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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소리를 들으라고 외치는 함성을!
▲ 들리는가. 백성의 소리를 들으라고 외치는 함성을!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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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끼는 이들 곁에 있었기에 겁없이 살았다

머물고 있는 처소의 처마 밑에 풍경 하나를 달았다. 오래 전 부석사에서 인연을 맺은 후 지금껏 함께 지낸 풍경이다. 풍경은 불탄 집에서 챙겨온 내 마음의 유적. 풍경은 지독한 화마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았다.

뗑그렁… 뗑그렁….

혼돈에 빠져 있는 내 정신을 깨우는 소리도 여전했다. 물고기를 흔들어 풍경을 울리는 것은 바람. 풍경은 골짜기에서 불어온 바람을 만나자 비로소 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청아한 풍경소리에 닫고 있던 가슴이 절로 열렸다. 휑한 마음에 절집 하나 들어서는 듯하여 반갑다.

양철로 된 물고기는 바람을 만난 후 신명이 났다. 날렵한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풍경을 치는 물고기. 그 사이 득도를 했음인가. 소리가 더 깊고 그윽하다. 움직임도 경쾌하다. 이쯤되면 멀미를 할 만도 한데 물고기는 어지러움 잊고 풍경을 잘도 친다.

얼마나 고적한 세월을 보냈던가. 풍경에 매달린 물고기는 맑은 소리를 만들기 위해 제 속을 텅 비워냈다. 바람이 없으면 저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물고기. 외날 껍데기만 남은 물고기는 바람을 만나면서 세상을 깨우는 이치를 깨달았다.

풍경에 매달린 물고기를 흔드는 것은 바람이다. 바람 역시 물고기의 힘을 빌어 풍경을 울리니 둘은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바람과 물고기의 조화가 빚어내는 소리는 세상을 꾸짖는 호통이자 희망의 메시지다.

지난 세월 나 역시 나를 아끼는 이들이 있었기에 물고기처럼 겁없이 풍경을 울리며 살았다. 세상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바람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동지들이고 풍경소리는 내가 세상을 향해 써내는 글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2008년. 올해의 내 삶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다. 그럼에도 잊고 싶은 것보다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이 더 많은 게 용한 2008년이다. 2월엔 소중한 것들이 들어있는 가방을 잃어버려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고, 3월 초엔 취재를 나갔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타고 갔던 차를 고물로 만들었다.

고물이 된 차를 어찌어찌 고치는가 싶었지만, 산벚꽃이 환장하게 피어나던 4월 중순 나는 차는 죽이고 나만 살아남은 사고를 당했다. 그 소식을 들은 소설 쓰는 벗이 중고차를 한 대 사서 집으로 보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껏 그에게 고맙다는 소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염치 없이 그 차를 몰고 다녔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주시옵소서...
▲ 기도.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주시옵소서...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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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희망] 촛불의 바다에서 피어난 민중의 함성

그렇게 5월이 왔고, 참다 못한 어린 여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그렇게 시작된 촛불 정국은 1987년 6월 항쟁에 버금가는 민중운동사를 남겼다.

그 무렵 나는 촛불을 들기 위해 매주 서울로 갔다. 집을 떠나면 보통 3박 4일 일정. 누가 불러서 간 서울행은 아니었다. 누가 오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었다. 난도질 당하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선 촛불이라도 들어야 했고, 그 일마저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서울 갈 여비가 없는 날은 고향인 정선 땅에서 사람을 모아 촛불을 들었다. 시골 촌구석에서도 촛불을 든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다. 행사 안내 벽보를 붙이고 있는 내게 수업을 끝내고 나오던 학생들이 "와, 정선에서도 촛불 들어요, 멋있어요~"라며 힘을 보탰다. 

