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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내 들꽃마을 할머니 합창단의 고향의 봄 전북 장수 하늘내 들꽃마을 할머니 합창단이 부르는 고향의 봄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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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도시에 사는 개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우리 집 개는 고작해야 대문 언저리가 경계 영역인데, 야산 언덕에 서 있는 나를 벌써부터 알아채고 시비를 건다. 마을회관에 가려고 지름길을 택한 것이 '화근'이었다.

한 때 책가방을 멘 어린이들이 등교를 위해 애용했을지도 모르는 길이다. 다시 돌아 내려가면 그 곳에는 옛 연평초등학교가 있다. 학교 운동장 그리고 교문을 거쳐 마을 입구로 들어서려면 밭을 끼고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저 놈'을 피해 가자니 불과 5분이지만, 여기까지 걸어 올라온 시간도 아깝다.

하늘내 들꽃마을(신전마을) 전경
 하늘내 들꽃마을(신전마을) 전경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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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내 들꽃마을 마을회관에 가다

여기는 전북 장수군 천천면 연평리에 있는 하늘내 들꽃마을. 폐교가 살아나면서 농촌체험 명소로 유명해진 동네 이름이다. "농촌체험 마을 사업으로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이 할머니들의 밝은 표정"이란 박일문 마을 총무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마을회관으로 가던 차였다.

야산 언덕에서 보니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아 딱 좋은 거리"라는 박 총무의 말이 비로소 눈에 콱 박힌다. 이 조그만 야산을 사이에 놓고 학교에는 귀촌한 도시 출신 사람들이, 마을에는 주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서로 부지런히 언덕을 오르내린다. 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한 지혜를 모으고 정을 나누기 위해서다. 자연스레 마을회관 쓰임새가 크게 늘었다. 함께 마을 발전을 위한 회의를 하고 점심도 같이 먹는다. 술자리를 나누는 즐거움도 빠질 수 없다. 특히 요즘 같은 농한기에는 마을회관에 모이는 일이 잦다고 한다.

"거제도에서 산골마을로 이어진 굴 잔치"

이 언덕 지름길에 주민들이 붙인 이름은 '들꽃 산책로'. 길 끝자락에 있는 실개천 다리를 건너서면서 개 짖는 소리가 더욱 요란해진다. 사뭇 달려들 듯, 다행스럽게도 축사 앞에 묶여 있다. 헌데 이번에는 소들이 가세한다. 그냥 듣기 좋은, 구수한 '움메'가 아니다. 날카롭게 끝이 올라가는 '움-머-어'다.

백봉림 할머니가 굴 껍질을 까던 중에 환하게 웃고 있다
 백봉림 할머니가 굴 껍질을 까던 중에 환하게 웃고 있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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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찔해서 더욱 빨라지는 발걸음. 저 앞에서 이장님이 손짓한다. 아마도 요란스런 '마중'에 외지인 방문을 일찌감치 눈치 챈 모양이다. 개와 가축에게 시달리던(?) 차라 더욱 반가운 얼굴, 손영조(54) 이장은 "(박일문 총무에게) 들은 대로지 뭘, 더 말할 게 뭐 있냐"면서 대뜸 손부터 잡아끈다.

마을회관 앞에서 굴 잔치가 한창이다. 헌데 굴이라니, 산골마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메뉴다. 이유를 들어보니 하늘내 들꽃마을다운 잔치다. "거제도에서 '공수'된 굴"이란다.

거제도는 마을 윤동성 사무장 고향. 미대를 졸업하고 도시에서 살다가 귀촌했다. 아내는 학교에 있는 친환경상품 인터넷쇼핑몰 사무실에서 일하고, 가족들은 학교 옛 관사에서 살고 있다.

역시 학교에서 전 사무장으로 일했던 하영택(39)씨는 아예 삶의 터전을 마을로 옮긴 사례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면서도 항상 마음은 귀농에 있었다"는 하씨.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도시에서만 생활했던 가족들이 생각보다 빨리 적응해서 다행"이라며 "마을에서 지내면서 공동체적 삶이란 소중한 가치를 확신하게 됐다. 따뜻한 마을 어르신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마을에 생기가 돈다. 즐겁다. 재미있다"

"뭔 얘길 하고 앉았어, 어여 굴이나 먹어".

하 씨와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여기저기서 '굴 세례'다. 굴 껍질을 까서 내미는 할머니들의 손, 당신은 드시지 않고 손주에게만 먹이며 흐뭇해하는 얼굴과 정말 오랜만에 마주한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구워먹는 굴의 맛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할머니들의 웃음이 돌아온다. 친근함에 '용기'를 얻어 고추장을 담그러 집으로 향하는 범박댁 허성예 할머니(73)의 뒤를 따랐다. "이젠 늙어 자꾸 아퍼 싼 할머니에게 뭘 물을 것이 있냐"는 할머니는 그냥 "좋아, 좋아"만 되풀이한다. "옛날부터 살기 좋았던 마을에 와주는 사람들이 그저 고맙고, 그들과 함께 이것저것 함께 할 수 있어서"라고 하신다.

