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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코는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이기 때문에 입구에서 검문이 있을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예리코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말했다. 사해문서가 발견된 쿰란을 출발한 버스가 예리코 입구에 당도하자 무장한 군인들이 나와 검문을 한다. 이스라엘 군인들이었다.

 

“팔레스타인이라면 성경에서 말하는 가나안인들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다가 요단강을 건너 최초로 함락시킨 성이 바로 가나안인들이 거주하던 여리고 성이었지요. 지금은 예리코라고 부릅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검문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왼편으로는 석양빛을 받은 바위산들이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앞 쪽으로는 푸른 숲에 휩싸인 아름다운 도시가 보인다. 그러나 막상 당도해보니 인구 1만 여명의 고도(古都) 예리코는 바위산들만큼이나 황량한 모습이었다.

 

도시 입구에 자리 잡은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아침 시내 관광에 나섰다. 도로변으로 드러난 도시의 모습은 그야말로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 낡아 퇴락한 모습의 저층 아파트 몇 개가 보일 뿐, 대부분 드문드문 세워져 있는 단층 건물들도 초라하고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만년의 역사와 부침을 거듭한 고대도시

 

역사가 1만년이나 되었다는 유서 깊은 도시는 여전히 황폐한 모습 그대로였다. 주변에 몇 개의 과일가게들과 식당이 자리 잡은 주차장에 버스를 세우고 도보 관광에 나섰다. 잠깐 걸어 나가자 길가에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나타났다.

 

“이 샘이 이 도시의 상수원이기도 한 엘리사의 샘, 또는 술탄의 샘이라고 불리는 샘인데 1만 년 전부터 있었던 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상수원치고는 너무나 허술한 모습이다. 물이 흘러내려오는 중간에 낮은 철망으로 칸막이를 해 놓은 곳에 취수용 파이프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개울주변도 정리가 안 돼 있어 지저분했으며 높은 울타리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것이 그저 평범한 도시의 개울이었다. 그러나 흘러내리는 물은 정말 맑고 깨끗해보여서 그냥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저 뒤쪽에 그냥 흙이 드러난 언덕이 보이시죠. 저곳이 바로 여리고성이 있던 곳입니다.”


도로변에 보잘 것 없는 흙무더기처럼 보이는 곳이 그 유명한 옛날의 여리고성이 있던 성터라고 한다. 그러나 옛 성터는 발굴하면서 파헤쳐진 채 아래쪽에 성벽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을 뿐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무려 1만 년 전부터 작은 도시가 형성되었던 집단 주거지였다고 하는데 믿어지십니까?”
사실 이 작고 초라한 도시가 1만 년의 역사를 가진 집단 주거지였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그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가 어찌 이렇게 초라할 수 있을까.

 

“성경에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인들이 매일 한 바퀴씩 돌며 고함을 질러 무너뜨린 성으로 나와 있는데 그 때가 언제쯤이지요?”
“그때가 아마 기원전 14세기쯤일 것입니다.”

 

이 고대도시는 1868년 첫 발굴이 시작될 때까지 누구도 고대 도시의 유적으로 생각하지 못할 만큼 흙으로 뒤덮인 언덕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 세계 고고학자들의 끈질긴 발굴 작업으로 고대 여리고성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첫 발굴은 1908년 오스트리아의 셀린 박사에 의해 시작됐으며 본격적인 발굴은 영국의 고고학자 존 가스탄(1930∼1936년),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 캐서린 케년(1952∼1958년), 이탈리아 탐사팀(1997년)에 의해 이루어졌다.


 


 


무려 100여년에 걸쳐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자들과 그들을 도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모두 1만여 명에 달했다. 이렇게 행해진 발굴조사에 의하여 밝혀진 이 도시는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술탄의 샘, 또는 엘리사의 샘이라 불리는 오아시스 덕분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지금 상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샘 옆에서는 돌을 쌓아서 만든 원시적인 제단과 뼈로 만든 용기가 발견되었다. 탄소연대 측정법을 통해 이 유물들의 제작 연대를 조사한 결과 기원전 1만 년 전인 것으로 밝혀졌다.

 

