침공에 의하여 무너져 버렸고, 이 성은 서기 1537년부터 42년까지 5년간에 걸쳐 오스만 터키의 술레이만 대제가 새로 쌓은 성이지요."

오스만 터키의 전성시대였던 당시에 술레이만 대제는 이곳을 튼튼한 요새로 만들기 위해 이 성을 쌓았다고 한다. 성의 규모는 그리 큰 편이 아니어서 둘레가 약 4km에 이 사자문을 비롯한 8개의 문과 34개의 탑, 24개의 망루가 세워졌다고 한다.

여덟 개의 문은 감람산을 마주 보고 있는 이 사자문을 비롯하여 서쪽에 있는 지중해의 욥바 항구로 통하는 욥바문, 시온산으로 통하는 시온문, 기드론 골짜기에 오물을 버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덩(Dung)문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오물성문, 그리고 성전 동쪽에 있는 황금문,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맞아죽어 순교한 장소 바로 앞에 있었던 스데반문, 성에서 가장 큰문이며 다메섹으로 통하는 다메섹문, 헤롯 안타파스의 궁전이 근처에 있었다는 헤로데문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 여덟 개의 성문 가운데 아주 특별한 문은 옛 성전 동쪽에 있는 황금문이라고 한다. 이 황금문은 다른 성문들에 비해 아주 호화롭게 만들어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 문은 사용하지 않고 굳게 잠겨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유대인들은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이 성문을 통하여 들어올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회교도들은 또 그들대로 심판의 날에 죽은 자들이 이곳에서부터 다시 살아나 일어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성안 골목길 풍경
ⓒ 이승철


▲ 예루살렘성의 해자
ⓒ 이승철

그래서 이 황금문 앞에는 많은 무덤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무덤군은 골짜기를 건너 감람산의 드넓은 면적까지 온통 무덤으로 뒤덮여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설에는 재림예수가 다시 이 세상에 올 때도 그 황금문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황금문은 회개의 문, 자비의 문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들이 들어선 사자문에도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을 세운 오스만 터키의 술레이만 대제는 꿈속에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 성스러운 도시에 성벽을 쌓지 않으면 사자에게 잡아먹힐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성벽을 쌓고 문을 세우면서 문 위의 성벽에 네 마리의 사자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자문 안으로 들어서자 길은 아주 좁아진다. 작은 승용차들이 겨우 비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 양쪽에는 고풍스런 돌담과 돌집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예루살렘의 구시가지로 불리는 옛 성안의 거리인 것이다.

성안은 종족과 종교적으로 크게 네 구획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유대교인들이 사는 거리와 기독교인들이 사는 거리, 그리고 회교도들이 사는 거리와 아르메니아인들이 사는 거리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서로 다른 종교 때문에 싸움이 자주 벌어지지는 않나요?"

성안이라고 해보았자 별로 넓지도 않은 곳에서 각 종파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것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특히 이곳은 유대교의 유대인들과 회교도인 아랍인들이 서로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다. 종족과 종교가 다르다고 어울려 살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위험한 분쟁지역이기 때문에 문제는 조금 달랐다.

"어, 이곳이 왜 이렇게 조용하지? 거참 이상하네."

골목길은 아주 한산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이상할 것 까지는 없지 않은가. 비좁은 골목길인데, 그러나 전에도 몇 번인가 이곳에 왔었던 일행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항상 몰려든 관광객들과 현지 주민들 때문에 걷기도 힘든 거리였다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들은 먼저 마리아의 어머니이며 예수의 할머니인 안나를 기념하여 세웠다는 성 안나교회로 들어갔다. 입구는 골목길 돌담 사이에 난 작은 쪽문 같았지만 안으로 들어서니 상당히 넓은 정원이 나타났다.

▲ 작은가게들이 있는 아랍인지역 골목풍경
ⓒ 이승철


▲ 마리아 탄생터
ⓒ 이승철

안마당 넓은 화단에는 커다란 야자수 나무가 서 있고 누군가의 흉상도 세워져 있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들어가자 옛 비잔틴 양식의 멋진 교회 건물이 나타났다. 이 교회가 바로 성 안나교회였다. 이곳은 본래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태어난 곳으로 성모마리아의 어머니 안나를 기념하여 세운 교회다.

이 교회는 서기 400년경에 최초로 세워졌으나 614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부분적으로 파괴되었고 불에 타버렸다. 그 후 모데스투스(Modestus) 수도사에 의하여 복원되었고 그 후 이 교회는 샤를르망 대제 때까지 수많은 사제들과 수도사들에 의하여 번영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서기1010년 무렵에 다시 파괴되었다. 칼리프 하킴에 의해서였다. 그 후 1099년 십자군 원정 때 폐허가 되었던 이곳에 다시 조그만 수도원을 세우고 베데스다연못의 38년 된 병자를 고쳐준 예수의 기적을 기념하였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1130년 무렵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큰 교회가 건설되었다. 이때 비로소 이 교회는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에게 봉헌되었다. 이 교회는 마리아의 출생 동굴이라고 전해졌던 곳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 후 이 교회는 베네딕트회 수녀들에 의해서 관리되어 오다가 1192년에 아랍의 영웅 술탄 살라딘이 이곳을 정복하여 코란을 배우는 학교로 활용하였다. 오스만 터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난 이후에는 안나 교회의 중요성이 무시되었지만 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은 멈추지 않았다.

오스만 터키는 크리미아 전쟁 때 프랑스가 원조해 주었던 호의에 감사하는 표시로 많이 파괴된 채 방치되어 있던 교회와 그 부지를 양도해 주었다. 그 후 마우스 신부가 교회를 재건하고 처음으로 발굴을 실시하였다.

