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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가족과 어린이까지 960명이 1만 5천명의 군대와 3년간이나 싸웠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세계에서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팔레스타인의 예리코를 돌아보고 이집트로 가는 길은, 왼편에 기다랗게 누워있는 사해를 끼고 달리는 도로였다.

 

오른편으로는 넓지 않은 광야를 건너 앙상한 바위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이틀 전에 둘러보았던 쿰란과 엔게디를 지나 잠깐 달리자, 역시 오른편에 길게 이어진 산맥들 중에 홀로 동떨어진 산 하나가 바라보였다.

 

“저 산이 그 유명한 마사답니다.”
세계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을 남기고, 또 가장 처절한 최후를 마친 ‘영웅들의 성지’라는 마사다는 윗부분은 평평해 보였지만 절벽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었다.

 

“오늘 시나이 반도의 북부지역을 거쳐 카이로까지 가야하는 일정 때문에, 저 마사다를 들를 시간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대신 제가 이야기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마사다를 돌아볼 시간이 없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잡혀 있는 일정에 따를 수밖에.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은 로마군의 총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의 후계자인 그의 아들 티투스 장군에 의하여 완전히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해 8월 티투스는 로마에 굴복하지 않는 유대인은 모조리 죽이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열심당원 960명은 끝까지 로마에 항거했지요. 지휘자 엘리에셀은 그 960명을 이끌고 저 마사다로 올라가 삼년간을 버티며 항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 출신의 로마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마사다의 정체는 1900여 년 동안 어둠에 묻혀 있었다. 다른 어떤 역사기록에도 없는 마사다 이야기는 그래서 허구인 줄 알았다. 그런 요세푸스의 마사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기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로빈슨 (Robinson)과 스미스(Smith)에 의해서였다.
 
그렇다고 정체가 곧바로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두 미국인 학자가 어렴풋한 흔적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드러난 것은 125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때까지도 이 산은 근처 아랍인들에게 아스사바(As-Sabba: 저주받은 땅)으로 불리고 있었다.

 

많은 탐험가들이 마사다 위에 올라 그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 내었다. 결국 1963년 이스라엘 정부의 지원을 받은 고고학자 야딘(Yadin)이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렇게 오랜 각고 끝에 밝혀진 마사다는 2천 년 전에 요세푸스가 기록한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엘리에셀, 내가졌네, 자네가 이겼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저 마사다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마사다 최후의 날: 이 바위산 요새를 처음 만든 것은 대제사장 요나단(Jonathan 기원전160~143)이었다. 그 후 유대 왕 헤롯(Herodes)이 기원전 35년에 여기에 왕궁을 짓고 성벽을 둘러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그 무렵에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유대 왕국을 자신에게 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당시 로마에 의지하고 있던 헤롯은 유대인의 반란과 다른 한편으로 로마의 배신을 염려하여 마사다를 유사시에 피난할 수 있는 요새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헤롯이 죽은 후 서기 66년에 유대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로마가 월등한 군사력으로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에 굴복하지 않는 960여명의 ‘열심당원’이라 불리는 민족주의자들은 마사다 요새를 점령하고 저장된 물과 식량, 무기를 이용하여 로마에 대항하였다.

 

마사다에는 많은 옥수수와 콩, 대추야자 등 식량이 쌓여 있었고, 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다. 과일들은 신선했고 잘 익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헤롯왕이 만든 물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으며, 무기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만큼 마련되어 있었다.

 

로마군은 오랜 행진과 무더위에 지쳐 있었고, 마사다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며 퍼붓는 유대인들의 화살과 돌덩이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성안에는 식량과 무기가 넉넉했다. 열심당원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았다.

 

마사다에서 항전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960여 명에 불과했다.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로마제국이 볼 때는 한줌에 지나지 않는 수였다. 로마 황제는 이들을 완전히 쳐부수도록 명령을 내렸다. 마사다는 끊임없이 로마군을 괴롭히고 진지를 습격하는 게릴라 기지로 쓰였고, 그들의 그런 활동은 이스라엘에서 꺼져가는 반란의 불길을 또다시 불붙게 할 염려가 있었다.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Titus)는 장차 아라비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투훈련을 겸하여 서기 72년 실바(Silva) 장군에게 1만 명을 이끌고 마사다에서 대규모 포위 작전을 전개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1만의 군대와 함께 6천여 명의 유대인 전쟁 포로들을 일꾼으로 동원했다. 실바 장군은 마사다를 완전히 포위하여 벽을 쌓고 곳곳에 망루를 세워 지키게 했다. 그러나 마사다는 무기와 식량이 넉넉했기 때문에 이런 포위작전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지치고 견디기 힘든 쪽은 오히려 로마군이었다.


 


마침내 실바는 유대인 포로들로 하여금, 마사다 서쪽 벼랑에 있는 희고 넓은 바위가 툭 튀어 나와 있는 '흰 곶'이라고 불리는 그 바위까지 흙과 돌을 다져 비탈산을 쌓도록 했다. 비탈길이는 무려 200m로 인공산의 꼭대기가 마사다 성벽과 거의 비슷한 높이였다.

 

비탈산을 쌓는 사람들이 유대인 포로들이어서, 마사다에서는 이들을 공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비탈산은 큰 저항 없이 완성되었다. 3년 동안이나 막강한 로마군에 저항하던 960명에게 최후의 날이 온 것이다.

 

“마지막 밤 마사다의 지휘자 엘리에셀은 로마군에게 승리의 기쁨을 주지 않고, 살아남아 로마의 노예가 되기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기로 결정하고, 960명이 장렬한 최후를 마친 것입니다. 열 명의 사람을 뽑아 나머지 사람을 죽이게 하고, 맨 마지막엔 한 명이 나머지 아홉 명을 죽이고 본인은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로마군이 저항이 없는 마사다에 올라가 보니 한 명의 여성을 포함한 네 명의 아이가 살아남아 있어서 마지막 순간을 증언했다고 한다.