백성 대다수가 공감하던 촛불. 나는 2008년 5월과 6월, 7월을 거리에서 보냈다. 촛불 든 백성들과 '이명박은 물러가라~'로 시작되는 훌라송을 불렀으며, 새벽이 되면 전경대원의 방패에 찍혀 신음하는 민주주의를 보며 절망했다. 그렇게 역사는 과거로 돌아갔고, 여름을 맞으면서 촛불을 들었던 백성들은 이런저런 죄목으로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지난 여름 나는 거리에서 유모차를 몰고 나온 엄마들을 만났으며, 옷가지를 챙겨 상경한 경남 진주에 사는 사십대 가장을 만나기도 했다.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삼척에서 올라온 어머니도 만났고, '명박산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밧줄을 당기는 고등학생의 가열찬 의지를 보았고, 수녀님과 스님, 십자가를 든 신부님들을 서울광장에서 만났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시기지만 백성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 어디로 가야 하나. 한해를 마무리 하는 시기지만 백성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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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 나도 사랑하지 않아요~"

'명박산성'을 앞에 두고 분루를 삼키던 밤엔 김밥부대가 날라준 김밥을 먹었고, 어느 밤엔 배가 고파 단체에서 마련해온 순두부를 두 그릇씩 먹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촛불 소녀가 그려진 우비를 입고 전경대와 마주섰고, 비가 그친 날엔 우비를 아스팔트에 깔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새벽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성금으로 구입한 손난로를 만지작거렸으며 이동 차량에서 끓여낸 뜨거운 스프를 먹었다.

그래도 몸이 추워지면 촛불다방에서 커피를 마셨으며, 새벽 시간엔 컵라면으로 출출한 속을 달랬다. 멀쩡하게 해가 뜨는 아침이면 농민들이 보내준 수박으로 허기를 채웠고, 한의사들의 정성이 든 보약으로 지친 몸을 충전하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도 촛불들은 전경들에 의해 흩어졌다 모였고, 밤새 서울 거리를 도망다니기도 했다.

6월 30일 서울광장에서 시국미사를 집전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김인국 신부님은 이명박 대통령까지 사랑하자고 했다. 원수조차 사랑해야 하지만 나는 그러겠노라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고, 이틀 후엔 신부님께 장문의 편지(관련기사: 신부님 말씀 듣고 이틀밤 생각했지만 아직은 이 대통령 사랑 못하겠습니다)를 썼다.

편지를 읽은 김인국 신부님이 내게 쪽지 글을 보내셨다. 내용은 짧았다. 글을 소개하자면 '나도 이명박 대통령 사랑하지 않아요^^'였다. 나는 순간 안도했지만 답답한 현실을 견디지 못해 우울증에 빠진 사람처럼 힘든 하루를 보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고 살아온 이명박 대통령이지만 신부님도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진리이자 현실인 대한민국이 서글펐고, 그런 이명박 대통령에게 위탁한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치게 길게 느껴졌다.

거리로 나서는 촛불의 수가 줄어 들었다고 낙담할 일은 아니다. 올 여름 거리를 뜨겁게 달구던 촛불들은 이제 우리의 가슴으로 옮겨 갔다. 우리의 가슴가슴에 피어 오르는 촛불은 날선 방패로도 꺾이지 않을 것이며, 광폭한 물대포로도 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지난 여름 나는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촛불을 보며 그것이 진정 우리가 기다리는 희망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은 나이 마흔을 넘긴 내가 살아오면서 본 어떤 장면보다도 장엄했고 감격스러운 모습이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지금도 소외되고 핍박받는 민중의 삶은 여전하다. 그러나 지난 여름 민중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역사의 시작은 촛불이었고, 촛불은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희망의 촛불을 하나씩 피워 올렸다. 거리에서 만나는 희망들이 다시 하나로 뭉치는 날, 우리가 희망하는 그런 세상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나를 돕기 위한 자선콘서트가 열렸다. 함께 자리한 가수는 손병휘와 인디언수니, 박창근씨. 나는 이들과 아침이슬을 불렀다.
▲ 내가 받은 희망. 나를 돕기 위한 자선콘서트가 열렸다. 함께 자리한 가수는 손병휘와 인디언수니, 박창근씨. 나는 이들과 아침이슬을 불렀다.
ⓒ 김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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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희망] 힘내라 강기희, 당신에게 우리가 있다!