기원전 8000년경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햇빛에 말린 벽돌을 사용해 직경 5m 정도의 토굴식 주거지를 만들어 집단촌락을 이루어 살았다. 당시 이곳의 인구는 유적의 규모로 볼 때 약 2천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들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너비 2m, 높이 4m 규모의 성벽을 쌓았으며 그 위로는 계단이 붙어 있는 높이 약 8.5m, 직경 10m 정도의 탑을 세웠다. 이 도시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당시 그 정도의 건축물을 세울 수 있을 만큼 발전된 문명과 사회조직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기원전 7300년경에는 시리아 방면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탑과 성벽을 쌓았던 이전의 사람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리고 다시 기원전 6000년경에는 사람들이 갑자기 이 도시를 버리고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 후 기원전 4500년 무렵에는 전에 거주하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종족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지만, 그들 역시 무슨 이유 때문인지 기원전 4000년경에 이곳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이 땅에 다시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300년경이었다. 이 새로운 종족들은 바위를 파서 굴을 만든 다음 죽은 사람들을 매장하는 아주 독특한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 종족들은 이 도시를 거점으로 상당히 번영을 누렸지만 역시 기원전 2300년경에 유목민족인 아모리인들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신비한 고대도시 예리코는 그 역사만큼이나 부침을 거듭했다. 400여년의 역사는 어둠에 묻혔고, 역시 기원전 1900년 무렵에 시리아 연안의 팔레스타인인(가나안인)들에 의해 도시가 재건되었다. 높이가 17m나 되는 거대한 성벽이 세워지면서 이 도시는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기원전 1560년 무렵 이집트에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힉소스인들이 침입하면서 도시는 다시 파괴되었다. 기원전 14세기 초 소규모로 재건이 이루어졌지만 14세기 후반에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3400년 전에 멸망한 종족이 지금도 살고 있는 땅

 

“그럼 구약성경 속에 나오는 여리고성 이야기는 허구인가요?”
“아니죠. 모두 사실이지요,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1560년경에 이집트의 힉소스 인들의 침입에서 유래된 이야기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럼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들의 계보는 어떻게 되나요?”
“이들은 기원전 1900년경에 이곳에 들어온 가나안인, 즉 팔레스타인들이 조상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기원전 14세기 초에 이스라엘에 의하여 멸망한 여리고 성 사람들이 바로 이들의 조상이겠지요.”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3400여 년 전에 멸망당한 종족이 지금 이 땅에서 버젓이 살고 있는 셈이었다. 역사를 더듬어본 후 바라본 샘물은 더욱 신비롭기 짝이 없다. 이 작고 초라하지만 1만년의 역사를 가진 고대도시 예리코는 죽음의 바다 사해에서 북서쪽으로 11km,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4km 떨어진 텔엣 술탄이라 불리는 곳에 있다.

 

이 도시가 있는 지역도 지중해의 바다표면보다 무려 250여m나 낮은 곳이다. 언덕 위에 올라 바라보면 사해의 위쪽으로 요단강이 흘러드는 모습이 어렴풋이 바라보이지만 주변은 역시 황량하기 짝이 없는 바위 사막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그 사막 한가운데서 솟는 맑은 샘이 1만 년 전부터 변함없이 솟아나와 이 척박한 사막에 생명수로 흘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만든 것이다. 이 땅은 메마른 사막 가운데서는 상당히 기름진 땅이었다. 그래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각종 과일들이 풍성한 곳이었다. 주변의 과일가게에서 파는 과일들도 대부분 이 지역에서 난 과일들이었다.

 


 


기독교의 전설이 깃든 거대한 뽕나무

 

엘리사의 샘과 여리고성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가에는 거대한 뽕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러나 뽕나무라고 했지만 우리나라의 뽕나무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이 뽕나무가 바로 삭개오가 올라갔던 그 나무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세리 삭개오가 마침 이곳을 지나가는 예수를 바라보기 위해 올라갔다는 그 나무였다.

 

“그럼 이 나무가 2천년이 넘은 나무라는 말인가요?”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합니다.”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한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오래된 나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에 있는 브리스톨콘 파인이라는 나무는 무려 5000년 가까이 살고 있다니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일행들은 너도나도 뽕나무 주변으로 모여들어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뽕나무 옆에는 뽕나무에 대한 안내문과 함께 세리 삭개오가 이 나무에 올라 앉아 있는 모습의 그림까지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먹고 사는 일에는 종교가 별 것 아니구먼. 이들 팔레스타인들에겐 이슬람이 절대 종교인데, 타 종교의 이야기를 이렇게 잘 가꾸어 놓고 안내판에 그림까지 친절하게 비치해 놓은 걸 보니.”

 

“아마 그렇지 않을 걸요, 이곳 사람들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 별로 거부반응 같은 건 없는 것 같았는데, 다른 곳에서도 그런 적대감 같은 것은 전혀 볼 수 없었잖아요?”
꼭 먹고사는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이들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충분히 수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적대감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예리코의 유적들은 사실 고대 가나안인들의 후손인 이들 팔레스타인들에게는 가슴 아픈 역사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지금 이슬람과 기독교는 상당히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지 않은가.

 

그러나 주변이 온통 이스라엘에 포위되어 섬처럼 고립된 이 작은 고대도시의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이들에게는, 이곳을 찾는 기독교인들이 뿌리고 가는 돈이야말로 그들의 메마른 경제에 샘물 같은 것일 수 도 있을 것이다.

 

1만년의 역사를 가진 고대도시 예리코, 그러나 고립되고 가난한 삶에 조금은 슬픈 눈동자를 가진 그들을 뒤로 하고, 우리들은 다음 목적지인 맛사다와 소금산으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에 올랐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예리코, #여리고, #삭개오, #뽕나무, #술탄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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