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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항상 출출하다.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을 땐 그저 망고가 최고다. 아삭아삭 씹히는 과육과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과즙이 허기와 갈증을 일거에 해소시킨다. 그 달달한 맛을 음미한 채 하루를 마감하는 것도 소박한 기쁨이다.

 

그런데 맥가이버 칼로 망고 껍질을 깎다가 그만 손을 베었다. 게다가 깜짝 놀란 나머지 망고마저 바닥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망설일 필요가 없다. 다친 손은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예전 같으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땅에 떨어진 망고는 애지중지 곱게 쓰다듬어 깨끗이 씻어 먹는다. 여행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켜간다.

 

"형, 우리 내일은 120km에 도전해 볼까요? 라스 뚜나스까지 한 번 가보는 게 어때요?"

 

며칠에 한 번씩 J는 제 몸의 한계를 훌쩍 넘는 거리를 뜬구름 잡 듯 말한다. 120km가 그에게 그리 만만하게 다가올 거리가 아니란 것은 이미 경험해서 알텐데도 스스로 시험해 볼만한 숫자를 천장에 그리며 상당한 로망에 젖어 있다.

 

J, 오늘은 좀 제대로 달리는데?

 

다음날 아침 피자와 주스로 간단히 요기를 끝내고 카마구에이에서 출발. 그런데 아침부터 다시 두고 볼 일이 생겼다. J의 스피드가 심상찮은 것이다. 그 육중한 몸을 쥐어짜내도 안 나오던 속력이, 엄청나게 많은 열량을 소비해도 안 나오던 속력이, 갑자기 운동신경 포텐셜이 폭발했는지 아침부터 봄바람의 나비처럼 사뿐하게 미끄러져 가는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게 지구력까지 겸비하며 질적으로도 우수한 속력이었다.

 

'녀석, 오늘은 좀 제대로 달리는데?'

 

오늘은 물도 8리터나 얼려갔다. 문제는 오후 들어 급격히 떨어지는 참담한 체력. 하지만 망고 주스만 된통 마시고 달린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이때 평소에 골골대던 J는 기왕 이렇게 된 거 라스 뚜나스까지 마저 남은 40km도 문제없다며 가자고 계속 종용한다. 웬 자신감이 오늘따라 트래비 분수처럼 솟구치는지.

 

'어제 잠자리에서 말하던 것이 잠꼬대는 아니었구나.'

 

남몰래 엉덩이 마사지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탄 자전거

 

사실 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항문 쪽이 헐어서 몹시 쓰라린 통에 안장에 앉지도 못한 채 무게를 페달에만 싣고 계속 달려왔던 것이다. 설마 몹쓸 치질이겠냐만은 체력으로 또 무릎에도 부담이 컸기에 그만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간만에 사기충천해 있는 J의 기대를 꺾을 순 없었다. 그래서 다시 남몰래 엉덩이를 마사지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랬더니 오늘 아주 날을 잡은 건지 J는 몇 분 만에 안장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를 내팽겨치고 멀찌감치 앞서 나갔다. 컨디션이 최고조에 올라있음이 분명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좀처럼 속썩이지 않던 자전거 튜브마저 펑크가 나고 말았다. 이로써 그나마 실루엣처럼 보이던 J의 뒷모습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하는 수 없이 난 근처 민가로 가서 물을 다섯 잔이나 얻어 마시고는 펑크 수리를 해야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쓰라린 항문 주위를 마사지하랴, 혼자서 펑크 수리하랴, 더운 햇살 아래 눈은 지꺼분해지고 얼굴이 화끈거려 왔다. 가뜩이나 중미에서 두 차례 혈변으로 놀란 가슴, 치질에 대한 염려로 마음은 온통 가시밭길이었다.

 

파도 무서운 줄 모르고 망망대해로 나가다니...

 

 

여의치 않은 펑크수리 대신 아예 새 튜브를 갈아 끼우고 보니 해가 서산을 막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페달에 다리만 올린 채 한참을 가다 보니 멀리 J가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근 몇 시간 만에 제대로 보는 얼굴이었다. 시원한 물부터 건넨 그는 조지라는 남자가 주었다며 돼지고기까지 더불어 권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좋지 않은 컨디션에 위생상태가 염려되어 물만 마셨다.

 

우리는 마침 밭일 중이던 조지와 몇 차례 얘기를 주고받다가 그의 집 앞마당에 텐트를 쳐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자신이 이 마을을 관할 감시하는 대장과 친하다며 그 정도는 문제없다는 것이다. 도로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조지의 집 마당에 들어서니 닭들과 개들과 칠면조들이 온통 뒤엉켜 돌아다니고 몇몇 닭들은 아예 나무 위로 올라가 있었다. 먹이라도 던져주면 수십 마리의 가축들이 떼지어 몰려드는 장면이 가관이었다.

 

우선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은 뒤 커피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었다. 난 얘기의 화두로 역시 쿠바의 자존심을 세워주려 아마 야구 최강국인 쿠바 야구에 대해 입을 열었다.

 

"야구하면 역시 쿠바가 '킹왕짱'이죠! 국가대항으로 붙어도 미국 대표팀을 사뿐히 즈려밟을 정도로 막강전력인데."

"자네는 야구만 보나? 배구도 쿠바가 최강이라구."