여름이 가고 가을도 중턱을 넘어선 11월 11일.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루었던 모든 것을 잃었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 남기지 못한 생. 살아오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화마가 지나간 자리엔 잿더미만 남았고, 그 잿더미 앞에서는 차마 말도 나오지 않았다.

육신의 부재를 틈탔음인가. 치솟은 불길은 그동안 집필했던 원고와 책, 그리고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내 정신까지 삼키고 말았다. 정신을 잃어버린 내 육신은 엄청난 현실 앞에서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그렇게 서러운 가을이 가고 불탄 집에도 첫눈이 내렸다. 검댕이만 남은 터에 내린 눈은 더욱 희고 고왔다. 차마 녹지 말아야 할 눈이 녹았을 때 불탄 집은 흉물과 다르지 않았다. 대책도 없이 마당을 서성거리다 임시 거처로 돌아오는 길이면 불탄 집을 지키던 개가 주인을 놓치지 않으려 차 꽁무니를 따라 붙었다.

집이 불타고 어머니는 큰형 집으로 갔다. 하지만 큰형 내외는 어머니를 환영하지 않았다. 고작 거실 잠을 재우면서도 그들은 어머니의 심장을 긁었다. 어머니 문제로 큰형과 담판을 짓겠다고 작심한 자리. 그날 큰형은 내게 "배운 놈이 어머이 책임져!"라고 소리쳤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지만 이번은 상황이 달랐다. 나 역시 갈 곳이 없어진 때문이었다.

수도권에 살고 있는 작은형은 마음은 있으되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처지. 가족은 어머니와 내게 길이 되어 주지 못했다. 다시 갈 곳이 사라진 어머니는 결국 달세방을 얻었다. 개는 방도가 없어 골짜기에 두었다. 그리고 나는 임시 거처를 떠나 지금의 처소로 옮겼다. 1월 말이면 다른 곳으로 또 옮겨야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향도 정해지지 않았다.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내 빈 가슴에 희망의 씨앗을 심은 건 동료 문인들과 지역의 동지들, 그리고 내 삶을 지켜보던 많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힘내라 강기희, 당신에게 우리가 있다!'라는 구호를 앞세우고 나를 돕기 위해 기꺼이 나서 주었다. 그들이 걸어온 격려 전화와 얇은 지갑을 털어 보내준 성금은 내 가슴에 지어진 집의 서까래가 되었고 주춧돌이 되었다.

집이 불탄 지 한 달째 되던 날. 새벽까지 통음을 했다. 그날 한 시인이 어떻게 지내냐고 근황을 물어왔다. 나는 "술 마셔요"라고 답했다. 그는 "그래, 모든 게 불탔는데 술이라도 마셔야지"라고 했다. 나는 술잔을 들다 말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러곤 이젠 그만 울기로 했다.

난 진주강씨 박사공파 25대손이다.
▲ 타버린 족보. 난 진주강씨 박사공파 25대손이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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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풍경을 울리듯 나도 세상을 향한 풍경 울리고 싶어

통음을 하고난 이후 나는 새로 장만한 노트북을 펼쳤다. 한글을 불러 놓고 첫 줄에 <천도로 가는 길>이라 썼다. 집이 불타면서 노트북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장편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내 가슴에 심은 희망의 씨앗을 잘 발아시키려면 토양이 좋아야 하는 법. 나는 토양을 튼실하게 만들기 위해 오늘도 컴퓨터를 켠다. 한 줄의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이제 내 글쓰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여 때로는 바람이 되고 때로는 물고기 되어 세상을 깨우는 소설가로 남고 싶다.

잠시 멈추었던 풍경소리가 또 난다. 다시 길을 떠나 어느 곳에 머물더라도 그 집 처마엔 저 풍경이 걸릴 것이다. 내가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희망의 걸음을 내딛었듯 풍경도 바람이 있는 한 세상을 깨우는 소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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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많은 분들이 비틀거렸던 저의 생을 보듬어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제 가슴에 핀 희망의 꽃이 홀씨되어 날아 오르는 날 함께하는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희망의 씨를 뿌려주신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넙죽~



태그:#희망, #촛불,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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