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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명절에만 보는 친가 친척들을 만나는 날이다. 아버지 집은 아들만 4형제다. 그 가운데 아버지는 셋째다. 여우 같은 시누이가 없어서 그런지 며느리들의 신경전이 대단하다. 집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기 전, 나는 '오늘도 무사히 잘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또 어떤 어록이 탄생하려나?"

큰 집에 우리 가족이 도착하고 이어 둘째 큰아버지 가족, 작은아버지 가족이 도착했다. 제사 시작 전까지 '서먹서먹 개인플레이'가 시작된다. 어른들은 그래도 하하호호 이야기 하지만 명절때만 만나는 자식들은 어색할 뿐이다. 둘째 큰아버지댁 언니 둘과 우리 남매, 작은 아버지댁 유나와 민우는 끼리끼리 이야기하거나 텔레비전만 쳐다보고 있었다. (첫째 큰아버지댁 언니 둘은 외국에 있다) 고1인 유나는 핸드폰을 만지작대다 통화하러 나갔다를 반복했다.

매년 계속되는 '시체놀이'

식사 후 TV를 보며 '시체놀이' 중인 친가 친척들.
 식사 후 TV를 보며 '시체놀이' 중인 친가 친척들.
ⓒ 김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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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나서, 남녀노소 다같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거나 누운 채로 '시체놀이'가 시작된다. 이날 우리가 단체관람한 TV프로그램은 명절 단골 메뉴인 마술쇼와 외국인 장기자랑. 신기한 마술사의 손놀림에 친척어른들은 가끔 감탄사를 흘릴 뿐, 가족들간의 대화는 찾아볼 수 없다. 재미있는 장면에 다같이 하하하 폭소하다가 이내 조용해지는 분위기. 가끔 코고는 소리가 정적을 깨기도 한다.

거실에 멍하니 앉아 하는 이 놀이는 내가 명절을 가장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모여 대체 뭐하는 짓인지….'

그날의 분위기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뭐냐에 좌지우지되는 게 너무 싫어, '우리만 이런 건 아닐거야'하고 스스로 위로한다.

사촌들과도 어릴 때는 허물없이 놀았는데 다들 머리가 커지면서 멀어지는 느낌이다. 아니, 멀어지다 못해 그냥 인사만 하는 동네 친구보다 못해졌다. 벌써 2년 전일이다. 나는 소위 명문대 입시에 성공(?)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기쁜 마음에 순수하게, 가까이 사는 둘째 큰아버지댁 언니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형식적인 축하 답문도 받았지만, 2주 뒤 둘째 큰아버지의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주현아, 대학교 발표 어찌됐니?"

어떻게 된 상황일까, 언니들이 내 합격 소식을 전하지 않았나?  뭐 그럴 수도 있지 넘겼다. 하지만 그 후로도 언니들로부터 축하 인사 말이나 대학생활 조언 한마디조차 들을 수 없었다. 큰엄마의 요구로 지방 교대에 진학한 두 언니의 시샘이라 해석한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건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면서 명절 때마다 듣는 이야기가 있다. 취직 스트레스는 누구나 받겠지만, 듣기에 거북한 말들이 명절 때 쏟아진다. 특히 둘째 큰엄마는 나만 보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니 그 학교 나와서 뭐할끼고?"

대학3학년인 내게  "졸업반인데 어쩔거냐"고 하신다. 매년 물으시는 걸 보니 아마도 "학교가 좋아도 불확실한 미래에 걱정이 되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답을 듣고 싶으신 것인지. 섭섭하게 느끼는 건 내가 속이 좁은 탓일까.

187cm인 내동생, 거인병 아니냐구요?

우리 부모님의 결혼 당시, 집안에는 손녀만 네 명이었다. 아들인 내 동생의 탄생은 집안의 경사였다. 그 후 둘째 큰엄마는 일년 동안 체질개선을 위한 금육을 하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드디어 아들을 얻는 데 성공하셨다.

비슷하게 키운다고 내 동생이 하는 태권도 같은 과외활동을 따라시키기까지 하는 우스운 광경도 벌어졌다. 오죽했으면 자식교육을 위해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그것도 우리집 바로 옆동으로 이사까지 오셨을까?

2, 3년쯤 전이었다. 사춘기에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내 동생을 오랜만에 본 첫째 큰엄마,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다.

"병우야, 너 거인병 걸린 거 아니니?"

누구나 늠름하고 믿음직하다는 청년에게 거인병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닌가? 게다가 제사 때까지 합해 그 말을 정확히 '세 번' 하셨다. 나나 동생이 기분이 나쁜 것은 물론이고 엄마도 굉장히 속이 상하신 것 같았다. 딸만 둘 키운 큰엄마라 사춘기 남자아이의 대단한 성장속도를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잘 자란' 아들에 대한 질투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난 여름방학 나의 젊음과 열정을 불살랐다고 자부하는 '오마이뉴스 인턴'에 대해 누군가 물어보기만 해도 열변을 토할 자세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큰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거 순 좌파 신문 아니야?"

아들 때문에 벌어지는 신경전인가

생각해보면 친가 우리 집과 위로 두 큰 집 동서지간의 신경전은 '아들' 때문인 듯도 하다. 아들을 중시하는 시어머니로부터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아들이 있는 집을 질투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명절 때마다 괴로운 것이 한국의 '남아선호사상'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하기까지 하다. 아들이 있고 없고에, 그리고 그 아들이 얼마나 잘 컸냐 아니냐에 연연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대화의 장을 마련하여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어떨까? 답답한 나머지 엄마께 슬쩍 여쭤봤지만, 어른들 세계에서 그런 방법은 어려울 거라 하셨다. 하긴, 나도 사촌언니들과 '왜 서먹한지' 서로 터 놓고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형제들간의 기싸움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시는 것 같다. 하기야, 명절 때는 다들 웃는 얼굴들이니. 가족들이 다 모이는 할아버지의 팔순 생신이 있을 12월이 나는 벌써 걱정스럽다. 

덧붙이는 글 | <우리 가족의 특별한 추석 풍경>응모글입니다.



태그:#추석, #풍경,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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