자원봉사로 유명한 권호석 할아버지
 자원봉사로 유명한 권호석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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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댁 박인월 할머니(74)도 "농촌이 뿌리 아녀"라고 말문을 연다. 박 할머니는 "마을에 생기가 돈다. 젊은이들이 뿌리를 살리기 위해 들어오면서 마을에 아기들도 생겨났다"며 웃었다. 손주를 업고 있는 권호석 할아버지(70) 얼굴도 밝다. '서로서로 양보하고 기초질서 잘 지켜 문화국민 되자'고 쓰인 조끼를 입고, 쓰레기를 줍는 손길이 필요한 곳이면 전국 어디든 달려가는 것으로 유명한 자원봉사 할아버지다.

"전국에서 어린이들이 오잖아. 함께 와서 즐기고 하니까 사람 사는 마을 같더라고. 옛날에는 젊은 사람들이 전부 나갔는데, 이젠 다시들 들어오려고 그렁께. 젊은 사람들 하나씩 들어오고 하니까 참 좋아. 재미있어."

마음이 즐거우니 서로 얼굴도 자주 보게 된다. 고옥임(53) 부녀회장은 "마을에 생기가 넘치면서 예전보다 더 모임이 잦아졌고 그러다 보니까 단합도 더 잘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 "뭐혀? 밥 먹어, 밥".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하는 점심시간, "아저씨, 이것도 좀 좝솨"라며 이것저것 챙겨주는 할머니들 틈에서 그만 '뚝딱' 한 공기를 비우고 말았다. 어느 할머니가 말한다. "밥 먹는 폼 봉께…기자 양반도 여그서 살랑가?(웃음)"

"젊은이를 볼 때마다 우리 아들 덜 보고 잡다"

밥을 먹고 할머니들에게 '감히' 동요 한 곡까지 불러달라고 청했다. "그냥 우리 마을을 방문해 고맙다는 취지로 체험을 마치고 돌아가는 도시인들에게 합창을 들려주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학교에서 공연도 하게 됐다"는 전 사무장 하영택씨 말을 들으면서 더욱 굳어진 욕심이었다. 음대 작곡과를 졸업한 그가 귀촌하면서 마을에 생긴 또 하나의 즐거움.

마침 장이 열린 날이라 "잘 하는 사람들 하나 없구만, 어쪄?"라며 머뭇거리던 할머니들, 하 씨의 기타 반주에 '고향의 봄'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기대보다 근사한 합창은 아니다. 한 할머니 말처럼 "가사 다 잊어먹었는데", "연습할 시간도 안 줘서" 그런지도 몰랐다.

하지만 할머니들 얼굴을 보며 잠시 콧날이 시큰해졌다. 자식들을 다 도시로 보내고 쓸쓸하게 마을에 남았던 우리 할머니들, 할아버지들. 그들도 어린 시절 불렀을지 모르는 동요. 홍난파 작곡, 이원수 작사의 고향의 봄.

마을회관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마을회관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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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지에서 살던 자식들이 오랜만에 고향에 왔을 때, 할머니들 합창 공연을 보면서 막 울더라"던 하영택씨 말이, "사무장이 어깨를 주물러 줄 때마다, 마을에서 젊은이를 볼 때마다 우리 아들 얼굴 덜 보고 잡다"던 평원댁 박인월 할머니의 말이 비로소 가슴에 와 닿았다.

노래가 끝나고 "늙은이들이라도 잘 하지?"라며 웃는 할머니들. 마침 뜻밖의 손님이 마을회관에 들어섰다. 보건진료소에서 근무하는 박금옥(37)씨는 "인근 여덟 마을을 다니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활기차 보이는 마을이 이 곳"이라며 "여기 마을 분들 얼굴이 진짜 많이 밝아졌다"고 말하고 할머니들에게 '한 번 더'를 요청했다.

도농은 10분이다

다시 학교로 가기 위해 마을회관에서 나왔다. 서울 깍쟁이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상투적인 인사를 건넸지만, 할머니들은 "다음에는 막걸리 싸들고 와"란 말로 '진짜 다음'을 기약했다. 그리고 한 때 책가방을 멘 어린이들이 애용했을지 모르는 길에 다시 들어섰다.

여기서 학교로 돌아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정도. 딱 절반쯤 되는 거리에 있는 야산 언덕을 사이에 두고 학교와 마을이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이 조그만 야산은 도시인과 농민이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행복한 경계일지 모른다.

전북 장수군 천천면 연평리에 있는 폐교가 살아났다. 마을이 살아났다. 서로 잘 할 수 있는 것을 존중하고, 함께 잘 할 수 있는 것을 소통한 결과다. 그리고 하늘내 들꽃마을 주민들은 이 길, 들꽃 산책로를 통해 오늘도 소통하고 있을 것이다.

고향의 봄을 불러주신 하늘내들꽃마을 할머니들
 고향의 봄을 불러주신 하늘내들꽃마을 할머니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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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폐교, #하늘내들꽃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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