 

서기 72년, 로마군은 결국 마사다를 점령했지만 엘리에셀의 예상대로 승리의 기쁨은 누릴 수가 없었다. 마사다에 올라 엘리에셀의 시신 앞에 선 실바 장군은 그의 장렬한 죽음 앞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용기에 그저 경탄할 뿐이다. 엘리에셀, 내가졌네. 자네가 이겼네.”
로마군을 이끈 10군단 사령관 실바장군이 남긴 유명한 말이라고 한다.

 

“요세푸스가 마사다의 960명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이 죽게 됐다고 기록했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그게 사실일까요?”


“나도 직접 읽어보지 못했으니까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그런 기록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럼, 본래 유대의 왕족이었던 요세푸스가 로마에 귀순하여 후한 대접을 받고 잘 살았다고 하는데, 그는 과연 유대편이었을까요? 로마편이었을까요?”

 

그러나 그것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로마가 처음 유대를 공격할 때는 티베리아 지역의 저항군 지휘관이었던 요세푸스였다. 그러나 이미 로마의 막강한 힘과 문화에 매료되어 있었던 그는 결국 로마에 귀순하여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가 되었으니 그는 분명히 유대민족의 반역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 세계사적으로는 위대한 역사가다. 뿐만 아니라 저 마사다의 저항 기록을 남겨 유대민족의 민족정신을 살렸으니 위대한 민족주의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남긴 마사다의 기록이 모두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저 마사다에서 로마에 저항하는 사람들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했다면, 그는 어쩌면 강력한 지배자 로마의 편에 기울지 않았을까?

 

사해와 소금산은 전설처럼 쌓여 있는 자원의 보고

 

“자! 내리십시오, 이곳이 바로 음란과 죄악으로 가득하여 멸망을 당하기 직전 소돔성에서 도망쳐 나오다가 뒤돌아본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곳입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우리들은 또 다른 전설의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여전히 황량한 바위산 밑이다. 직선 도로에서 약간 산 밑으로 비켜선 비포장 도로 입구에는 롯의 아내(Lot' Wife)라는 화살표가 바위산 쪽을 향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상당히 높은 절벽의 바위 산 위에 어떻게 보면 사람의 형상을 닮은 것 같기도 한 뾰족한 바위 하나가 서 있었다.


“저 뾰족한 바위가 바로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된 것이랍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럼 소돔은 어디에 있지요?”
“아직 소돔의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부근 어디쯤엔가 있겠지요.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땅 속 깊숙이 묻혀 있는지도 모르지요.”

모두 버스에서 내려 주변 산을 둘러보다가 흙덩이 같은 것을 만져보니 그것이 소금덩어리였다.


 


“아니, 이게 뭐야, 소금이잖아?”
“이 부근 산들이 모두 소금산입니다. 산 전체가 모두 소금덩어리지요.”
“그럼 저 꼭대기의 롯의 아내바위도 정말 소금기둥이 맞겠는데요?”
“그렇습니다. 저 바위도 당연히 소금기둥입니다. 산 전체가 거대한 소금덩어리니까요.”

 

주변의 약간 비스듬한 면을 손으로 쓸어보니 바닥이 온통 새하얀 소금바닥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이 서 있는 가까운 언덕 위에 작은 공장 같은 것이 보인다. 소금을 채취하여 가공하는 공장이라고 한다.

 

“아까 버스에서 이야기한 마사다 요새 있지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로마가 이 유대 땅에 욕심을 낸 이유가 바로 이 소금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소금이야말로 절대적인 자원이었으니까요.”

 

그럴 법한 말이었다. 소금은 인간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아니던가. 염전에 바닷물을 끌어올려 햇볕에 증발시켜, 조금씩 어렵게 생산하던 그 귀한 소금이 이렇게 지천으로, 아니 산으로 솟아있으니 누군들 욕심을 내지 않겠는가.

 

일행들은 너도 나도 적당한 크기의 흙덩이를 집어 들고 흙을 쓱쓱 털어내면서 하얀 소금덩어리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신기해했다. 몇 사람은 그것을 짐 꾸러미에 갈무리를 한다. 기념으로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보면 '롯의 아내'라는 저 바위 말이에요? 저건 그냥 이곳이 소금산이고 저렇게 그럴듯한 바위가 있으니까 성경의 이야기를 끌어다 붙인 것 아닐까요?”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이름을 붙여 놓으니까 좋은 관광 상품이 되잖아요. 저런 거야 다 믿거나 말거나지요. 하하하”

 


소금산 밑에서 바라보니 저 앞에 사해가 바라보인다. 이 지역은 모두 바다표면보다 훨씬 낮은 지역이다. 그 해수면보다 낮은 이 지역의 특성 때문일까. 주변에 있는 산들과 메마른 광야가 모두 소금밭이었다.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 사해. 그러나 그 죽음의 바다는 각종 자원이 무진장 쌓여 있는 자원의 보고라고 한다. 사해바닥에는 유황과 브롬, 그리고 비누와 비료의 원료로 사용되는 포타슘이 엄청나게 쌓여 있다는 것이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소금산과 사해가 보기와는 달리 자원의 보고라니,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도 겉보기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이스라엘의 국경도시 에일라트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에일라트를 거쳐 이집트 국경도시 타바를 통과하면, 시나이 반도 북부를 가로질러 다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까지 가야할 길이 멀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마사다, #소금산, #롯의 아내, #요세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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