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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남녀평등이 많이 이루어져 있다고 하지만 가부장적 질서는 아직도 넓게 퍼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부장적이고 장자를 중시하며 여필종부를 사회윤리의 절대가치로 내세운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17세기를 넘어서며 장자를 중시하는 종법질서가 이루어진 후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으로부터 따져도 그리 멀지않은 수백년내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나 관습으로 생각되지만 그리 먼 시기의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만들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성리학적 윤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충과 효를 지배질서의 중요 이념으로 내세우는 조선사회에서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여인들에게는 남자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성리학에서 내세우는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다.

충과 효는 지금에도 매우 필요한 의식이라고 생각되지만 조선시대의 충과 효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계급적 질서를 위해 강요된 데서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개인보다는 국가와 문중, 가족과 남자가 우선시되는 질서가 요구된 것이다.

사실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여인들의 권리와 사고는 남자와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산을 나누는 데 있어서도 남녀 똑같이 나누는 남녀균분의 사회였고, 제사를 모시는 데 있어서도 남녀가 똑같이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림정치가 시작되고 조선후기로 넘어가면서  종법질서가 강요되자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깊은 안방에서 지조를 절대가치로 강요받으며 살아야 했다. 또한 열녀를 배출한 집안은 문중(집안)의 자랑으로 여겨졌으며 삼강록에 오르고 열녀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절식으로 지조 지킨 고산의 며느리

고산의 손자인 윤이후가 8년가량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다.
▲ 지암일기 고산의 손자인 윤이후가 8년가량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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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사대부가로서 성리학을 실천하며 살았던 해남윤씨가 또한 이러한 사회질서 속에 살아야 했는데 이러한 사회이념 속에 희생당한 여인이 고산 윤선도의 둘째 며느리인 윤의미의 부인이자 공재 윤두서의 친 조모다.

고산 윤선도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아들인 의미는 고산의 나이 50살 때 24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당시는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여필종부의 사회윤리가 팽배한 사회였다. 사대부가의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해남윤씨가였던 만큼 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리라.

의미의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기 위해 절식(음식을 끊음)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의미의 부인은 뱃속에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아마 이쯤에서는 당시 누구라도 만류를 했을 것이다. 고산 또한 이같은 상황에서 며느리의 절식을 만류하고 아이를 낳도록 한다. 이에 따라 의미의 부인은 아이를 낳게 되지만 아이를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절식을 하여 남편의 뒤를 따르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는 사대부가의 며느리가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쳐 지조를 지킨다는 것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아마 해남윤씨가에 있어서도 고산이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때가 성리학적 종법질서가 더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때 태어난 이가 윤이후(爾厚)로 이후는 천재적인 화가였던 공재 윤두서의 친아버지가 되는데 윤이후의 출생은 비극적인 당시대의 사회상황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를 친아버지로 하였던 공재 윤두서는 나중에 큰집으로 양자를 가 종손으로서 가업을 잇게 되는데 이때 양자로 택한 것은 고산이었다.

윤이후의 어머니가 그를 낳고 얼마 후에 절식을 하고 죽은 것은 죽은 남편을 따라가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배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윤이후의 어머니는 사대부집의 며느리로서 성리학적 윤리관 속에 희생당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지배이념이 사회를 차지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러한 질서에 따라가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 임진왜란으로 인해 온 강산이 황폐화되고 조선의 여인들이 능욕을 당하는 혼란한 현실 속에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지배층에서 더 강요하였던 성리학적 사회윤리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인들에게는 가혹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후기 열녀들의 지조와 절개를 기록한 '삼강록'이 발간되어 배포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고산의 문학성 이어받은 윤이후

일민가는 고산의 문학적 성향을 그대로 이어받은 고산의 손자 윤이후의 대표작이다.
▲ 일민가 일민가는 고산의 문학적 성향을 그대로 이어받은 고산의 손자 윤이후의 대표작이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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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고 세상에 나온 윤이후는 할아버지인 고산 밑에서 양육된다. 그래서 윤이후에게 고산은 차라리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조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윤이후는 관계로 진출하여 관료생활을 하는 것보다 초야에 묻혀 글을 쓰면서 살아가는 문학적 삶을 살게 된다. 이같은 배경속에서 윤이후는 <지암일기>를 남기게 되는데 <지암일기>에 나오는 '일민가'는 윤이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산의 문학적 성향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해남윤씨가에서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 하면 문학과 회화 부분에서 가장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윤이후는 이들 가운데 묻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작품 중에 <지암일기>는 윤이후가 57세(1692)부터 69세(1699)까지 7년 9개월가량의 기록을 3권에 담고 있다. <지암일기> 중에는 일민가(逸民歌)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일민가는 관계를 떠나 강호에 묻혀 사는 초야일민(草野逸民)의 심회를 읊고 있다. 때문에 가사에는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작자의 모습과 정회가 잘 나타나 있다.

저즌옷 버서노코 黃冠을 라쓰고
채 나 떨텨쥐고 浩然히 도라오니
산천이 의구 고 송죽이 반기는


일민가에 나오는 제3단은 윤이후가 향리인 해남으로 돌아와 즐거움를 누리며 소요하는 전원생활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고산의 '산중신곡'에 나오는 부분과 견줄 수 있을 만큼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자신의 심상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일민가를 보면 자연속에 몰입하여 은둔하는 모습이 잘 노출되어 있어 관계를 떠나 은일 생활을 하던 윤이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지암일기>와 '일민가'는 국문학사에서 그리 조명되어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불우한 작가의 삶이 문학적 흔적으로 남아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산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자란 손자인 이후를 안쓰럽게 생각하고 특별히 사랑하였을 것이다. 윤이후의 작품에 자신의 문학적 경향이 잘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할아버지와의 끈끈한 인연 때문인지 이후는 1674년(현종 15) 고산이 죽고난 지 몇 년 후 조부인 고산이 경자년에 올린 상소 및 예설 2편을 조정에 올리기도 한다.

고산은 자연속에 은일하며 대표작 산중신곡을 남겼다. 그의 문학성을 이어받은 이가 윤이후다.
▲ 고산의 산중신곡 고산은 자연속에 은일하며 대표작 산중신곡을 남겼다. 그의 문학성을 이어받은 이가 윤이후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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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입니다.



태그:#여필종부, #절식, #일민가, #지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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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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