 

1100만불의 연봉보다는 1100만 명의 국민을 위해 MLB(메이저리그)를 포기하고 국가대표로 뛴다던 어느 쿠바 야구선수의 명언처럼 야구는 미국에 비해 유일하게 힘의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는 싸움체다. 사회주의 체제임에도 야구만큼 리그가 활성화 될 정도로 저변이 확대된 스포츠도 없다. 그래서 쿠바인들의 야구에 대한 애착과 열정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야구로 한창 화제가 집중되다가 TV를 보니 쿠바를 탈출하려다 두 명의 아이가 사망하고 한 명은 크게 부상당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뉴스다. 정보가 없으니 망망대해를 그렇게 나가나 보다. 파도가 얼마나 무서운 줄도 모르는 채로, 갈증과 허기에 대한 별다른 준비도 갖추지 않은 채로.

 

아마도 그들은 '인접국' 미국이 가까이에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며칠만 배를 타고 나가면 그들만의 아메리칸 드림이 저절로 찾아올 미지의 땅을 바라면서 말이다. 풍전등화의 국가재정난 타개에 앞장설 외화획득을 위해 관광문호를 활짝 개방한 쿠바, 하지만 그 역풍으로 쿠바 국민들의 마음의 문도 자유의 나라(자본주의)를 향해 슬그머니 열리고 있음이 심상치 않다. 이 사건도 그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비극이리라.

 

지극정성 효도에 나도 몰래 감정이 복받쳐 오르고

 

조지에게는 그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인 할머니가 있다. 그런데 무려 3세기에 걸쳐 살아오신 분이란다. 자그만치 1900년생인 것이다.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조지가 이런 나를 더 놀랠 모양으로 집안의 가보마냥 곱게 스크랩 해 둔 사진들을 펼쳐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는 몇 년 전 100세 기념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모습과 특별한 기념일 때마다 찍어둔 장면들이 담겨 있었다. 그때와 지금, 더 깊어진 주름과 더 굽어진 허리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녀는 아직 말귀는 미세하게나마 알아듣고, 힘겹게 몇 걸음 옮길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할머니의 눈은 이미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고, 두 다리의 힘은 갈수록 쇠퇴해 지금은 하루 대부분을 휠체어에 의존하는 신세였다.

 

이런 할머니를 조지의 가족들은 정성스레 수발했다. 끼니때마다 할머니의 작은 방으로 직접 식사를 공수해주고, 방 안이 답답할 때에는 휠체어에 실어 바깥바람을 쐬어 주기도 했다. 간단한 세면이라도 씻기는 것은 기본이요, 우리의 대화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조지는 큰 소리로 귀에 대고 할머니께 일일이 설명해 드렸다. 그러면 할머니는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고개를 까닥까닥 흔들어 보인다. 그것에 다들 웃으며 또 잠시 행복해진다.

 

일이 있을 때마다 조지나 올해 일흔이 넘은 그의 어머니, 그리고 조지의 젊은 아내는 아무런 군말없이 할머니를 보좌하고 때로는 동무가 되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천수를 누리는 할머니의 비결은 뭘까? 단언하건대 이러한 가족들의 지극한 효성을 이유로 꼽고 싶다. 아무리 좋은 음식, 좋은 유전자, 좋은 환경을 누린다고 해도 108세는 하늘의 축복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조지의 효심에 탄복한 하늘의 작은 선물이 아닐까. 오래도록 서로 아끼면서 행복하라는….

 

조지의 가족을 보자니 어디 동방예의지국에서 왔다는 사실조차 드러내기 민망할 정도로 그들의 가족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할머니는 비록 말은 못해도 속으로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고, 흐뭇해할까? 나는 그 무엇보다 할머니의 건강을 빌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조지는 단연코 쿠바에서 가장 행복해야 함이 마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길을 나서기 전 또 조지의 할머니가 생을 다하기 전 기념사진을 찍고자 마당 앞으로 가족을 불러냈다. 사진 한 장 찍는데 무슨 야단인지 할머니의 머리를 손자 며느리가 곱게 매만지고 조지는 마당에서 가장 예쁜 꽃을 꺾어다가 할머니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렇게 부산을 떨고 렌즈 앞에 나와 환하게 웃고 있는 조지의 가족들을 수정체로 보자니 순간 마음이 뭉클해져 왔다.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모습에 살짝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왠지 모르게 손가락이 살짝 떨려왔다. 피사체에서 불효자인 나를 발견한 까닭일까? 흔들거리는 초점 때문에 연신 3번을 찍어야 했다. 그렇게 셔터를 누르자 조지 가족들과의 만남은 또다른 한편의 추억이 되었다.

 

부모에게 지극정성 효도하는 자식의 모습. 너무도 당연한 것을 너무도 놀랍게 받아들이는 내가 때묻은 것이리라.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쿠바의 조용한 시골에서 시간의 흐름을 타고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켜왔을 조지의 할머니, 아직도 살아 계실는지, 지금은 하늘로 소풍을 떠났을런지….

 

'할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당신은 그 자체가 사랑이고 희망입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최근 도전과 열정, 감동의 북미 대륙횡단 스토리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를 발간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쿠바,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라이딩 인 아메리카, #비전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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