1878년에는 아프리카 선교사들에게 위탁되었고, 그들에 의하여 선교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주변을 꾸준히 발굴하여 댐과 저수지들이 발견되었고, 비잔틴 시대의 교회 유적과 목욕조들 그리고 병자들을 치료하던 장소들이 발견되었다.

▲ 안나와 마리아 모녀상
ⓒ 이승철


▲ 울림이 좋은 안나교회 내부와 천정
ⓒ 이승철

"이 교회는 공명이 좋기로 소문난 교회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옛 페르시아 군이 침공했을 때도 이 교회는 울림이 너무 좋아서 파괴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교회 내부는 이 지역의 다른 교회들에 비해 오히려 검소하고 단조로운 편이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가이드의 말대로 울림이 정말 좋았다.

"이렇게 울림이 좋은 곳에서 노래 한 곡 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누구 노래 한 곡 하시죠?"

그러나 아무도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다. 할 수 없이 내가 앞으로 나섰다.

"멋진 노래 있잖아요? 나나무스꾸리가 불렀던 어메이징 그레이스, 그 노래 한 번 불러보세요?"

어메이징 그레이스라, 그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 나나무스꾸리가 매혹적인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들을 때면 영혼의 울림처럼 가슴 속을 파고들던 바로 그 노래가 아닌가.

더구나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남자인 내가 어찌 흉내라도 낼 수 있겠는가. 그래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울림이 좋은 곳에서 언제 또 노래할 기회가 오겠는가.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이 노래는 본래 악독한 아프리카 노예선 선장출신으로 후에 목사가 된 존 뉴턴(1725-1807)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신의 위대한 자비를 찬양한 노래다. 원곡은 영국에서 이민 간 미국의 청교도들 사이에 전해지던 민요인데, 에드윈 오델로 엑셀이 수집하여 편곡한 곡에 뉴턴이 자신의 찬송시를 덧붙인 것이다.

어설픈 노래였지만 교회 안의 울림이 좋아서 그런대로 들어 줄만 했던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울림이 유난히 두드러진 교회 내부의 구조가 어쭙잖은 내 노래를 멋지게 울려준 덕분이었다. 조금은 부끄럽고 쑥스러워 얼굴을 붉히며 자리로 돌아갔지만 조금 전의 그 멋진 울림 때문에 내 자신이 먼저 감동에 감싸이는 순간이었다.

"자, 이곳이 바로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이런 곳이 연못이라고? 밖으로 나오자 가이드가 연못이라고 소개한 곳은 절벽처럼 움푹 들어간 유적지다. 어떻게 이런 곳이 연못이었단 말인가. 베데스다 연못이라면 예수가 38년간이나 병에 시달린 사람을 치료해준 바로 그 연못 이름이다.

베데스다는 히브리어로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성경 요한복음 5장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이 다섯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양문이라고도 불리는 사자문에서 아주 가까운 지점이었다.

▲ 베데스다 연못풍경1
ⓒ 이승철


▲ 퇴락한 베데스다 연못풍경2
ⓒ 이승철

연못은 본래 길이가 100~110m, 넓이가 60~80m, 깊이가 7~8m 정도 되는 두 개의 쌍둥이 연못으로 되어 있는데, 이 연못은 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해서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든 장소이고 예수가 38년 된 병자를 고쳐준 곳이다.(요한복음 5:2~9)

기록에 의하면 베데스다는 양쪽에 두 개의 쌍둥이 연못과 가장자리에 네 개, 중앙에 한 개의 기둥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 요한도 '행각 다섯'에 관한 흔적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눈앞의 연못에 가운데에도 부러진 기둥이 한 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연못은 오랫동안 흙으로 덮여 있었으나, 1888년 발굴 당시 직사각형의 형태로 네 개의 회랑에 둘러 싸여 있었고, 그 측면에는 다섯 개의 회랑이 나누어져 있었다. 이로써 요한복음의 다섯 개의 행각이라는 기록이 입증된 셈이다.

예수시절에 치료받기 위해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던 연못은 그러나, 서기 1세기 무렵에 성전 근처에 '베르가트 이스라엘'이라는 대형 저수지가 만들어지자 베데스다연못은 사용이 중단되어 메워져버렸다. 그 후 서기 44년에 새로운 성벽이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서 북쪽에 만들어졌다.

헤롯 아그립바가 쌓은 성벽은 북쪽 골짜기에서 흘러들어오던 물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로마인들은 저수지를 메우기 전에 그 옆에 물 저장소를 하나 만들었다. 그렇게 사라져 버렸던 베데스다 연못이 거의 2천년이 지난 1888년에 발굴된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고 한다.

연못은 주변에 다른 건축물들이 세워지면서 잠식당하여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두 개의 움푹 파인 절벽 같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연못 안에는 연못을 메우고 건축물이 들어섰던 흔적으로 기둥과 주춧돌 같은 것들이 산재해 있는 모습이었다.

▲ 안나교회 정원 풍경
ⓒ 이승철

이 연못은 2천 년 전에는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칠 희망으로 모여들었던 제법 넓었던 연못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저히 그 시절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 비좁고 퇴락한 풍경으로 남아 있었다.

연못의 맞은 편에는 밑으로 깊이 내려갈 수 있는 층계가 놓여 있어서 내려가 보니 어두운 저 아래 더 깊은 곳으로 물이 흐르고 있어서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말라 버린 연못 밑으로 물은 아직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까지 둘러본 우리 일행들은 다음 코스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22일부터 2주간 북아프리카 이집트 남부 나일강 중류의 룩소르에서 중동의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까지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예루살렘성, #안나교회, #베데스다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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